예상했던 대로 인도국민당(BJP) 총재 니틴 나빈(Nitin Nabin)은 10월 10일 좌파 학생·청년 단체와 바퀴벌레 자나타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갸네시 쿠마르(Gyanesh Kumar)에 반대해 시작한 시위를 ‘외국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에 발맞춰 BJP의 여러 지도자도 시위대가 사회에 ‘무정부 상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시위는 민주주의와 성인 보통선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며, 민중이 자신의 민주적 권리를 직접 행사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BJP는 이 시위를 ‘무정부 상태’를 확산시켜 ‘국가’를 약화하는 행위라고 매도하려 한다. 결국 시위 참가자들은 사실상 ‘반국가 세력’으로 몰리고 있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히 시위대를 비난하거나 국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의 신뢰를 떨어뜨리려고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비난이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발언에는 BJP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BJP가 추구하는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핵심과 일치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파시즘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위험한 것이다.

파시즘에는 여러 특징이 있다. 독점자본의 이익, 특히 ‘신흥’ 독점자본을 형성하는 일부 자본 집단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한다. 무력한 처지에 놓인 특정 소수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타자’로 규정하고, 다수 집단이 그들을 증오하도록 부추긴다. 국가의 탄압과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난동을 결합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민중 사이에 공포를 조성한다. 그러나 파시즘에는 이 밖에도 반드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지도자’와 ‘국가’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국가’를 그 나라의 민중과 동일시하지 않고 ‘지도자’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지도자’에게 항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실만으로 ‘국가의 배신자’가 된다. 이들은 사실상 반국가적 인물로 취급받으며, 그들의 행동은 ‘국가’에 적대적인 어떤 ‘외국 세력’의 사주받은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다. 10월 10일 델리에서 정부가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사람들을 탄압하자, 많은 야당 지도자는 우리가 ‘독재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만으로는 현실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파시즘, 또는 오늘날의 맥락에서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신파시즘은 단순한 독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일부 중산층이 간혹 주장하듯 독재가 통치를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물론 파시즘도 이러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논거일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파시즘의 세계관, 특히 ‘국가’와 ‘지도자’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 사고방식이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르티아 K. 센(Amartya K Sen)은 19세기 영국의 수필가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의 말을 인용해 민주주의란 ‘토론을 통한 통치’라고 설명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며, 분명 올바른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시즘이나 신파시즘은 토론을 혐오한다. 파시즘은 정부가 ‘지도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도자’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도 있다. 파시즘 체제의 지도자는 대개 남성이므로 여기서는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파시즘은 ‘토론을 통한 통치’라는 개념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파시즘은 현대사회에서 과거 봉건시대의 낡은 통치관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다”라고 선언했거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럽이란 무엇인가? 바로 당신과 나다”라고 썼던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국가를 통치자 개인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봉건제 말기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당시에는 부르주아지가 등장하면서 이미 ‘국가’라는 개념도 형성되었다. 국왕에게 ‘신이 부여한 통치권’이 있다는 과거의 관념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왕권은 ‘국가’의 이익을 증진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파시즘은 통치자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이러한 전근대적 관념을 부활시킨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왕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군주가 있었다면, 이제는 평범한 출신일 수도 있는 ‘지도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차이왈라(chaiwala)’, 즉 차를 파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도 그런 사례다. 그러나 출신이 어떠하든 이러한 ‘지도자’는 권력의 진정한 원천이자 근원으로 간주한다.

‘지도자’를 ‘국가’와 동일시하고, 지도자가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지도자에게 봉사해야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는 더 광범위한 현상의 일부다. 바로 이성의 파괴다. 파시즘은 명백히 증거를 경멸한다. 그런데 이성이란 증거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뜻하므로, 증거를 경멸한다는 것은 곧 이성을 파괴한다는 의미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는 1952년에 출간한 저서 《이성의 파괴》(The Destruction of Reason)에서 파시즘이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이성 파괴 과정의 궁극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인도에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지도자’와 ‘국가’의 관계 전도는 이처럼 이성을 파괴하는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지도자’와 ‘국가’의 관계를 뒤집는 행위, 증거를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 이러한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비이성을 조장하는 행위가 결합하면 한 나라의 삶 전반에 재앙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수자에 대한 잔혹한 탄압, 민중 전체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행위, 민주적 제도의 파괴, 민중 사이에 만연한 공포 분위기 조성, 대자본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행위 등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피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한 나라의 사상과 지식 수준을 수백 년이나 후퇴시킨다.

이러한 퇴보는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결코 역사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파시스트들은 ‘아리아인’이 인도에서 기원해 세계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명’의 상당 부분이 인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과 배치되는 증거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더스 문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의 출현과 연관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집단이 인도 아대륙으로 이주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그 성격도 전혀 다른 도시 문명이었다. 그런데도 신파시스트들은 인더스 문명의 독자적인 성격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더스 문명을 ‘아리아 문명’의 일부로 의무적으로 가르치려 한다. 한마디로 학생들에게 비이성적인 사고를 강제로 주입하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증거를 검토하고 ‘의문을 제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거 자체를 아예 ‘무시’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물론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의 일부다. 그러나 증거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비이성의 극치다. 결국 학생들에게 신파시스트들이 퍼뜨리는 역사 서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할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다시 말해 신파시스트들은 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한 다른 모든 정치 집단과 구별된다. 신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경제적 퇴보뿐만 아니라 사상적 퇴보까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옹호하고, 모든 사람에게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며, 성인 보통선거권에 기초해 정부를 구성하고, 평등한 사회·경제 질서를 건설하는 것은 인도의 반식민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핵심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목표를 이루었다. 인도는 독립 이후 채택한 헌법에 이 목표들을 명시했다. 헌법의 특정 조항이나 개별 사안에 해 어떠한 비판을 제기하더라도, 헌법이 담고 있는 이러한 비전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헌법이 추구했던 목표를 처음으로 배반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평등을 실현하려는 국가의 노력을 약화시켰다. 신자유주의의 변증법적 작용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실업 문제를 악화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신파시즘 정치체제로 넘어가는 국면에 이르렀다. 오늘날 인도에서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끄는 세력은 힌두트바(Hindutva), 즉 힌두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거 반식민지 독립투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며, 인도 민중이 오랫동안 이어 온 혁명을 되돌리려는 반혁명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학생과 청년들이 벌이는 투쟁은 갸네시 쿠마르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사퇴 요구처럼 구체적이고 겉으로는 제한적으로 보이는 목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실제로 인도를 수백 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사회·정치·경제 전반의 반혁명에 맞서는 투쟁이다.

[출처] The Blinkers of Bigotry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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