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위기’와 노동자

그룹유지도 계열분리도 대안 아니다

‘재벌개혁’도 금융자본 이해와 일치…다시 노동자 고통전담 예고

국내재벌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현대그룹이 휘청거리고 있다.

올해 4월과 5월에 걸쳐, 투신사 구조조정에서 드러난 현대투신 부실 문제, ‘현대 유동성 위기론’ 등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이 와중에서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건설은 최근 4년 동안 이자비용도 감당해오지 못함에 따라 주거래 외환은행의 긴급자금을 수혈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현대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7월말까지 돌아온 부채를 틀어막았다.

‘현대위기’의 배경에는 정주영 4부자 사이의 알력과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겹쳐 있다. 지난 3월의 ‘1차 왕자의 난’ 이후 최근까지 벌어진 정씨 4부자의 알력을 단순화하면, 정주영-정몽헌-이익치를 잇는 그룹유지론과 자동차와 중공업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몽구, 몽준의 계열분리론으로 나뉜다.

대체로 그룹유지론은 정부의 ‘재벌개혁정책’을 거스르는 흐름이고, 계열분리론은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흐름이다. 정주영은 다른 주식을 대부분 팔아 자동차 지분을 9.1%까지 매집하여 계열분리를 어렵게 하고 있고, 정몽헌은 현대상선을 통해 현대중공업을 지배하고 그룹에 묶어두려 한다.

정몽준은 현대전자에 대한 송사를 통해 자신의 이익도 챙기고 중공업의 계열분리를 가속화해 정부정책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부자 퇴진 선언’은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정부의 재벌개혁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몽구가 퇴진을 거부하고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변수는 ‘시장’으로 불리는 투기적 금융자본과 이들이 지배하는 은행, 증권시장, 제2금융권이다. 이들은 부도날 기업이 그룹사의 지원을 받아 존속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족벌그룹의 순환출자를 통해 자신들이 경영에 끼여들 여지를 주지 않는 지배구조를 개혁하기를 원한다. 또한 주가로 표현되는 자신의 평가에 따라 철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즉 주가가 내려가면 노동자를 즉각 해고하거나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임금억제, 노동강도 강화, 노조무력화 조처가 취해지길 원한다. 이는 정부의 재벌개혁 입장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우리경제의 올바른 해법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정부와 금융자본이 추구하는 ‘재벌개혁’도 길이 아니다. 재벌체제의 해악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경제를 망쳐왔다. 그렇다고 계열분리 또는 ‘재벌개혁’이 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계열분리된 독립기업은 결국 투기적인 금융자본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이런 기업에서는 앞서 살펴본 대로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한편 아직은 여유가 있어서인지 정부, 현대 4부자, 금융자본은 부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목표인 재벌체제 유지와 ‘재벌개혁’을 관철하려 합종연횡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그룹의 위기가 미국경제의 하강, 그에 따른 한국경제의 하강(그것이 연착륙이라 하더라도)과 겹친다면 양상은 전혀 달라질 지도 모른다. 더구나 올해 12월과 내년 1월에 도래할 현대그룹의 회사채 규모는 각각 2조7천억원, 1조3천억원이다. 이는 보통 때의 6배와 3배에 이르는 액수인데다 지난 98년의 금융공황 국면에서 높은 이자로 발행된 것이다. 이는 현대그룹의 위기가 올해말, 내년초에 정점에 다다를 것이란 전망을 낳기에 충분하다.

결국 기업부실을 사회화해 전체 민중의 부담으로 떠넘기고, 노동자는 해고-비정규직화와 임금억제로 고통받는 상황이 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투쟁이 요구된다. IMF 이후 3년을 보내면서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머잖아 다가올 위기국면에서든 적어도 그같은 ‘조합주의적 태도’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박하순/ 민주노총 정책부장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