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 미로 속의 대통령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8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우고 차베스는 지난 7월의 선거를 통해 새로운 권한까지 갖게 되었으며, 199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일련의 광범위한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석유 수입의 대대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치유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주위에서는 그의 인민주의 정치가 독재로 변질되지 않을까 미심쩍어하고 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스위스 다보스 발 비행기에서 내린 것은 어둠이 깔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국방장관 페르난도 오초아 안티치 장군이 그를 만나러 나온 것에 놀라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페레스는 흥미를 느끼면서 이렇게 물었다. 안티치가

완강하게 안심을 시키는 통에 대통령은 카라카스 시내에 있는 미라플로레스 궁전으로 가지 않고 라 카소나의 관저로 향했다. 바로 잠에 떨어진 그를 깨운 것은 안티치의 전화 소리였다. 마라카이 지역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가 미라플로레스 궁전에 막 도착했을 때, 일제 포격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92년 2월 4일의 일이다. 라 플라니시에 박물관의 임시 지휘본부에서 당시 반란을 이끌었던 우고 차베스 프리아스 대령은 이 역사적인 날짜에 거의 종교적인 집착을 갖고 있다. 페레스는 그의 유일한 희망은 대중적 지지를 다시 끌어 모으고, 텔레비전을 통해 대국민 연설을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시간 후 반란은 끝났고 차베스는 항복했다. 하지만 조건부 항복이었다. 그 역시 인민들에게 연설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붉은 공수부대 베레모를 쓴 크리올 출신의 이 젊은 대령이 이번 움직임의 주모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천부적인 대중 연설 능력과 함께, 방송 연설은 정치적인 대성공이었다. 2년의 수감 생활 후,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은 그를 사면했다. 하지만, 그의 많은 지지자들은,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란 실패 당시의 연설이 최종적으로 그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만든 선거 캠페인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베스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해준 것은 몇 주 전, 아바나를 떠나 카라카스로 향하던 베네수엘라 공군기 안에서였다. 우리는 그 삼 일 전 아바나에서 처음 만났다. 피델 카스트로와 콜롬비아 대통령 안드레스 파스트라나가 함께 했던 회의에서였다. 내가 차베스로부터 처음 받은 인상은 탄탄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권력의 느낌이었다. 또한 자연스러운 웃음과 베네수엘라 원주민의 크리올적인 우아함을 갖고 있었다. 우린 서로 만날 기회를 엿봤지만, 각자의 일정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다. 때문에 카라카스로 가는 비행기안에서야 우린 그의 성취와 계획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근무 일정에서 벗어난 언론인에게는 유익한 경험이었다. 그의 개인사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성격이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독재자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차베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진짜 차베스였을까?

1998년 선거 당시, 그에 반대하는 주요한 주장은 그가 반란을 모의하고 도발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역사에선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살아남은 비슷한 경우도 네 번이나 발견된다. 첫 번째는 로물로 베탄코우르트였다. 그는 잘했든 잘못했든,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그가 축출한 인물이 이사이아스 메디나 안가리타였다. 이 사람은 36년에 걸친 후안 빈센테 고메스의 독재가 끝난 후 베네수엘라를 바른쪽으로 이끌려고 시도했던 전 군인이자 민주주의자였다. 그 다음은 작가이기도 했던 로물로 가예고스로서 거의 11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다가, 역시 차례로 젊은 민주주의 세대에 의해 쫓겨났다. 그리고 나서는 선거에 의해 뽑힌 대통령들이 계속적으로 집권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이 나라에서는 가장 긴 평화기였다.

1992년의 쿠데타는 명백히 그가 잘못한 유일한 경우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행운의 패배로 본다. 이것이 그가 행운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1954년 7월 28일 바리나스 지역의 사바네타에서 태어난 이래 그는 모든 것을 마법과 결부시켰다. 당연히도 그 행운의 표식은 힘을 상징하는 레오이다. 차베스는 독실한 카톨릭으로서 그의 행운을 어렸을 적 이래 그의 목에 두르고 있는 백년이나 된 성의의 덕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외가쪽 증조할아버지 페드로 페레스 델가도 대령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이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영웅들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교사였던 그의 부모들의 수입으로는 제대로 살아가기도 벅찼다. 아홉 살 때부터 차베스는 거리에서 사탕과 과일을 팔면서 부모님을 도와야 했다. 때때로 그는 집안의 당나귀를 타고로스 라스트로호스 근처 마을의 외숙모 댁에 방문하곤 했다. 그의 생각에는 이 마을이 꽤나 괜찮은 조그만 곳이었다. 밤이 되면 두 시간의 전기를 공급해줄 수 있는 발전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와 그의 네 형제들이 태어날 때 받아 준 산파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차베스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겨우 성가대 소년이었을 뿐이다. 종을 치는 것은 꽤나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들어봐, 우고가 종을 치고 있어”라고 말하며 그의 차례를 주목해서 보곤 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책들을 뒤지던 그는 우연히 신의 뜻처럼 백과사전을 찾게 되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 책의 첫 장에 빠져들었다. 첫 장의 제목은 “삶에서 성공하는 방법”이었다.

볼리바르의 표식 밑에서

사실 그것은 온갖 직업 종류의 목록이었다. 차베스는 아마 그 중 거의 모두를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화가로서 그는 미켈란젤로와 다비드의 열성적인 숭배자였다. 12살 때는 지역 전람회에 출품,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그의 기타 연주 실력과 목소리는 생일 파티나 세레나데를 부르는 곳 등에서 그를 찾게 만들 정도였다. 야구장에서는 뛰어난 포수였다. 군대는 그의 선택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최고의 야구팀 중의 한 곳에서 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리나스 군사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군대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정치학을 공부했고, 맑스주의에서 레닌주의까지의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의 최고의 “레오”인 볼리바르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그의 모든 연설을 외웠다. 1973년 아옌데의 죽음은 그에게 처음으로 정치적 현실성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차베스는 왜 군부가 칠레 민중이 선출한 아옌데를 타도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곧 그의 상관은 그에게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있던 호세 빈센테 랑헬의 아들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삶은 경이로 가득 차있소.” 차베스는 내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내 외무장관이란 말이요!”

또 다른 운명의 뒤틀림은 그 임무의 종장에 그가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로부터 그의 장교용 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가 20년 후 쫓아내려고 시도하게 될 대통령이었다. “더한 것은,” 내가 말했다, “당신은 그를 거의 죽일 뻔했다는 것이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반박했다. “우리 계획은 제헌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었소. 그리고 나서는 병영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였지.”

그를 만나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조적이면서도 시적인 베네수엘라 대중 문화의 전형적인 예였던 것이다. 시간 조절 감각도 훌륭했으며, 거의 초자연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네루다나 휘트먼의 모든 시들과 로물로 가예고스의 전 작품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가 상당히 어렸을 때, 그는 어머니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대로의 강도가 아니라, 후안 빈센테 고메스 시절의 전설적인 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베스는 꽤나 흥분했고, 그의 일대기를 쓰고 그의 이름을 바로 잡기로 결심했다. 사료들과 군대 도서관들을 뒤졌다. 그리고 생존자들의 목격담에 근거하여 자신의 선조가 갔던 길을 재추적하면서 그 지역을 돌아 다녔다. 마침내 그는 고메스를 그의 영웅 목록에 올리고 그의 선조의 보호 성의를 목에 두르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자신의 조사에 심취한 채, 그는 국경지대를 배회하다가 아라우카 강의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콜롬비아 장교가 그의 가방을 뒤지고는 그를 스파이로 간주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상당한 이유를 발견했다. 그가 가진 것은 카메라와 녹음기, 비밀 서류, 그 지역 지도, 그리고 도표로 가득 찬 군사 지도와 두 정의 정식 권총이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스파이 도구들을 봐서는 그의 신분 증명서는 위조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무실에서 말에 탄 볼리바르의 사진을 놓고 몇 시간을 논쟁했다. “나는 흥분하고 있었소.” 차베스는 내게 말했다. “내가 더 설명할수록 그는 더 이해 못하겠다는 거였죠.” 그러고 나자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들어보세요, 대위님. 이것이 지금 현실입니다. 채 백년전도 아닌 그 당시라면, 우리는 같은 군대에 복무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그림 속의 남자가 우리를 지휘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죠. 내가 어떻게 스파이일 수 있겠습니까?” 대위는 그의 설명에 마음이 움직였고, 대 콜롬비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라우카의 술집에서 양국산 맥주들을 마시며 밤새 어울렸다. 다음 날 아침, 숙취 속에 두 사람은 깼고, 그 장교는 차베스에게 그의 역사 탐구 도구들을 돌려주었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두 나라를 가르는 다리 중간에서 서로를 껴안았다. “베네수엘라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지요.” 차베스의 말이다. 그는 13명의 소대 지휘를 명받고, 오리엔테주로 파견되었다. 마지막 남은 게릴라 거점들을 일소하라는 지시였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군정보부의 대령 하나가 쉴 곳을 찾아 그의 병영으로 들어왔다. 척후 한 사람과 일단의 창백하고 수척한 게릴라 용의자들도 함께였다. 잠들 무렵이었던 10시 경, 차베스는 옆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었다. “군인들이 죄수들을 야구 방망이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표시가 나지 않도록 누더기로 싸서 말입니다.” 차베스는 내게 말했다. 분개한 그는 대령에게 그 사람들을 넘겨주든지 아니면 즉각 부대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그들은 명령 불복종으로 나를 군사재판에 세우겠노

라고 위협했습니다.” 차베스는 덧붙인다. “하지만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한 동안 나를 감시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몇 일 후 그는 좀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군대 헬리콥터가 부대 연병장에 착륙해서는 게릴라 매복에 걸려 심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내려놓았다. 차베스는 심한 상처를 입고 겁에 질려 있는 어린 병사의 손을 잡았다. “절 죽게 두지 마세요, 장교님.” 하지만 그 병사에겐 차에 태워질 때까지의 시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른 일곱 명도 역시 사망했다. 그날 밤, 그물 침대에 누운 채 차베스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한편에서는 군인처럼 차려입은 농부들이 농부인 게릴라들을 고문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농부인

게릴라들이 군인으로 차려입었을 뿐인 다른 농부들을 죽이고 있다. 전쟁은 끝났는데 서로에게 계속 총을 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야.” 카라카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내 첫 번째 실존적 위기였소.” 다음 날 그는 자신이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운명임을 확신하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23세 되던 해 그는 그렇게 했다. 베네수엘라 인민 볼리바르군, 그가 지은 운동의 이름이었다. 창립자는 다섯 명의 다른 군인들과 그 자신이었다.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 “뭘 하려고 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목적은 매우 단순했다. “우리의 목적은 일어날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1년 후 그는 마라카이에 있는 무장 병력을 지휘하는 공수부대 장교가 되었고, 심각하게 모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모의”란 말은 비유적으로만 사용했을 뿐임을 강조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공통의 목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구원자 혹은 독재자

이것이 1982년 12월 17일까지의 상황이었다. 이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차베스는 이것을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보고 있다. 그는 2공수연대의 대위였고, 정보장교였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연대 사령관인 앙헬 만리케가 그에게 장교와 병사들 1,200명에게 연설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부대는 오후 1시에 연병장에 집결했다. 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차베스에게 연설을 시작하라고 이야기했다. “근데 연설문은 어디 있나?” 그가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연단으로 접근하는 걸 보면서 만리케가 물었다. “전 연설문은 쓰지 않았습니다.” 차베스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즉석 연설을 시작했다. 볼리바르와 마르티로부터 고취받은 짧은 연설이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200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뒤덮고 있는 불의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몇몇 생각도 포함된 것이었다.

부동 자세로 그의 연설을 듣던 장교들 중에는 그의 운동을 지지하는 펠리페 아코스타 카를레와 헤수스 우르다네타 에르난데스도 들어 있었다. 그의 열정은 폭발적으로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차베스, 자네는 정치인처럼 말하는군.” 만리케가 나무랬다. 195센티가 넘는 거한 펠리페 아코스타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잘못 보신 겁니다. 차베스는 정치인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일개 대위(a captain, 우두머리라는 뜻도 있음)일 뿐입니다. 우리의 몇몇 부패한 지배자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바지를 적실 겁니다.”

연설이 끝난 후 차베스는 아코스타와 우르다네타와 함께 10킬로 정도 떨어진 사만 델 구에레로 갔다. 그 곳에서 그들은 시몬 볼리바르가 아벤틴산(로마)에서 만들었던 엄숙한 맹세를 되새겼다. “물론 나는 그 맹세의 끝부분을 약간 바꿨지요.” 차베스는 말했다. “우리가 스페인 맘대로 우리를 억압하는 사슬을 깨뜨릴 때” 라는 말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강자들 맘대로 우리와 인민을 억압하는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라는 말을 되새겼다. 그때부터 이 비밀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장교들은 이 맹세를 외워야 했다. 수년 동안 이들은 베네수엘라 전역에서 모인 군 대표자들과 함께 은밀한 회의를 조직했다. “우리는 비밀장소에서 이틀에 걸친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나라의 상황을 공부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우호적인 민간인 그룹들과 접촉했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노출되지 않은 채 다섯 번의 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차베스의 말이었다.

차베스가 즐겨 말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나폴레옹은 단 몇 초의 영감으로 전략가는 전투를 결정한다.” 그는 이에 기반해서 세 가지 개념을 도출해 냈다. 먼저 역사적인 시간, 두 번째는 전략적 분, 마지막은 전술적 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가 이 음모자들을 갑작스레 엄습했다. “그렇습니다.” 차베스는 인정했다. “우리는 그 전략적 분에 놀랐습니다.” 그는 “카라카소”라고 알려진 1989년 2월 27일의 반란을 언급하고 있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압도적 다수표로 대통령으로 막 선출된 때였으며, 거의 3주만에 그런 폭력적인 반란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2월 27일 저녁, 나는 박사과정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솔린을 채우기 위해 티우라 병영에 멈췄지요.” 차베스가 내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카라카스에 도착하기 몇 분 전이었다. “나는 부대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대령에게 물었지요.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거리를 지키기 위해서지. 내가 받은 명령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소요를 막으라는 것이야. 나는 그렇게 할거고 말야.’ 나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들어보십쇼, 대령.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그의 대답은 ‘이봐 차베스, 이것은 명령이야. 다른 선택이라고는 없어.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일 뿐이었습니다.” 차베스는 그 날 밤 풍진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다시 차를 몰려고 했을 때, 작은 병사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병사는 철모를 비스듬히 쓴 채, 소총을 흔들거리며, 탄약은 길에 쏟고 있었다. “그래서 난 멈춰서 그에게 올라타라고 그랬죠.” 차베스는 말했다. “그는 엄청나게 흥분한 채 온 몸이 땀에 젖어서 차에 올라탔습니다. 어렸지요, 열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는가?’ ‘전 제 부대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가 대답했지요. ‘그들은 트럭에 타고 저쪽에 가고 있어요. 따라잡을 수 있게 도와주십쇼.’ 그래서 전 그 트럭을 따라잡았고, 거기 탄 장교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몰라요!'”

차베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는 그 무서웠던 밤의 고통스런 기억에 진저리치면서 거의 소리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소총과 500발의 탄약을 쥐어 거리로 내보냈습니다. 그 병사들은 움직이는 것은 뭐든 쏴댔죠. 거리 사방에 총알을 뿌려댔어요. 판자촌과 가난한 사람들이게 말입니다. 재앙이었습니다. 수천명이 살해되었어요. 그 중에는 펠리페 아코스타도 있었습니다. 내 본능이 말하더군요. 그들이 그를 죽였다고요.” 차베스는 계속했다. “우리가 행동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그들은 3년 후에 실패할 쿠데타를 그렇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오전 1시쯤 카라카스에 도착했다. 나는 창 밖으로 이 잊지 못할 도시가 만들어내는 빛의 물결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은 카리브에서의 포옹을 품고 돌아왔다. 나는 그가 훈장을 잔뜩 단 군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채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순간 나는 내가 두 별개의 인물과 함께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했다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나는 완강한 행운 덕분에 나라를 구할 기회를 얻게 된 사람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서 어쩌면 또 다른 독재자로 변모할 지도 모를 몽상가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백년 동안의 고독}, {미로 속의 장군},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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