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평화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 11/7 진 쇼올

1월 4일,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에 반대하는 우익 열혈분자에 암살된 이츠

하크 라빈 총리의 5주기 추모 집회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5만 명 이상이 참

석했다. 이것은 서구 정부와 언론의 묘사와는 반대로 우파가 대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일반의 지지를 이끌거나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방해하고 있

지는 않다는 증거이다.

이스라엘인들이 벤야민 네탄야후 총리와 리쿠드당을 내몰고 에후드 바라

크로 하여금 팔레스타인과의 최종 평화안을 도출하도록 한 지 아직 18개월

도 채 되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여론조사는 5주 이상 계속되고 있는 분쟁

에도 불구하고 60-70%의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원하고 있

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9월 말 폭력 사태가 발행한 이래, 비무장 팔레스타인인들을 진압

하기 위해 바라크가 이스라엘 보안군을 동원한 일에 대해 오직 소규모적이

고 고립적인 항의 시위와 철야 집회가 있었을 뿐이다. 이 진압으로 17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맞닥뜨리는 고속도로변에 정상적인 대화

의 재개를 촉구하는 “평화 텐트”가 세워졌다. 텐트 한 동이 불탔지만, 활

동가들은 다시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85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

이 자유주의적 신문인 [하아레츠]지에 폭력 종식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2주 전에는 두 민족이 함께 사는 도시인 하이파에서 유태계 이

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이 공동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의 언론인이며, 작가인 아미라 하스가 [하아레츠]에 점령 지역

과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꾸

준히 글을 써온 것 역시 그런 예들 중의 하나이다. 하이파 대학의 인류학

자인 다니 라비노위츠는 [하아레츠]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들의 국가가 다른 민족의 비극과 이들에 대한 약탈에 기반하여 세워졌

음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정부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

시의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관을 세우고 국가와 국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의 여느 “새로운 역사학자들”처럼, 라비노위츠

는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인정하고 그들의 요구를 이해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반대 기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최근 역사상

어느 순간보다 더 팔레스타인과의 전면전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도대체 어떻게 한 줌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중동 전체를

뒤흔들지도 모를 전쟁의 문턱까지 끌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시온주의의 용인

우파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은 ‘지금 평화를’을 비롯

한 여타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적 평화운동 그룹들이 시온주의 국가의 정당

성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강제

추방과 비유태계에 대한 유태계의 종교적, 인종적 우위의 지속적인 천명에

기반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진정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에도, 이런 이유들로 이스라엘 평화운동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쪽 민중 모두의 진정한 민주적, 사회적 열망을 정교화할 수 있는 전망을

더 진전시키지 못한다.

11월 4일 집회는 이스라엘 평화운동의 이러한 근본적 무능력을 드러내

주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들고 있던 작은 이스라엘 깃발은 “우리에겐 다른

나라가 없다. 힘과 단결, 자부심을 잃지 말자”라는 애국적 구호로 장식되

어 있었다. [하아레츠]는 이 시위가 그 제의적 성격으로 인해 “신 없이 진

행된 종교 의식”이라는 외관을 띠었다고 평했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분쟁

으로 인해 확산된 자신감의 위기 때문에 집회에 그 전에 비해서는 숫자가

꽤나 줄어든 것이었다. 집회에서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아라파트야말로 이

번 분쟁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으며,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시몬 페레스를 물리친 바 있는 우파의 모셰 역시 이 집회에서 연설

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좌파와 우파, 종교적 유태인들과 세속적 유태인,

유럽계 유태인과 중동계 유태인 간의 화합을 요청하는 연설을 통해 갈채를

받았다.

이번 집회에서 드러난, 정부의 대 팔레스타인 군사 공격에 대한 정치적

정당화의 용인, 애국주의와 국가적 단결의 호소 등이 이스라엘의 평화운동

을 특징지우고 있다. 그 출발점은 언제나 시온주의 국가의 유지 필요성이

었다. 그러나 이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들 자신의 국가를

가질 수 있을 때,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두 국가”론이며, “지금 평화를” 운동이 내세우는 가장 유명한 관점이다.

‘지금 평화를’은 한때 자신의 집회와 항의 행진에 수만 명을 동원했다.

1982년 텔아비브 외곽의 대규모 집회를 통해 사브라와 샤탈라의 난민 캠프

에서 천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항의를 주도하

기도 했으며, 40만 명 이상을 끌어 모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스라엘인

아홉 명 중 한 명이 거기에 있었다. 이 대규모 집회로 인해 정부는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어야 했으며,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이

에 책임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사퇴해야 했다. 현재 메레츠당을 이끌고 있

으며, 바라크 연정의 전 각료이기도 한 요시 사리드는 당시, 그 해 있었던

레바논 침공에 반대한 유일한 유태계 의원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평화운동의 많은 명망가들이 평화에 대한 자신들의 열

망보다는 이스라엘의 보전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리

드는 9월 28일 리쿠드 당수 샤론의 도발적인 예루살렘 성소 방문에 그 어

떤 반대도 제기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비무장인 팔레스

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 평화를’은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

문한 직후 건설되었다. 그 출범을 촉발시킨 것은 리쿠드당 출신의 당시 총

리 메나헴 베긴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였다. 여기에는 1967년 전쟁 이래의

점령지에 대한 시온주의 정착촌의 설치에 반대하는 350명의 이스라엘 군

예비역 장교들이 서명했다. 이들 대부분은 많은 훈장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편지에서, 자신들은 영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 “대 이스라엘”보다

이웃 나라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작은 이스라엘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정책도 “우리가 가진 정의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

으며, “진정한 안보는 오직 평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고, 이스라엘 군

의 진정한 힘은 시민병의 국가 정책에 대한 동일시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그들은 경고했다.

서명자들은 반역자로 비난받았으며,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평화를’이라고 알려진

대중 운동을 이끌어냈다. 단일한 주제를 가진 운동으로서 이 운동의 지도

자들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과도 평화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 대가는 1967년 이래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에서의 자발적 철군이었다.

‘지금 평화를’은 평화에 대한 주된 장애물로서 점령지의 정착촌들에

초점을 맞췄다. 1979년 6월에는 나블루스 근처 유태인 정착촌 엘론 모레흐

에서 3천 명 이상이 참가한 집회를 조직했다. 이들의 시위는 팔레스타인

지주들로 하여금, 그들의 토지가 불법적으로 강탈당했다는 소송을 이스라

엘 법원에 제기하도록 고무시켰다. 이것은 정착 계획 전반에 있어서의 획

기적인 싸움이었다. 심지어 국방장관 에제르 와이즈만조차 이 문제에 대해

총리에 반기를 들고, 엘론 모레흐가 안보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말했

다. 고등법원은 엘론 모레흐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군참모총장 라파엘 에이탄과 농업장관 아리엘 샤론은 이 문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6개월만에 이스라엘 내각은 국제 협약을 무시하면서

까지 이전 요르단에 속했던 그 어떤 영토도, 혹은 신고되지 않았거나 경작

되지 않은 그 어떤 토지도 차후 정착자들을 위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저 위대한 서안 지구 강점이 시작된 것이다.

레바논 침공이 있은 후 수개월 동안 활동가들은 그날그날의 이스라엘 측

사상자 수를 적은 현수막을 내걸고 레바논 철군을 요구하며 베긴의 집무실

밖에서 철야 집회를 계속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행동이 1983년 이스

라엘 측 사망자 수가 500명을 넘어선 직후 나온 베긴의 해명없는 갑작스런

사임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한 우익 광신자가 ‘지금 평화를’의 지도적 활동가 한 명을 암살했고, 저

명한 자유주의적 학자와 예술가 언론인들이 우익 폭력의 과녁이 되었다.

한 정치 여론 분석가가 대다수 이스라엘인들이 땅과 평화를 교환하기를 원

하고 있다고 보고한 뒤, 그의 아파트는 불태워졌다. 샤론 같은 정치인들은

‘지금 평화를’의 성원들을 “반역자”와 “패배주의자”로 낙인찍고는 위협적

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지금 평화를’은 점점 급진적이 되어갔다. 이들은 레바논 폭격과 점령지

내 시온주의 정착촌 건설, 그리고 그에 수반해 벌어진 재판없는 직권적 구

금과 연대 처벌, 그리고 재판이 있기도 전에 용의자들의 집을 파괴하는 등

의 인권 침해에 항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레바논에서의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베트남전 당시 미국

청년들처럼 징병 거부는 하지 않았고, 그런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주장했

다.

‘지금 평화를’은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민족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지

지했다. 1988년 점령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발적 봉기였던 인티파다 동안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테러리즘을 비난했다. ‘지금 평화를’

은 즉각 이스라엘이 “PLO와의 평화 회담”에 임할 것과, 팔레스타인을 유태

지역과 팔레스타인 국가로 분할할 것을 요구했다.

1989년 ‘지금 평화를’의 한 집회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저명한 작가이며

자유주의 지식인인 아모스 오즈는 정부에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라고 주장했다. ‘지금 평화를’은 서안 지구의 친 PLO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기 시작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인 랍비 메이르 카네는 추종자들

에게 그가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닌 유태인들을 쓸어버리라고 요

구했다.

그러나 ‘지금 평화를’의 집회의 규모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땅 대신 평

화”에 초점을 맞춘 채, 이스라엘인 대다수, 특히 최악의 일자리와 주거 조

건에 시달리는 세파르딕(아랍계) 유태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

적 상황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정착 계획에 납세자들의 돈 수십억 달러가

퍼부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금 평화를’은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직

면하고 있는 사회적 상황의 악화가 정착 정책의 직접적 결과라는 것을 설

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만일

그렇게 할 경우, 이스라엘 부르주아 층의 지지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

이다.

나아가 1991년 걸프 전쟁으로 진행되었던 일련의 상황은 평화운동의 한

계를 드러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측이 이라크 반대 쪽으로 모든

중동 국가들을 몰아세울 때, 아라파트와 PLO는 그들이 의지했던 부르주아

지도자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맞선 행동을

통해 미국에 대항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유일한 아랍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평화를’을 동요 속으로 몰아넣었

다. 사리드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신은 그들과의 대화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며, 이제 “나는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고고하게 말했다.

모든 단일한 이슈의 항의 운동들처럼, ‘지금 평화를’은 도덕적이거나 좁

게는 실용적인 이유들로 이스라엘의 강점에 반대했던 이들처럼 꽤나 상이

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이들까지 한데 모았었다. ‘지금 평화를’이 이스라

엘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커져 가는 평화에 대한 정서를 나타내 주기

는 했지만, 이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혹은 계급적 분석

은 거부했다.

아파르트헤이트식 해결책

1992년 일단의 ‘지금 평화를’ 활동가들이 이전의 좌파 세속 정당인 마

팜, 시누이와 합류, 메레츠당을 결성했다. 메레츠당은 선거에서 12석을 얻

어 원내 제3당이 되었으며, 이츠하크 라빈의 연정에 참여했다. 이들의 강

령은 소위 팔레스타인 국가란 것이 아파르트헤이트 형의 반투스탄보다 나

을 게 거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의

경계는 1967년 이전의 상황은 반영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안보 요구에 부합하는 한에서 결정되어야 했다.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팔레

스타인인만이 이스라엘 안에 남아있을 것이며,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이스

라엘인만이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었다. 경제, 관광, 교통, 환

경 보호, 그리고 물의 공동 이용 등에 있어 이스라엘의 이익이 항상 최우

선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것이며, 분리되지 않을 채 남

아 있게 될 것이다.

메레츠당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이스라엘 내

고용은 안보에 위험을 야기하며, 이스라엘 노동자의 임금을 위협할 것이라

는 점이었다. 강령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 민족간의 명확한 분리

야말로 안보적 관점에서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를 영속시키는 방법으

로서나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불법적” 월경을 막기 위해 엄격한 국경

선 통제를 불러오게 될 것이었다. 북아메리카의 나프타 협정은 미국 기업

들을 위해 미국 남부 국경선을 따라 세워진 저임금 공장들의 경우처럼 이

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 경제의 청사진을 제공해 주었다.

걸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아라파트와 PLO, 그리고 그 아랍측 이웃들

과 모종의 화해를 해야한다고 미국이 주장함으로써, 노동당 정부는 팔레스

타인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미국 후견의 협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평화운동의 의제를 채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

나 협상은 정착 계획상의 그 어떤 후퇴도 용납할 수 없었던 우익 시온주의

자들을 진정시킬 필요 때문에 계속 교착되었다.

‘지금 평화를’의 쓰라린 시기는 그 모든 실패와 함께 다음 7년에 걸쳐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부여된 제한적인 자치는 경제적 궁핍과 사회

적 고통, 정치적 억압의 증가를 야기했다. 반면 아라파트 주변의 소수는

번영을 누렸다. 이스라엘이 제공할 수 있었고, 하려 했던 그 어떤 것도 팔

레스타인 인민의 참담한 상황을 경감시킬 수 있는 전망을 내놓지 않았다.

그래서 샤론이 9월 28일의 도발을 감행했을 때, 팔레스타인 인민들 속에

내재되어 있던 분노는 아라파트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폭발했

던 것이다.

새로운 길을 향하여

평화운동은 상황 전개를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지난 7월만 해도 그들은

최종 협상안이 서명되어,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하고, 이스라엘이 발전과

번영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기까지는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평화운동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벤 구리온 대학의 행정학과장 다비드 뉴먼 같은 이들은 여전히 “다른 어

떤 현실적인 대안도 없기 때문에 협상이 제 궤도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오슬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전 이스라엘 사회가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일수록 우리 모두에게는 더 나

은 일이 될 것이다.”

아모스 오즈처럼 대부분은 아라파트에 협상 결렬의 책임을 넘기는 우파

의 비난을 무비판적으로 따라할 뿐이다. 영국 [가디언]지의 의견란에서 오

즈는 아라파트와 관련해서 “우리는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말을 반복적

으로 사용하며, 현재의 분쟁을 불운하고, 심지어는 우연적인, 어떤 재난으

로 보고 있었다. “불필요하고 공허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상황이 종료되면 두 국가라는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

다. 유태인에게도, 팔레스타인인에게도 다른 해결책은 없다. 그들은 하나

가 아니기에, 행복한 한 가족처럼 함께 살 수 없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은 현실적 인구 분포에 따라 대략적으로 나라를 가르는 분리선을 긋는 것

이다.”

‘지금 평화를’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공존 불가라는 시온주의의 필수조건

을 용인하고 있다. 시온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 전역의 유태 민족의 동화

를 막는 기능을 했으며, 그 지지자들이 반 아랍 차별에 기반한 국가를 세

웠던 것이다.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내 아랍인들은 테러를

통한 팔레스타인 강제 추방뿐만 아니라, 높은 실업률에 고통받고 있으며,

빈곤층으로 떨어질 확률은 두 배나 높다. 또한 최저의 임금 수준으로 비숙

련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택, 대부 등의 혜택은 거부되고 있다. 비

유태계인은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도 금지되고 있으며, 때문에 1948년 이스

라엘이 선포된 이래 그 어떤 아랍 마을도 건설되지 못했다. 또한 사회적

차별은 세파르딕과 에티오피아 출신 유태인, 그리고 여타 비유럽계 후손들

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 사회에서 극단적 유태정교회정당들이 세속적인

유태인과 보다 온건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이들의 바램에 역행해서 사회

생활의 많은 면에 자신들의 명령을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빈부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져가고 있으며, 실업률은 10% 이

상 치솟았고, 임금과 사회적 혜택들은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민주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처 없이 시온주의 전

쟁광들에 대한 진정한 반대를 진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지식인, 평화운동가들은 ‘지금 평화를’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

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세속적이며, 사회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아랍과 유

태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지난한 정치적 투쟁을 통한 길 이외의 다른 어

떤 길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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