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사업 반대 투쟁의 함의

이창석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사무국장, snjb2@chollian.net)

들어가며…

새만금 간척 사업을 두고 많은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이쯤이면 대부분 새만금 사업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새만금 사업이 얼마나 흉악한 사업인지에 대해서는 직접 현지에 와보면 알 수 있다. 간척 사업을 통해 새로운 육지를 만들고, 그 육지에는 황금빛 벼들이 머리 숙여 익는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필자가 바로 직접 현지에 와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곳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노을과, 갯벌에서 숨쉬고 있는 많은 생명력을 만나보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새만금 벌판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자산 가치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접근하는 설정을 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시민 운동 경향의 단체들이 접근하는 방식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제는 무조건 맞다. 그러나 이 전제만으로 새만금 사업이 반대되고, 단순히 반대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실은 좀 약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 생각에서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이해 관계들을 너무 섣불리 재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는 동감댐에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동감댐 건설을 막기 위해 엄청난 투쟁과 후원이 조직되었고, 이는 성공했다. 결국 백지화를 보장받았으며-물론 정부는 아직도 딴죽을 걸고 있다-동강의 아름다운 강산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동강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잘 모른다. 그 주민들은 동강댐 건설로 인해 10년 넘게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이 주민들의 삶은 극단이었다. 결국 주민들은 차라리 동강댐을 건설하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환경 단체들의 투쟁으로 인해 동강댐 건설을 무효화되었고, 결국 주민들의 삶도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주민들의 생존권이 무참히 부정되어 버린 사실에 말이다.(필자가 알기에는 이제 동강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정확히 무슨 운동인지는 모르지만 환경운동연합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이것이 현실적인 운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점없는 생존권 보존 운동(?)이라고 해야 할까! 생존권 보존 운동은 애초 자본주의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새만금에도 이런 이데올로기의 허점들이 있다. 그래서 새만금 투쟁이 더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쟁점들을 중심으로 얘기해 볼까 한다.

환경권과 생존권의 충돌의 변증법

앞서 동강의 예를 들어 본 것은 새만금에도 이런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새만금 주민들은 어업 보상금 500만원 정도를 받은 상황이다. 물론 어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수십 억을 챙겼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어민들은 고작 500만원 정도에서 정든 일터일 뿐만 아니라 생계의 기본인 바다를 잃어버린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 어업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고기는 안 잡아도 농지를 분양 받으면 되기 때문에 새만금 간척 사업 찬성으로 극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바로 이점이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관점에서의 혼란이며, 이데올로기의 허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지 주민들이 투쟁하지 않으면 이 사업은 강행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가졌다는 운동 진영마저도 이 점에 대해서는 묵과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바로 환경권과 생존권과의 충돌을 극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 투쟁을 통해 과연 자본주의 반대 투쟁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목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즉 시민 운동 경향의 환경운동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 허약함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모순을 해결해 가는 그런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데올로기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실제 우리 운동이 지향해가고 있는 전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아가서는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반대 운동의 견실한 주체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 할 나위가 없다. 아직까지는 이런 상태로 접합을 시도할 수 없는 상태임은 분명하다.

주요하게 충돌하고 있는 환경권과 생존권이 어떻게 변증법적인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그저 당위적인 고민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는 환경을 위해 주민의 생존권을 버릴 수 없는 문제이며, 생존권을 위해 환경을 버릴 수 없는 문제임을 직시함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논쟁을 하는 경우를 본다. 생존권이 먼저냐, 환경권이 먼저냐 하는 식의 논쟁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생존권이 먼저이든 환경권이 먼저이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두 가지 기본권이 동시에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권을 전술적으로 활용하고 대안을 찾아내며, 지역 주민과 전 민중들을 상대로 이데올로기화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충돌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지 주민에게는 생존권에 관련된 대안을 제시하고, 보다 구체화하며, 농민과의 연대를 강화해주는 방안을 모색하고, 전 민중에게는 전 민중이 누려야 할 아름다운 환경을 위한 연대를 호소하는 방안을 모색해 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먼저냐는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 새만금 사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반민중적인 작태를 폭로하며, 현지와의 투쟁을 긴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치권의 역사 만들기에 대한 우리 투쟁의 관점

전북지역 정치권은 이 간척 사업이 올해 들어서 쟁점이 되었다는 것에 분노(?)한다. 이유는 그렇게 수십 년간 진행되어 온 간척 사업인데 왜 하필 새만금을 걸고넘어지는가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혹자들은 시화호 때문이라도 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시화호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시화호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또한 19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검토한 사업이라고 주장하며, 새만금 사업에 대한 유구한 역사성을 설명해 댄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제 위기에 직면했고, 아직도 경제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 자본주의를 회생시킬 유일한 사업으로 극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단절’이 필요하다. 간척 사업에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농지가 들어서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새만금 사업은 그렇지 않다. 이곳에는 복합산업단지라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이제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농업기반공사에서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오직 농지를 위한 사업이라고 하고, 전라북도에서 오버한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농지만으로는 대중적 이데올로기를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농업기반공사의 문건에는 ‘※’표시를 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얼마나 교묘한 일인가!) 박통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면에는 바로 유종근 전북지사 같은 신자유주의자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농지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기 때문에 복합산업단지라고 말한다. 대다수 민중들은 복합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전북권은 이제‘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일들이 행복 시작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역사 만들기에 대한 단호한 ‘단절’이 필요함을 각인해야 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까지 확장해야 한다. 신

자유주의 관철에 대한 최대 쟁점으로 형성될 수 있는 기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적 환경 파괴’라는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환경 파괴’라는 말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소극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환경 파괴’라고 해버리면 왠지 이 시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이니까 시대성만 부여한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파괴가 전 인류가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우리다운 대전제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런 대전제는 전 인류가 지향해 가는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자본주의 운동에 따른 계급적인 시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바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으로 확장시켜내며, 새만금 간척 사업의 문제점을 전면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개발 이데올로기와의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우리들의 관점이 서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성은 바로 자본주의 발전사에 있으며, 이 자본주의 발전사를 통해 나타나는 모순들을 극복해내는 것 또한 우리의 역사성임을 확인시켜내는 투쟁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반자본주의 투쟁은 단순히 선언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투쟁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실성 깊은 투쟁 사안들을 우리 스스로가 내부부터 확인시켜낼 수 있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만들어내며, 대중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의 역사성과 우리의 역사성이 다르다. ‘신자유주의적 환경 파괴’라는 시대성만을 부여하는 것은 극복하되, 그곳에 계급적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으로서의 가치, 즉 반자본 운동의 가치를 새만금 반대 투쟁에서 발견한다. 이는 계급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공세를 취할 때 가능하다. 아직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전면화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 투쟁을 지속하며, 압박할 수 있는 세력은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수행하는 사람들만 가능해 질 것이라는 점을 예단해 본다. 우리 운동은 “사회 변혁적 관점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해명해야 할 것이며, 사회 변혁의 주체를 어디서 형성해 낼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복잡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새만금 반대 투쟁에 있어서도 예외에는 아닐 것이다.

새만금 반대 투쟁은 현지와 직결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만금 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앞서 제기한 문제점들이 있다고 해도, 이데올로기가 서로 동일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새만금 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런 투쟁을 통해 앞서 제기한바와 같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내며, 자본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 전개되고 있음을 사회 곳곳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새만금 반대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만금 현지와의 투쟁

이 언제나 직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은 현지 주민들의 생각이 분분하나 이는 분명히 동일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단순한 이데올로기 접근으로는 이런 동일지점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접근하고, 투쟁은 반드시 현지와 직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정리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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