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환경 위기: 기술이 대안인가?

「월간평론(Monthly Review)」2000/12 존 벨라미 포스터*

이 글은 2000년 12월 2-3일 “20세기: 꿈과 현실”이라는 주제의 토쿄 히토쓰바시

대학 심포지움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표준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좀 더 환경친화적인 방향으로 기술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좀 더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생산을 비롯하여, 단위연료 당 주행거리가 보다 긴 자동차의 개발, 화석 연

료의 태양열 에너지로의 대체, 자원 재활용 등이 그것이다. 인구 성장 억제나 심

지어 소비 절제 같은 여타 환경 개혁 역시 종종 적극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현

재로서는 기술이라고 하는 마법 탄환이야말로 자본주의적 기제의 원활한 작동에

가장 영향을 적게 미칠 수 있는 환경 개선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총아처럼 보인

다. 나라별 온실 가스 방출 제한을 위해 고안된 1997년의 지구온난화에 관한 쿄토

국제 의정서는 이런 입장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며, (앨 고어와 그

의 대선 캠페인을 포함해서) 미국의 많은 환경론자들을 고무시켜 환경 문제에 대

한 주요한 탈출구로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개발을 옹호하도록 만들었다.

가술 변화가 환경에 대한 충격을 완화시키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기술 개발은 단위산출 당 사용되는 자원과 에너지량을 줄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보다 덜 해로운 기술로 대체할 수 있다. 그 미학적 효과를 비롯하여, 19세기 이래

의 대기 상태 개선의 대부분은 석탄 연소로부터 유발되는 악명 높은 연기와 아황

산가스 방출의 감소에 기인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다른

에너지원들과는 대조적으로 태양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 유용한 공급원일 뿐만 아

니라(시간과 장소에 따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생태친화적이다. 그래서 환

경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태양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화를 선호한다. 이러한 고려들

이 특히 에너지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최악의 오염물을 제

거하는 좀 더 환경친화적인 생산 과정을 채택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관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는 이 중 에너지 효율성 부분에 집중해서 조명하려 한다. 자원 이용과 생

산 기술에 관한 이슈는 현재의 축적 체제하에서는 훨씬 더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 한 이유는 현재의 생산 과정이 때때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독성 물질까지

그 안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화학 합성 물질의 확산이 플

라스틱이나 살충제 같은 것들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산업과 농업 기업의 성장과 연

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들 화학 합성 물질의 대부분은 암이나 기형을 유

발할 정도로 극히 해롭다.(이것은 배리 코모너의 {닫힌 순환(Closing Circle)}의

중심적인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독성 생산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자본주의 질서 기득권 세력의 상당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자본주의

질서는 오직 혁명적 운동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너지 효율성의 직접적인 개선은 언제나 자본 그 자신에 의해서 강조되어 왔으

며, 이론적으로 체제가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영역, 심지어 체제가

자랑해 마지않는 부분에 속한 문제였다.

과거에는 흔히 환경주의자들이 잘 알려진 바 있는 환경적 충격 혹은 “PAT(인구

(P) × 풍족함(A) × 기술(T) = 환경적 충격)” 법칙을 사용해서 “세 종류의 세계”

가 가진 문제들을 비교했다. 이런 지배적인 관점에 따르면, 제3세계의 환경 문제

는 먼저 무엇보다도 기술이나 풍족함보다는(낮은 수준의 산업화 정도를 고려해 볼

때 말이다) 인구 성장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었다. 소비에트 블록

의 환경문제는 낮은 기술 수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기술은 단위산출 당

소비되는 자원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서구보다 덜 효율적이었고, 환경적 영향이

즉각적으로 지역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더 해로운 것이었다. 서구의 주된 환경

문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구 성장이나 기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이 부분은

서구가 환경적으로 상대적인 우위를 갖고 있던 분야이다), 그 풍족함이나, 환경에

부과했던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마지막 의지처는 항상 그들의 기술적 선진성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 기술적 선

진성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풍족함을 확장시켰던(다시 말해, 자본과 소비의 확

장) 만큼이나 또한 환경적 개선을 이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또는 새롭게 적용되는 기술을 통해 경제 확장에 따른

환경 악화를 막을 수 있을까?

제본스의 역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생태주의 경제학자들이 제본스의 역설이라 부르

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유용하다.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1835-1882)는 한계효용에

뿌리를 둔 주관적 가치 이론과 더불어, 당시의 신고전주의적 경제 분석의 한 개척

자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제본스가 처음 전국적 명성을

얻은 것은 {석탄 문제}(1865)라는 저술을 통해서였다. 제본스는 영국의 산업 성장

이 값싼 석탄에 기대고 있으며, 채탄층이 깊어지면서 석탄 가격은 상승하고, 그에

따라 경제는 정체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인구는 식량 공급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

는 맬서스적인 총론 속에서 옥수수를 석탄으로 대체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의 생존은 이제 더 이상 옥수수 생산에 달려있지 않다. 중대한 의미를 지닌 곡물

법 폐지를 통해 우리는 옥수수로부터 석탄으로 내던져졌다”({석탄 문제}, 3판,

194-195). 제본스는 기술이나 대체가능성(즉, 석탄을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것)으로도 이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제본스의 계산은 완전히 틀렸

다. 그의 중대한 실수는 석유나 수력 같은 석탄 대체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다

는 점이다. 1936년, 제본스의 주장을 해설하면서, 케인즈는 그의 주장이 “너무 억

지스럽고 과장되어 있다”({논문집}, 1951, 259)고 말했다.

하지만 제본스의 주장에는 생태주의 경제학자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킬 만한 한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석탄 문제} 7장은 “연료 경제에 대하여”였다. 여기서 그

는 석탄 같은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효율성의 증가는 수요의 감소가 아

니라 그 자원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귀결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러한 효

율성 제고가 생산 규모의 확대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제본스는 이렇게 쓰고 있

다.

연료의 경제적 사용이 소비의 감소와 상응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개념의 전체적인

혼란일 뿐이다. 사실은 그 전혀 반대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경제 양식은 소비의

증가로 이어지며, 이것은 상응하는 많은 예들을 통해 도출되는 원칙에 따르고 있

다… 똑같은 원칙들이 심지어는 더 큰 동력과 독자성을 가지고 석탄과 같은 그런

일반적인 요소의 사용에 적용된다. 그런 요소의 소비 확대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

것을 사용하는 바로 그 경제이다… 이런 역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가령 용광로에서 사용되는 석탄량이 산출과 비교해서 감소

하게 된다면, 교환 이윤은 증가하고 새로운 자본이 모일 것이며, 선철 가격은 하

락할 것이다. 하지만 석탄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감소된

소비량을 채우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수의 용광로가 만들어질 것이다. 또한 이런

현상이 언제나 하나의 공장에서만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면, 어느 공장에서 달성

된 발전이든 간에 대부분의 다른 공장에서도 새로운 작업을 채택하도록 촉진하게

될 것이며, 직접적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으로나마 더 많은 새로운 석탄층을 채굴

하도록 만들 것이다… 리비히 남작은 문명은 동력의 경제이며, 우리의 동력은 석

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산업을 현재처럼 만든 것은 석탄을 사용하는 바로 그

경제이다. 그 사용에 있어 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 될수록 우리 산업은 더 번

영하게 될 것이며, 우리 문명 역시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140-142)

제본스는 계속해서 증기기관의 모든 역사는 그 사용 방식에 있어서 연속되는 경

제 체제의 역사라고 상세하게 주장한다. 매 시기를 통해 생산 규모와 석탄 수요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엔진 기술의 모든 개선은, 그것

이 효과적일 때, 석탄 소비를 다시금 새롭게 촉진한다. 모든 공장들은 새로운 자

극을 수용하며, 육체노동은 여전히 그렇게 기계노동으로 대체된다”(152-153).

제본스의 역설의 현재적 유의미성은 미국의 자동차 산업 부문에서 여실히 드러

난다. 1970년대 이 나라에는 보다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자동차가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연료 수요의 감소를 가져오지 않았다. 운전 시간도 늘어났고, 도로에 쏟아

져 나오는 차량의 수도 금새 두 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냉동 기술의

개선은 냉장고의 대형화와 대량 보급을 가져왔을 뿐이다. 개별적 소비와는 상관없

이 똑같은 추세가 산업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기술과 축적

제본스는 자신의 역설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평가될만 하지만, 그가 제기

한 문제의 전적인 파장은 그의 {석탄 문제}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초

기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본스는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작업을

특징짓는 계급과 축적의 문제를 조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경제 분석은 축적

과 성장의 역동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주로 정적인 균형

이론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시민권을 부여해주었던 제본스로서는 지

속적인 수요의 증가에 대해 개인적 행위나 맬서스적 인구론 이상의 설득력있는 설

명을 내놓을 수 없었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역학으로 축적과 성장을 추구하는 체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이라는 기업측의 오직

하나의 필요성에 의해 굴러가는 죽음의 수레바퀴(juggernaut)이다. “축적하라, 축

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썼다(1권, 24

장 3절). 이러한 진행을 가로막는 유일하고 실제적인 장애는 상호 경쟁과 비인격

적 시장의 힘으로부터 야기되며, 결국에는 주기적인 위기들로부터 온다.

분명히, 아담 스미스 이래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직접적으로 부의 추구

에 전념하는 체제이며 인간의 소용을 추구하는 것은 그저 간접적일 뿐이라고 주장

해왔다. 현실에 있어서 첫 번째 목적은 두 번째 목적을 압도하고 변형시키기까지

한다. 자본가들은 의식주를 비롯해 인류와 사회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편익 같은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상품의 생산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보다 많은 이윤의 생산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뿐이며, 생산하

는 상품의 유형이나 그 최종적 효용 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상품의 사용가

치는 점점 더 그 교환가치에 종속된다. 허영적 소비에 기여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인류 및 이 지구에 (인간의 소용에 합치되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

서) 파괴적인 영향을 줄뿐인 사용가치는 대규모적으로 제조되는 것이며, 이러한

파괴적인 상품을 향한 욕망은 이 사용가치와 함께 근대적 시장의 힘을 통해 조작

된다.(폴 M. 스위지, “자본주의와 환경”, {월간평론} 41권 2호(1989년 6월)을 보

라).

결코 정적일 수 없음을 웅변하며 다른 여타 사회체제로부터 자본주의를 구별짓

는 것은 자본 축적에 대한 그야말로 단선적인 이런 집착이다. 조지프 슘페터가 이

야기했다시피, “정태적 자본주의”는 “개념상의 모순(contradictio in adjecto)”이

다({논문집}, p.29). 이윤률을 유지하고 제고시키기 위한 생산 수단으로 자본의

지속적인 변형을 강제하는 것으로서, 경쟁은 이러한 축적 경향 배후의 핵심적인

동력을 제공한다. 슘페터는 그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이것을 “창

조적 파괴”를 향한 자본주의의 경향이라고 지칭하였다. 창조적 파괴는 새로운 종

류의 보다 효율적인 분배 및 생산 수단의 혁신을 통한 창조이며, 동시에 이전 분

배 및 생산 수단의 파괴를 뜻했다. 축적과 창조적 파괴의 이러한 가차없는 과정

속에 사로잡힌 채, 체제는 그가 가는 길에 놓인 모든 것들에 공격적이 된다. 자본

의 축적을 방해하는 모든 인간적, 자연적 요구들은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로 간주

된다.

자본주의의 지수적(엄청나게 빠른) 성장과 이와 더불어 야기되는 천연자원과 에

너지에 대한 소비의 증가는 급속하고 복합적인 환경 문제로 귀결된다. 월드워치연

구소가 {세계보고서 1999}에서 “역사의 가속화”라고 불렀던 것의 이면에는 바로

이 문제가 놓여 있다. 역사의 가속화는 지구 환경의 변형과 생태계의 파괴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급속한 수요의 증가에 대처

할 수 있을 만큼 지구의 근본적 능력이 제고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이 문

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은 어떤 식으로든 수요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인구의 안정화 및 더 나아가서는 감소, 그리고

기술 수준의 제고와, 보다 장기적으로는 사회경제상의 변혁이다. 대부분의 인구학

자들은 세계 인구가 점차 안정화되고 있지만, 그 자체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일인당 자원 및 에너지 소비는 계속 지수적으

로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는 늘 문제의 다른 두

측면에, 그 중에서도 보통 기술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쿄토 의정서 들여다보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 방출량을 2008년에서 2012

년 사이의 일정 시기까지 1990년 수준 이하로 5.2% 감축할 것을 요구한 쿄토 의정

서는 이들 나라에서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온실가스의 대기 방출 증가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일련의 연쇄적인 반응을 유발시켜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적 시

간대 내에 지구적인 환경 재난이 야기될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

국은 이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상원에 인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이산화탄소 방출량을 어느 수준까지

줄여야 하는지, 그리고 삼림 보유(이른바 “탄소 흡수”)에 대한 참작 여부, 국가간

에 오염물 배출권을 매매할 수 있게 하는 교역가능한 오염물 배출 배당권의 역할

등에 대한 격렬한 협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산화탄소와 여타 온실가스에 관해, 쿄토 의정서의 주요 목표는 대기 중에 방

출되는 온실가스의 지수적 증가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2012년까지 온실가스 방

출을 1990년보다 5% 낮은 수준으로 복귀시키는 것은 생산 규모와 함께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방출 경향에 중대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목표는 분명하

게 이 수준(더 이상의 감축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치고 말이다)을 유지하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방출은 지수적이 아니라, 산술적으로만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보다 5% 낮은 수준의 방출로도 여전히 대기 중의 온실가스 총량은 분명 실

질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종종 기술적 문제로 치부된다. 특히 이산화탄소 방출과

관련된 지점에서 더욱 그렇다. 장차 에너지 소비나, 연비의 효율성 개선은 매년

부가되는 이산화탄소 방출을 악화시키지 않고서도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다.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 위기에 뒤이은

십 년 동안, 유가 인상에 직면한 전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더 나은 연비를 가

진 소형차의 생산을 비롯한 여타 연료 사용 절감책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전체

에너지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GDP 에너지도)을 낮췄다. (하지만 제본스의 역설에

따르면, 온실가스의 전체적인 충격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게 될 것이었다.) 일단 그

십 년이 지나자, 인하된 유가는 이 비율을 다시 한번 상승시켰다.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구조

여전히 이것을 단순히 기술적 문제나, 연료 효율성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그

릇된 것이다. 급속한 이산화탄소의 대기 방출을 피할 수 있는 기술은 오랫동안 존

재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히 대중 운송에 있어서 오랜 근대적 교통 수단이

었던 운송수단을 이용한다면, 자가용을 기반으로 건설된 교통 체계와 비교해서 이

산화탄소의 방출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며, 자유롭고 빠른 대중 운송이라는 측면에

서도 실제로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자본 축적 경향은 이윤을

뽑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길로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동차에 최대한 의존하

도록 만들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유리, 고무, 철강 산업까지 포함하는 “자동차-

산업화 복합체”의 성장과 석유 산업, (트럭 운수업처럼) 영리를 목적으로 고속도

로를 사용하는 업자들, 고속도로 건설업자들, 그리고 도심-교외의 구조에 긴밀히

연결된 부동산업자들이 추축을 이루고 있으며, 20세기의 축적 구조는 전반적으로

거기에 기대고 있다. (스위지, “자동차와 도시”, {월간평론}, 23권 11호(1972년 4

월)).

슘페터의 경기순환 이론의 많은 영향을 받은 (그 외에도 맑스와 베블렌, 케인

즈, 칼레키 등의 이론적 영향을 받았다) 저술인 {독점자본}에서, 공저자 폴 바란

과 폴 스위지는 역사적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항상 신기원적인 혁신에 의존해왔다

고 주장했다. 그것은 전체 생산 구조와 생산의 지리적 배치를 대규모적으로 변모

시키고, 그 주위로 거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는, 그런 종류의 혁신이다.

바란과 스위지는 자본주의 역사상 세 가지의 신기원적 혁신이 작용했다고 본다.

증기기관과 철로, 그리고 자동차의 등장이었다. 여기서 자동차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두 번에 걸쳐서 신기원적 혁신을 끌어냈다는 사실이다. 자동차화의

두 단계이다. 첫 번째는 1920년대 전반에 걸친 자동차 생산의 확대이다. 여기에는

고속도로의 건설까지 포함된다. 두 번째는 장거리 고속도로 체계의 건설과 경쟁

대중 운송 수단의 파괴, 그리고 2차대전 직후 시작된 교외화의 가속화로 특징지워

지는 대규모 건설 붐이다. 자동차의 지배는 생산과 소비의 모든 체제와 관련되었

으며, 이것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축적을 가속화시키고 현재까지도 그러한

추세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석유에 대한 우리의 의존의 한 중심부에 있으며, 이산화탄소 방출의 가

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자동차-석유 복합체이다. 이라크와의 걸프

전쟁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전쟁의 목적은 “우리 생활 방식”을 방어하

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로

석유였다. 제본스는 석탄을 영국의 전 산업계가 의존하고 있는 “총 지배인”이라

불렀으며, 석탄의 경제적 사용(혹은 그 싼 값)이 산업 번영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석유는 우리 산업계에서 마찬가지의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기 위한 이산화탄소 방출 감축과 관련해서 자본가 계급

은 분열된다. 미국 지배계급의 상당한 분파는 기꺼이 보다 효율적인 기술을 고려

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확대된 공공 교통 체계를 통해서는 아니며, 더 나

은 연비를 갖는 자동차나, 아마도 좀 더 환경친화적인 형태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개발 등을 통해서이다. 생산의 기본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에너지 사

용의 효율성은 (제본스의 역설에 따라) 결국 생산을 자극하고 축적 규모를 확대시

킬 수 있는 것으로서 자본측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

국의 강력한 대부분의 자본 분파는 이마저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연비는 보통 더 작은 엔진과 자동차를 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동차 생산회

사들은 스포츠용 자동차나 미니밴 시장의 성장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윤

의 대부분을 대형 자동차의 생산으로부터 취하고 있다. “작은 차는 적은 이윤을

뜻할 뿐”이라는 헨리 포드 2세의 잘 알려진 경구는 여전히 지배적인 원칙이다. 석

유회사의 경우, 이들의 이윤은 석유 수요를 제고시키는 데서 온다는 것이 명백하

다. 이런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미 상원에서 쿄토 의정서 비준에 찬성표를 던질

의원은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편 자본가들과 그 하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태양열 에너지 대안의 사용을 막

고 있다. 현재 그 일부는 전적으로 실행가능한 것들이다. 기업은 태양열 에너지에

관한 논의를 풀뿌리 운동으로부터 전취하려 하고 있다. 그것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의 최대 이윤을

보장해주지만, 인간과 지구에 가장 이롭지만은 않은 그런 에너지원들이 개발되고

있을 뿐이다. 태양열 에너지는 명백히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다니엘

M. 버만과 존 T. 오코너가 {누가 태양을 소유하는가?}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야기

이다.

물론 이 중 그 어떤 것도 놀라울 게 없다. 루돌프 힐퍼딩과 함께 독점자본주의

이론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기도 한 토스타인 베블렌은, 자본주

의가 좁은 의미에서 일정 정도 실리적인 효율성을 제고시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지니어의 그것 같은 합리적 계획이라는 관점과는 별개의, 엄청난 낭비

의 체제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석유 산업을 필연적으로 “거대기업화와 독점

적 지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떠들썩한 낭비와 오류”로 묘사했다({부재자 소유

권}, 200-201). 베블렌에 있어서, 독점 자본주의(혹은, 그가 이야기한 바처럼 “부

재자 소유권”) 하의 전체 산업 체제는 합리적 생산보다는 금전적 동기만이 판을

치고, 인간과 자연 자원의 무모하고 무용한 소비로 점철될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생산 작업과 판매일 사이의 구분은 점차 흐려진다… 급기야

는, 시장을 위해 생산된 많은 물품들의 판매비용이 주로 판매를 가능케 하는 외관

을 꾸미는 데서 기인한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 될 것이

다”(앞의 책, 300).

판매를 위한 시도는 생산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래서 상품에 대한 사용가치

의 척도는 교환가치의 요구에 의해 꽤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그 기반을 침식당할

뿐만 아니라 변형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갈브레이드적인 “의존 효

과”에 한 발짝 틈입하게 된다. 의존 효과란 우리의 소비가 생산물의 성격에 의존

하고 있다는 것이며,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소비자 주권”에서 가정되는 것처럼 그

역은 아니다(갈브레이드, {풍요로운 사회} 11장). 근대적 시장의 힘과 동반하여,

생산에 대한 지배는 자본에게 생산물과 더불어 “수요”(즉 욕망)를 만들어낼 권력

을 부여한다. 사실, 거대기업에서 “생산품 개발”은 보통 마케팅의 하부 분과로 간

주된다. 미국인들의 자동차 사랑에 대한 언론인들의 지적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

러한 “사랑”은 극도로 좁은 선택에 직면하여 나오는 일종의 자포자기에 다름 아니

다. 자동차와 도로, (종종 그 부재로 인해 주목받는) 대중교통 체계, 도심, 교외,

그리고 쇼핑몰 등이 건설되어 온 방식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선택권이 거의 없이

그저 일하고 생활하기 위해선 운전해야 할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

에서, 소비자들이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동차(혹은 미니밴)는 또한 일종의 감

옥이 된다. 휴대전화나 여타 기기들의 도입으로 (거의 미미하기는 해도) 보다 완

화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는 동안 사회적 비용은 쌓여만 간다. K. 윌리엄 카

프는 {사기업의 사회적 비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지불되지 않은 비용의 경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생산의 실제적 비용의

상당 부분이 기업의 지출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점에서 지불되지 않았

다는 말이다. 그 대신 이 비용은 제3자나 사회 전체가 떠안는 식으로 전가되고 만

다(231).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가능성의 고찰이 현재의 생산 구조 속에서 보다 효율적

인 기술을 개발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로 제한되고, 또한 그 모든 비합리성과 낭

비, 착취와 더불어 우리의 전체 생산 체계가 그 고찰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한,

그러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고찰은 현재의 체제에서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우리의

희망은 체제 자체의 변혁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은 맑스주의적 조절이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체제의 특정한 “조절 양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으로 현재의 축적 체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문제를 규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경제 체제 자체이다. 사회경제 구조의 개발이라는 맥락 속에서

환경과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생산 수단은 가능하다.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생산의 사회적 관계이다.

자본주의 환경 위기의 불가역성

이러한 모순을 더 자세히 조망하려 한다면 이 글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게 될 것

이다. 나는 “자동차와 도시”에서 폴 스위지가 말한 다음과 같은 내용에 동의한다.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현재의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부에 어떤 완화책이 존재

할 가능성은 믿고 있지만, 도시 구조 및 도시와 사회 전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근

본적인 변화가 [혹은 생산과 소비 구조 내부의 커다란 변화라고 해도 마찬가지이

다] 사회 질서의 급진적인 변화 없이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17).

맑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한 성격은 그 첫 시작부터 도시와 국가,

인간과 지구 사이의 원천적인 균열 위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 균열은 이제 그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포스터, “원천적 균열에 대한 맑스의

이론”, {미국 사회학 저널}, 1999년 9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 내의 환경 위기

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와는 별개로, 이 지구와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제본스는 그가 제기한 역설에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영국은 값싼 연료 자원-영

국의 산업화가 의존하고 있던 것은 석탄이었다-을 빨리 소모할 수도 있었으며, 아

니면, 보다 느리게 소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제본스는 그것을 빨리 소모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물질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우리의 부를

창조하는 쪽으로 아낌없이 대담하게 나간다면, 우리가 이제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

는, 어떤 유익한 위력을 갖는 정점은 그리 과도하게 평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러

한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짧지만 진정한 위대함과

보다 길게 지속되는 평범함 사이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석탄 문제},

459-460). 이런 식이라면, 취해야 할 방향은 명백했다. 현재의 영광을 추구하고,

미래 세대에게는 극적으로 악화된 위치를 남겨주는 것이다. 제본스의 역설이 오늘

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한 -다시 말해 (현재의 생산 구조 내에서) 기술 그 자

체가 경제 규모의 확장과 함께 커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환경 딜레마에 그 어떤

해답도 제공해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제본스의 결론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제본

스가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분명 생각도 하지 못했던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사회적 생산 관계를 변혁시키고, 이윤 추구가 아니

라, 인류의 진정한 필요와 사회-생태적인 지속가능성의 요구에 따라 운영되는 사

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 존 벨라미 포스터는 {월간평론}의 편집위원이다. 저서로는 {맑스의 생태학: 유

물론과 자연}, {상처받기 쉬운 행성} 등이 있으며 {이윤을 위한 기아: 농부와 식

량, 환경을 위협하는 농산업}의 공편자이다. 이 책들은 모두 월간평론사에서 출판

되었다

1> 마리오 지암피에트로, 코조 마유미, “발전과 생태적 퇴보, 남-북 무역에 관한 또 다른 시각”, {사회경제평론} 56권 1호(1998년 봄), pp.24-26을 보라.

2> (경제적 낭비와 사회-환경적 비용간의 관계를 포함해) 환경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맑스적 구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저술은 엄청나게 많다. 존 벨라미 포스터와 헨릭 슬라이퍼의 {비틀거리는 경제}(뉴욕: 월간평론사. 1984), pp.297-316, 시게토 츠루의 {환경의 정치경제학}(런던: 애쓸론 출판사, 1999), 폴 버킷의 {맑스와 자연}(뉴욕: 세인트 마틴스 출판사, 1999) 등을 보라.

3> 조절이론가들은 “포드주의”라 지칭하는, 자동차화에 맞물린 “축적 체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역사를 오도하는 것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의 “포드주의의 물신성”({월간평론} 39권 10호(1988년 3월)), pp. 14-33을 보라.

4> “에너지 혁명은 가능하며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그 원 소유자인 민중의 손에 돌려주는, 보다 큰 혁명의 일부로서만 달성될 수 있다.”폴 M. 스위지, “자본주의의 원죄”, {월간평론} 49권 2호(1997년 6월),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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