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플파워와 좌파의 정치적 오류

원 영수 (회원)

필리핀 피플파워의 제2탄

지난 1월 20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를 비롯 전국적으로 거리로 나선 수백만 민중은 마침내 부패한 에스트라다 정권을 퇴진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난 1986년 마르코스 독재를 타도한 피플파워(people power)의 제2탄이었다.

지난해, 마르코스 독재의 종식이후, 정권을 유지해온 필리핀 부르주아 보수정권의 후보를 누르고, 서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에스트라다(Joseph Ejercito Estrada, 일명 Jose Velarde,)는 취임 1년여만에 불명예 퇴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12월 미화 100만달러에 상당한 뇌물스캔들로 상원법정에 섰던 에스트라다에 대해, 1월 15일 친에스트라다파가 우세한 상원이 핵심증거를 배제한 채 탄핵투표를 부결시킴으로써 촉발된 대중적 분노는 4일간의 전국적 항쟁을 통해 에스트라다를 심판하였다.

필리핀의 희비극

사실 에스트라다의 당선은 필리핀 민중에게 있어 하나의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부르주아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기간을 통해 강력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의 전통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노동자-민중운동이 타락하고 부패한 부르주아 정치의 혁명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노동자-민중운동의 주도세력인 CPP-NPA(필리핀 공산당-신인민군)의 시대착오적 마오주의 노선과 그릇된 전술은 대안의 부재 또는 공백을 가져왔으며, 정치와 사회의 주요영역에서 ‘노동자-민중세력의 주변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CPP의 잇단 분열과 왜소화의 과정 끝에 싸구려 3류배우 에스트라다가 최고 권력자가 되는 희극을 낳았던 것이다.

애초부터 취약한 정치적 기반으로 인해, 한편에서 IMF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추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정치의 부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에스트라다의 정치는 결코 민중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필리핀의 희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에스트라다 이후?

작년 10월 에스트라다와 결별한 후 에스트라다 퇴진운동의 거대한 흐름에 편승하여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부통령 글로리아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가 부르주아 선정주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86년 피플파워의 상징이었던 코라손 아키노를 기억하는가? 마르코스 독재를 타도한 민중운동을 등에 업고, 권좌에 올랐지만, 마르코스 일가에 대한 어떤 단죄도, 어떤 뚜렷한 정치적, 경제적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필리핀 반동군부의 실세인 라모스의 후견 아래, 조용히 임기만 마친 채,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86년 피플파워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 누가 코라손 아키노를 기억하는가?

사실 아로요의 경우 코라손 아키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장의 보도에 의하면, 신임 아로요정권에 대한 대중적 기대나 환상은 거의 없는 편이다. 더욱이 정권인수 직후 아로요는 비난의 표적인 구시대 정치인을 내각에 임명하였고, 또 긴축예산을 옹호하는 등 에스트라다 정권과 전혀 다르지 않은 IMF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로요는 역대 부르주아정권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대답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올해의 피플파워 II는 결코 잔혹한 장기독재에 대한 민중의 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필리핀 사회의 총체적 위기국면 속에서 에스트라다의 치부와 부패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대중들의 대대적 가두진출을 가져왔지만, 그 배후에는 에스트라다에게 정권을 빼앗긴 보수세력의 사보타지, 특히 카톨릭의 조직적인 정권반대가 피플파워 II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부르주아 언론은 국내든 국제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지만, 거리로 뛰쳐나온 대중동원이 보여주는 외견상의 유사성 뒤에 숨어있는 문제의 핵심을 보아야 하며, 이후 필리핀 정국은 결코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의 완수도,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도 가져오지 못한 채, 체제위기만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필리핀 좌파의 정치적 오류

필리핀 노동자-민중에게 있어, 무언가 의미있는 대안적 미래는 필리핀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전면적 일소를 통한 민중혁명일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러한 미래의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다. 왜 그런가? 그 이유와 관련해서는 필리핀 좌파운동의 오류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필리핀 좌파세력의 핵심은 1960년대 구공산계를 밀어내고 반제민중투쟁을 주도한 필리핀 공산당(Communist Party of Philippines: CPP) 세력이었다. 이들은 필리핀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와 매판정권에 대한 전인민 장기항쟁노선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비합법전위 CPP의 지도아래, 합법 바얀당과 반합법 NDF(National Democratic Front: 민족민주전선), NPA(New People’s Army: 신인민군)의 무장투쟁을 결합시킨 전략을 추구해 왔다.

마르코스로 상징되는 반동적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맞선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좌파세력은 농촌을 근거지로 도시를 포위하지 못했으며, 부르주아 정치의 결정적 위기시에 도시에서 대안세력으로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특히 반마르코스 투쟁을 주도하면서 획득한 대중적 지도력도, 이후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어떤 정치적 개입마저 합법주의로 치부한 채, 구래의 마오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정치적 오류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주변화’의 길을 자초하였다.

물론, 1980년대 농촌게릴라운동을 청산한 다수의 라틴 아메리카 좌파운동의 경우, 부르주아 정권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후, 신자유주의 정권의 제2중대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이른바 NGO세력의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몇몇 예외(콜롬비아의 게릴라 FSLN과 브라질의 MST)를 제외하면 민중투쟁의 공백을 가져왔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자면, 과도한 합법주의와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에 대한 필리핀 좌파의 비판적 태도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쓰디쓴 것이었다. 대중투쟁의 성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하지 못한 채, 정치적 주도권을 무능력하고 부패한 부르주아 정치권과 군부에게 헌납한 좌파는 1990년 중반 이른바 소환파와 거부파 간의 논쟁을 시발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CCP 중앙에 대한 조직적 반란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남으로써, CPP는 과거 수십년의 투쟁을 통해 구축한 기본적 활동력과 조직적 기반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 마리아 시손(Jose Maria Sison)을 중심으로 한 CCP 주류는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는 논리로 구래의 마오주의 노선과 교조적 분파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그 결과, 이번 에스트라다 반대전선에서 노동자-민중운동 또는 좌파세력은 전혀 주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어떤 면에서는 카톨릭-반동세력의 시나리오에 따른 에스트라다 퇴출작전에 조연배우로 출연한 셈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가능성?

한편 90년대 중반 CPP에서 이탈한 좌파들은 이번 대중투쟁의 과정에 구시대 정치인 반대운동(Anti-Trapo Movement: ATM)을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로요 취임 이후 정세의 역관계를 바꿀 정도로 강력하지 못한 상태이다.

반면, 1986년 맹목적 보이코트 전술로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던 CPP 그룹은 좌파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임에도 다른 좌파와의 연합을 거부한 채, 아로요 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화해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적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리핀 좌파운동이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고 할 수 있다. 피플파워 II의 반쪽 승리에 도취되지 않은 채, 구시대적 교조주의와 분파주의로부터 해방된 좌파의 조직적, 정치적 통합만이 필리핀 노동자-민중투쟁에 진정한 대안과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