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테러리스트: 아리엘 샤론의 범죄
[카운터펀치] 편집부 2/7
일부 골수 낙관주의자들은 리쿠드당(이스라엘 우익 연합정당-옮긴이) 당수인 아
리엘 샤론같은 우익 극단주의자만이 팔레스타인측과의 지속가능한 협상을 어떤 식
으로든 중개할 자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럴 수도 있다. 역사에 그러
한 예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과연 샤론이 그럴 수 있을까?
샤론의 과거사는 195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가 전쟁범죄의 기록을 비롯해, 시종
일관 도덕적 부패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는 1928년 출생했고, 국가건립 전인 젊은
시절 이스라엘의 지하군사조직인 하가나에 들어갔다. 1953년 그는 이른바 유대인
마을을 공격한 아랍에 대한 보복을 주 임무로 하는 101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두 가지의 끔찍한 공격-그 중 하나는 아주 유명한 것이다-으로 보건대, 101부대의
실제 목적은 숙련된 전사뿐만 아니라 어린이, 노인,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이고 살인적인 폭력을 가함으로써 공포를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띤 샤론의 기록상 첫 출격은 1953년 8월 가자지역 남부 엘부라이
그 난민촌이었다. 101부대에 관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50명의 난민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다른 자료에서는 15-20명이라고 주장한다. UN 지휘관 소장
반 베니케는 샤론의 부대원들이 “난민들이 자고 있는 오두막의 창문을 통해 폭탄
을 투척하고 그들이 도망쳐 나오자 소총과 자동권총 등으로 공격했다”고 말했다.
1953년 10월 샤론의 101부대는 요르단의 키비야 마을을 공격했다. 이 마을은 당
시 외무장관 모셰 샤레트가 자신의 일기에 “우리에게 묻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
을 오점”이라고 말한 그곳이다. 그는 틀렸다. 대단히 친(親)이스라엘적인 서방의
논평가들도 이 마을을 리디체(체코의 한 마을로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보복성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옮긴이)에 비유했음에도 키비야와 샤론의 역할은 서방에 거
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샤론의 대중 기만에 관해 쓰면서 그를 “성마르다”고 묘
사한 [뉴욕 타임즈]의 데보라 손탁이나, 샤론의 운명적인 예루살렘 성지순례 이후
그를 “풍채당당한 노전사”로 언급하기 좋아하는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은 말할 것
도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비 슬라임은 이 대량학살을 이렇게 서술한다. “샤론이 받
은 명령은 키비야에 침투해서 집들을 날려버리고 주민들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
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의 성공은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
다. 키비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그 소름끼치는 이야기의 실체는 공
격이 있은 다음 날 드러났다.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45채의 집이 사라졌고, 69명
의 주민들이 죽었다. 그 중 3분의 2는 어린이와 여성이었다. 샤론과 그의 부대원
들은 모든 주민들이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집안에 누군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현장에 있던 UN 참관인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지만, 총알이 문짝을 두동강내고 문지방 위로 시체들이 널부러졌습니다. 이를
보건대, 주민들은 엄청난 불길 때문에 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집안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키비야 대학살은 대미(對美) 요르단 특명전권공사(EE&MP)가 1953년
10월 16일자로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서한(S/3113)에 기술되어 있다. 그의
기술에 따르면, 1953년 10월 14일 밤 9시 30분, 이스라엘 군대가 요르단 하솀 왕
국의 키비야 마을에 대대 규모의 공격을 감행했다(요르단강 서안지구는 그때 요르
단에 병합되었다).
이 외교관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대는 마을에 들어가 자동소총과 수류탄,
소이탄 등을 사용해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였다. 10월 14일 42구의 아랍주민
의 시체는 찾았으나, 더 많은 시체가 여전히 폐허 속에 묻혀 있었다. 40여채의 주
택과 마을 학교, 저수지가 파괴되었다. 헤브루어로 된 이스라엘 군대 표시가 있는
다량의 사용되지 않은 폭발물들이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오전 3시경, 퇴각을 엄호
하기 위해 지원부대가 이스라엘 진지에서 이웃 마을인 부드루스와 슈크바를 포격
하였다.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 방위군 남부 사령관었을 당시, 샤론의 행동은 어떠한
가? 가자지구 “정리”에 대해서는 올해 1월 21일자 [런던 인디펜던트]에 필 리브스
가 쓴 글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가오는 이스라엘 선거에서 이기려 애를 쓰는 아리엘 샤론이 방위군 남부 사
령관으로, 1967년 전쟁 이후 완강하게 저항하는 가자지구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
은 지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 특히 폐허 거리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1970년대말 전에는 폐허 거리(Had’d Street)는
거리가 아니라 가자시 해안 난민촌(Beach Camp)에 난 이름없는 좁은 골목들이었
다. 빈민가는 1948년 전쟁부터 지금까지 국제사회가 그들의 미래를 안정시켜 주길
기다리고 있는 난민들을 위해 유엔 원조로 지은 방 두 칸짜리 나지막한 집들이 어
지럽게 흩어져있는 곳이다. 거리는 샤론의 군대가 여러 차례 다녀가면서 그 이름
을 얻게 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수백 채의 집을 밀어내고 곧바로 뻗은 널찍한 도
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군대와 중무장 차량들이 난민촌을 통과
하기 쉽게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군을 추적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밤에 와서 부숴버릴 집들에 붉은 페인트로 표시를 하기 시작했습니
다.’ 지금은 퇴직한 70세의 인부 이브라힘 가님은 말했다. ‘아침에 돌아와서는 모
두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얄라 얄라 얄라 얄라라고
소리쳤던 게 기억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소지품을 거리로 내던졌습니다. 샤론은
불도저를 가져와 거리를 평평하게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만에 거의 다 했어
요. 군인들이 사람들을 구타하곤 했죠. 상상할 수 있겠어요? 총을 든 군인이 어린
아이들을 때리다니!’ 이스라엘 군대의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폐허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난민촌에 걸쳐서 수백 가구가 파괴되었다. 샤론이 격자형으로 번듯한
보안 도로를 만들어낸 결과였다. 많은 난민들은 학교에 피난처를 마련하거나 이미
포화상태인 친척집으로 흘러들어 갔다. 팔레스타인 정치 활동가를 식구로 둔 집안
은 트럭에 짐짝처럼 구겨넣어진 채 시나이 사막 중심부에 있는 마을로 추방되어
이스라엘의 감시를 받았다.”
리브스가 보도했듯이, 해안 난민촌의 참상은 결코 유별난 사례가 아니다. “1971
년 8월에만 샤론 사령관 휘하의 군대는 가자지구에서 이천여 가구를 파괴했고 그
결과 만 육천 명의 사람을 자신의 삶의 기반으로부터 두 번째로 몰아냈다.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체포되어 요르단이나 레바논으로 추방당했다. 게릴라
용의자 친척 6백여 명이 시나이로 추방당했다. 1971년 하반기에 총 104명의 게릴
라가 암살되었다. ‘당시 정책은 용의자를 체포하는 게 아니라 암살하는 것이었습
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인권센터 사무처장 라지 수라니의 말이다.
1973년 전쟁에서 이집트에 당한 첫 패배를 야기한 이스라엘의 자만은 부분적으
로 수에즈 운하 동안(東岸)에 샤론이 구축한 이른바 난공불락의 “바르 레브 전선”
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집트는 엄청난 어려움을 격지 않고는 이 전선을 넘을 수
없었다.
1981년 당시 국방장관 샤론은 이스라엘의 우방인 자이레의 모부투 대통령을 방
문했다. 모부투의 요트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스라엘 일행은 그들의 훌륭한 직
책을 활용해서 미국의회가 원조에 인색하지 않게끔 만들어달라고 요청받았다. 이
스라엘측은 용케 이러한 요청을 성공시켰고 모부투는 그 보상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하였다. 샤론이 아프리카와 접촉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남아공 군대를 참관, 조언하고 CIA의 앞잡이인 살인자 요나스 사빔비(앙골라
의 우니타(Unita) 반군 지도자로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선거 결과에 불복,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인 쿠닝가 계곡을 점령한 채 정부군과 대치 중이다-옮긴이)
를 지원하는 전투를 벌이기 위해 앙골라를 여행했던 정겨운 기억에 관해 친구들에
게 말하곤 한다.
메나헴 베긴의 두 번째 정부 국방장관으로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파괴하고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요르단으로 몰아내며 레바논을 위성국
으로 삼겠다는 명확한 목표로 진행된 1982년의 전면적인 레바논 침공을 진두지휘
한 사령관이었다. 그것은 약 2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의 목숨을 앗아가
고 천 명 이상의 이스라엘 군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막대한 고통을 야기한 전쟁
계획이었다. 이스라엘 군은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였다. 샤론은 또한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서 악명높은 대량학살을 감독했다. 레바논 정부는 762구
의 시체를 발굴했고 1200구는 사적으로 친척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그러나 중동은
메나헴 베긴 덕분에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82년 전쟁
이 진행되는 동안 샤론은 당시 총리였던 베긴에게 접근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발
사 권한을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제안했다. 베긴은 그것을 거절할 만큼의 이성은
있었다.
인접한 두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에 1982년 9월 16일 밤 6시부터 1982년 9월
18일 아침 8시까지 이스라엘 방위군 관리하에 있는 지역에서 공습이 진행되었다.
범인들은 1975년 레바논 내전 개시 이래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스
라엘에 의해 무장된 레바논 군대인 팔랑헤 민병대였다. 이 62시간의 광란의 희생
자에는 유아, 어린이, 여성(임신한 여성포함), 노인들도 있었으며 이 중 일부는
죽음을 당하기 전이나 후에 난자당하거나 내장이 도려졌다.
-이스라엘의 대법관 이차크 카한이 주관한- 이스라엘 조사위원회는 이 학살사건
을 조사하고 1983년 2월 조사결과를 공개발표했다(참고자료 B는 지금까지도 기밀
사항이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한 이스라엘 군 관계자들의 필
사적인 시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카한위원회는 이스라엘 인사들 가운데서도 아리
엘 샤론이 대량학살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의 보고서
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난민촌 주민들에 대한 레바논 팔렝헤 당원들의
보복과 유혈참사 행위의 위험을 간과하고(‘완전히 인식하고’가 더 적절한 어휘일
것이다), 팔렝헤 당원들이 난민촌으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당시 이 위험을 계산에
넣지 못한(아니, “이것을 고려한”) 국방장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
이다. 게다가 팔랑헤 당원들이 난민촌으로 들어가는 전제조건으로 학살의 위험을
막거나 줄이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국방장관에게
있다. 이러한 실책은 국방장관이 마땅히 이행해야할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갈릴
리 평화작전과 대량학살, 카한위원회의 은폐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노엄 촘스키의 글, “운명의 삼각지대(The Fateful Triangle)”를 추
천한다.)
샤론은 사임을 거절했다. 결국 1983년 2월 14일에 그는 무임소(無任所)장관으로
내각의 자리는 유지했지만 국방장관의 직무는 박탈당했다.
출세가도는 하강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리쿠드당의 극단론자로 자신의 위치를
갈고 닦기를 계속했다. 샤론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완전히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것
이 아니면, 늘 어떤 형태의 평화적 협상에도 반대했다. 네헤미아 스트라슬러가 올
해 1월18일자 [하아레츠]에 개괄한 것처럼, 1979년 그는 베긴 내각의 구성원으로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반대하는 데 투표했다. 1985년 그는 남부 레바논의 이른바
안전지대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퇴각시키는 데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1991년에는
이스라엘이 마드리드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데 반대했다. 1993년 그는 국회에서 오
슬로 협정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다음 해에는 요르단과의 평화조약에 관한 국
회 표결에서 기권했다. 그는 1997년 헤브론 협약에 반대표를 던졌고, 남부 레바논
으로부터 퇴각을 실행하는 방식에 대해 반대했다.
1970년대 후반 베긴 내각의 농업장관을 지낼 당시 그는 현재 평화협상의 주요
장애물인 많은 서안지구 정착촌을 세웠다. 그의 현재 입장은 어떠한가? 서안에는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단 한평의 땅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서안의
42%에 불과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팔레스타인측이 관리하는 현재 지역만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쪽에 동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서안을 지나는 고속
도로와 수원(水源)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모든 정착촌은 이스라엘
군이 접근권을 지닌 채로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주권 하에
남아있을 것이고, 그는 예루살렘시 주변에 계속 건물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 통치 하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모호한 실수나 언어적 수사 없이도 샤론이 모든 역대 이스라엘 정부의 장기적
정책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벤 구리온(근대 시온주의의 창시자
로 이스라엘 초대 총리)은 101부대의 테러 임무를 승인하였다. 모든 이스라엘 정
부들은 정착촌과 예루살렘 주변의 건축을 묵인하였다. 두 번째 팔레스타인 민중봉
기(인티파다)를 촉발시킨 도발적인 출격에 대한 군사 지휘를 샤론에게 허락한 것
은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였으며, 최근 몇 달 동안 죽음을 부른 군사적 탄
압을 감독한 것도 바라크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지난 반세기의 샤론의 사악
한 발자취를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그 발자취는 죽은 자와 불구가 된 자, 강제로
쫒겨난 이들에 대해 슬픔을 품고 있는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들에 의해서, 또는
최근 샤론이 베에르셰바 근교의 농업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샤론에게 반기를 든
16살짜리 이스라엘 소녀 일릴 코메이에 의해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저는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레바논에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엘 샤론, 16년간 내게 고통을
준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16년의 고난을 야기한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많은 일들로 당신을 고발
합니다. 당신이 총리로 당선될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일릴은 말했다.
일릴은 틀렸다. 그는 총리가 되었다. 이제 유혈참사가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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