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 다니엘 싱어 지음, 윤길순 옮김, 살림
“현실적이 되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엄혜진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유토피아 사회에 대한 잔상마저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빌어먹어야 할 현실이지만 대
안이 있다고 설득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할 테니 조금만 더
착취당해 달라는 자본의 신물나는 거짓말에 분노하지 않아서는 아니지만, 기대어 계
속할 저항의 신명나는 미래란 것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자본에 의해 한껏 밀려난
지구의 주변부마다 단내 나도록 외쳐대는 저마다 끊이지 않는 투쟁이 어찌 즐겁지 않
겠는가 마는, 함께 연대하여 더욱 상승될 내일이라는 것 또한 막막하여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렇다고 맥없이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겨우 방어전만 치르고 있노라고
쓸쓸히 독백하곤 한다.
사회주의의 영광과 몰락의 역사를 거쳐 이제는 숨가쁘게 독주하는 자본의 탐욕스러운
세월의 한가운데서 눈을 감은 다니엘 싱어는 짐짓 가벼이, 그렇지만 고집스럽게 현실
유효한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다시 호명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유쾌한 레퀴엠을
울리면서 풀죽지 말라는 유서를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는 의미상은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구의 밀레니엄인가: 그들의 것인
가, 우리의 것인가}라는 원제 속에서 한 노장 사회주의자의 절절한 외침을 더욱 부각
시킨다. 볼셰비키 혁명의 비극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시대 맑스주의의 유산을 훑어
내리기 위해,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단어의 개념들을 챙기느라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재치 넘치는 저널리스트의 풍자적 화법이 유난히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책읽기 작업에 활력이 되었다.
강요된 단 하나의 선택, 그리고 우리의 미래
시애틀, 워싱턴, 프라하 등 반세계화 투쟁의 시위 현장에서 등장해 유행처럼 번진 슬
로건인 “대안은 있다(There are alternatives)”라는 말이 썩 내키지 않았던 데에는
NGO 특유의 개입의 정치가 탐탁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대안’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질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진보운동의 수세적 상황에 대한 씁쓸함도 한 몫을 했을 것이
다. 체제유지를 위한 구시대적 악법이 잔존하는 탓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조차 떳떳
이 입밖에 내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 속에서야 그 실감이 덜할 수 있겠지만 무릇 이
시대의 ‘사회주의자’는 더 이상 체제의 존속을 위협하는, 극도의 위험분자들조차 될
수 없다.
물질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배고팠던 사회주의가 사망을 선고받은 지 10년을
넘어선 지금, 노동착취에 시달리며 비정규직화 되어가고 있는 노동자들과, 정리해고
로 밥줄 끊긴 실업자들과, 성적 착취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여성들과, 초국적 곡물회
사들의 횡포로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농민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것은 주변인들의
속절없는 궁시렁으로 치부된다. 스탈린 시대의 굴락과 길게 늘어선 빵 배급줄을 상기
하라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근엄한 다그침이 들린다. 세계화는 정보혁명과 과
학기술의 발전으로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강요된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225명의 재산을 합친 것이 지구 인구의 반에 가까운 25억의 가난한 사람들이 1
년 동안 버는 수입과 맞먹는다는 기막힌 사실도 모든 인류의 부의 확대로 해석하란
다. 민중 대신 한줌의 엘리트가 당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대신 국가 일당
독재가 생산과 분배를 쥐락펴락하면서 혁명을 유산(流産)시킨 스탈린주의 유산(遺産)
의 가장 침통한 대가는, 본성은 그대로인 채 작동방식만을 교묘히 바꿔가면서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저 구역질나는 으스댐이 아닐까? 국경을 넘어 영토 확장
과 이윤 독식을 꾀하는 것이야 그제나 어제나 변치 않는 자본의 본성 같은 것일진대
‘세계화’라는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양극체제의 경쟁 속에서 마치 승자로 살아남은
양 신자유주의의 경전을 들이미는 자본의 저 꼬락서니를 보라. 확산되지 못한 볼셰비
키 혁명의 비극적인 결과가 이런 것이라고 저자는 울분을 토한다. 구공산당을 포함한
지배 엘리트들이 한 목소리로 자본주의로의 길을 외치고 있는 지금, 그들이 거부한
과거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난 현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러시아
와 동구의 현실을 보라며 슬퍼한다.
임지현의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만큼의 우울한 리얼리티는 많이 탈락되어 있지만,
자주관리 이념으로 80년대 한 때를 떠들썩하게 흥분시켰던 “연대노조”의 음침한 타락
과 (다름 아닌 폴란드에서) 반유대주의에 기댄 민족주의가 풍미하고 있는 상황은 그
다인스크 레닌 조선소의 바웬사가 변절한 곡절을 살피는 것보다 더 우울하다. 사실
소련 및 동구권 몰락과 현실 사회주의의 비극적 파국의 결과에 있어 그의 분석이 새
로울 것도, 특별히 새로워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만 새로운 운동의 부활의 가능성
을 타진하고자 그는 지난한 역사를 곱씹는다. 저자의 모국이기도 한 폴란드는 가까운
장래에 동구에서의 운동의 부활을 기대하지 말라는 근거로 등장했지만 일찍이 자본과
의 대결, 아니 최소한의 샅바 싸움마저도 포기해버린 사민주의자들이 판치는 서유럽
은 어떠한가. 언제였던가 복지국가의 모델을 통해 스탈린 체제의 대안을 절치부심 모
색하였다는 그 사민주의의 라벨마저 수거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는 주목하고 기대
할 수 있는 정치세력과 저항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분통 같은 것일지 모른
다.
혁명의 발산지로서는 부적절했던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부재는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안타깝도록 로자를 불러 세우게 하는 동시에 서방으로
부터 희망의 빛을 발견코자 하는 간절함을 잇게 한다. 1995년 겨울의 프랑스는 대량
실업의 증가를 낳고 있는 유럽식 해결 방법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급증하는 미국식
해결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의 강요에 대한 제법 시원
한 반격으로 환영받았다. 철도에서 시작되어 지하철과 버스가 멈추고, 마침내 교사와
대학생들까지 동참하게 되었던 68년 이후 프랑스 최대의 파업 물결에 대해, 제도언론
은 기껏해야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아무런 불평 없이 유유히 출근하는 파리 시민들의
침착한 시민정신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정신을 돋보이게 했던 이 투
쟁의 진정한 함의는 유럽 내 세계화주의의 물꼬였던 마아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한 봉
기이자, 만사형통책인 시장지상주의에 대한 강한 태클이었다는 데 있다. 방향 못 잡
고 허우적대던 노동총동맹(CGT)이나 민주노동동맹(CFDT) 같은 관료적 노동조합운동이
이 운동으로 인해 어떠한 혁신의 자극을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래로부터의 움
직임이었다는 데서 저자는 더욱 많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별적인
저항들이 어떻게 좀더 넓은 전장에서 서로 교통하고 잠재적인 전체를 이룰 것인가가
과제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찬란한 태양의 아름다움이란, 한 곳에서 비추어 내린다
는 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빛줄기를 모아내는 프리즘의 초점과 같은 것이기 때
문이다.
이 책의 절반이 할애되고 있는 “대안을 찾아서”라는 부제의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
용문은 “현실적이 되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는, 아마도 낙서였을 프랑스 68혁
명의 경구다. 실업, 노동착취, 복지삭감, 빈부격차 등 부작용이라 치기에는 절대적
위험수위 놓인 이것들은 역전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정신적
굴락에 빠지지 않을 현실적 유토피아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일일이
지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국제주의와 평등사회의 상에서라기보다는 관료적 노동자주
의로 무장된 인스턴트 혁명을 전투성으로 오해하거나 이제는 국제적 투쟁밖에 없다는
극단주의의 흐름에 대한 경계와 진지한 해법 찾기에서 차라리 희망을 발견한다. 현실
운동 내부의 모순에 대한 쉼 없이 격렬한 반추만이 우리 앞에 놓인 길 위의 빛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한 귀퉁이만이 흔들렸을 뿐인 남성우월주의가 강
화되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고인의 여성주의적 가치에 대한 관심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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