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없이 무너진 인민의 낙원
[가디언] 5/3 존 기팅스
호텔 고층에서 보는 이 도시는 아파트 단지 사이로 일련의 검은 조각들이
펼쳐져 있다. 가로등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십여 개 식당의 네온사인 간판들
이 장왕로를 따라 켜져 있으나, 문은 닫혀있고, 빈 식탁위로 작은 불빛이 파
리하게 깜빡인다.
말 그대로 인민의 낙원은 사라졌다.
위대한 장군 김정일은 지난 밤 ‘개방적이고 쾌활한 분위기’였다고 보도되
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역사적인 방문을 위한 크리스 패턴, 자비어 솔라나
그리고 스웨덴 수상 괴란 페르손과 동행한 많은 기자들에 대해서는 꽤나 신
경을 쓰는 듯 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함께 모여,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새날이 밝자 이제 경제위기 5년째를 맞는 북한을 읽기란 그 외교정책을 이
해하기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역 바깥에서 기차(전력 중단으로 때때로 몇 시간씩 늦어지기도 한다)를 기
다리던 관광객들은 즐겁게 점심 식사를 했다.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여분의
젓가락을 주면서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다.
지방에서 도시의 혁명기념관을 보기 위해 올라온 학생들은 막대사탕을 사
려고 멈춰 섰다. 길가의 공중전화를 기다리는 행렬과, 이전보다 더 많은 자
전거들이 있었다. 늙은 여성들이 간소한 아파트 단지 밖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은 굴렁쇠와 막대를 가지고 놀았다.
이전에 지독히 깨끗하던 도시에, 이제 개와 고양이가 애완동물로 허용되었
고 역 맞은 편 1층에 사는 어떤 사람은 베란다를 비둘기집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상점들은 내가 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 다름없이 생기없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25년 전에 처음 평양을 방문했고, 1980년대에 두번 더 방
문했었다.
“사람들은 상품을 그렇게 많이 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북한 기자인 신
송철이 말했다. “우리 정부는 공공분배체계를 통해 생필품들을 공급합니다.
과거와 비해서 그 양이 줄었지만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동등하게 만
듭니다.”
이는 여전히 어느 장소에서건 무엇인가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
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백화점 전체에 손님이 없었다. 한 작은
상점 역시 텅 비어 있었으며 비닐로 된 학생가방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또 다른 상점은 수백 개의 똑같은 음료수 병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고가 상품들은 다만 전시용처럼 보였다.
마침내 나는 다른 상점과는 달리 북적거리는 상점을 발견했다. 기다란 카
운터 뒤로 8명의 시계수리공이 손님들이 기다리는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일
을 하고 있었다. 끝에는 다섯 대의 미싱이 옷을 수선하며 돌아가고 있었다.
일하던 사람이 만족스런 얼굴로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북한 사람들은 새
로운 것을 사기보다는 고쳐 쓰도록 배웠나보다.
북한 사람들은 또한 심각한 전력난을 겪게 되었다. 일인당 국내총생산
(GDP)이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이전보다 서너 배 줄었다는 북한공무원들의
얘기를 들으면 수도 평양의 눈에 띄는 경기침체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북한측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1996년 이래로 반복적으로 일어난 홍수,
구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중단-특히 값싼 석유- 그리고 눈에 띄는 서방의 경제
압력이 그것이다.
유엔 전문가들도 이 점을 알고 있으나, (개인적 얘기를 나누면) 이미 그
이전에 체제가 실패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번 방문 때, 노동자들은 진열용 공장 밖의 기계들이 놀고 있는 작업장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선전 포스터에서처럼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 야채 밀거래상들을 제외하고는, 식량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향한 첫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아동 영양학자는 1990년대 말 유니세프보다 훨씬 이전에, 어린이들 사이
에서 발육부진의 초기 징후를 발견했다.
무엇이 바뀌었든간에, 위대한 장군은 그의 아버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
전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젊은 통역자는 흥분
하여 말하였다. “다른 어떤 세계 지도자가 자신의 생일에 현장지도를 하겠습
니까?” 좋든 나쁘든 (남한 사람들이 작년 남북 정상회담 때 발견한 것처럼)
그의 개인적인 실천을 보여주기에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어 보인다.
평양에는 출퇴근 시간에는 꽉 차는 새로운 전차노선이 생겼고, 몇대의 2층
버스가 있다. “위대한 장군님은 인민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버스들을 구입하셨
습니다”라며 통역자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
지난달 있었던 전형적인 현장 방문에서 위대한 장군은 ‘농장건설방법과 염
소사육을 배우기 위해’ 군부대가 세운 새 염소농장을 시찰했다.
김정일의 권력창출은 인간은 자기 환경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김일성의
주체 사상에 상당부분 기대서 이루어졌다. 김일성 대학의 한 졸업생은 어젯
밤 김정일이 ‘철학의 천재’라고 말했다.
1976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 주체사상은 널리 퍼져있는 듯 보였다. 갑
자기 폐렴에 걸려 지도자 주치의의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침상에서 내가 개
인적으로 ‘사상 지도자’라고 이름 붙인 김일성주의 교수에게 강의를 받았다.
십 년 뒤, 그러한 숭배는 더욱 틀에 박혀 있었다. 김정일은 안락한 생활에
더 관심이 있는 탈혁명지도부의 새로운 엘리트로 성장하였다.
비행기가 외국에서 상품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였고, 장왕로의 식당들은 문을 열
었다.
비록 어제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믿
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면 이는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평양에는 엄청난 시간왜곡이 존재한다. 공항에서 시가지로 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비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거대한 기념물들의 증가였다. 고(故)
김일성의 궁은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전차 노선들-어제
승객이 하나도 없었던-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개선문-파리의 것보다 약간
더 큰-은 ‘위대한 수령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원탑과 잘 어울린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 체제가 내부로부터 바뀔까는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문제
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북한
의 일상이나 인민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는 똑같습니다”라고 한 유럽연합 관리
가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976년 국어 교과서에는 방문객에게 “미 제국주의를 타도
하자”라고 외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이 지금 보기엔 구닥다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부시가 북한에 대해 잠재적 적으로 재규정한 것은
상호 적대감을 강화시킬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미국인들에게 원조를 걷어치우고 네 나라로 가라고 말할 것
입니다”라며 흥분한 북한 청년이 어젯밤 말했다. “이것은 마치 탁구경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공을 받아쳐야 합니다.”
장기적으로 남한 대통령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지난 3년간 주장해온 것처럼
변화의 문제는 풀릴 것임에 틀림없다.
유럽연합 대표단이 도착하기 직전에 위대한 장군은 ‘청년 영웅’들이 새로운 고
속도로를 건설하는 내용의 연극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젊은 청년들이 ‘국가가
사면초가인 상황에서도’ 어떻게 맨손으로 기적을 창조해 내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속도로는 지난 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비어 있다. 북한의 미래와 아마도
위대한 장군의 미래 역시 북한의 청년이 자신의 기적에 대한 신념을 지속시
키는가에 달려 있다.
<사족>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둘로 나눠졌다.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북한 군대는 1950년 남한을 침략했다.
-미국과 영국군대가 참전한 한국전쟁에서 2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수도인 평양은 가장 중앙집권적으로 계획되고 고립된 경제의 심장부이다.
-국영기업이 거의 모든 공산품을 생산한다.
-백만의 사병을 보유한 북한 군대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규모가 크다.
-김정일은 금도금 기관총과 쌍안경을 하사하며 군부대를 방문한다고 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