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밀림들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사파티스파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한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공산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아니다.”

맞다. 안토니오 아저씨와 다정스레 인디오의 옛 전설을 읊조리는 마르코스(『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다빈치)는 게바라와 같이 공산혁명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체 게바라가 남긴 일기와 마르코스가 쓴 우화집의 거리만큼이나 그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낯익은 묶음으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게바라의 베레모는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패션을 위해 소비되며, 마르코스의 가면은 분노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비화를 위해 소비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자면, 헌정사상 최초의 문화 정당으로 기록될 만한 ‘티셔츠 행동당’에서 게바라 티셔츠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것은 바람직한 ‘찬물’로 보인다. 자신들의 티셔츠는 의식적인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패션화하고 있는 게바라의 티셔츠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라는 냉엄한 현실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그 찬물은 뜨거운 날씨 때문이라고 할만큼 쉽게 미지근해져버렸다.

게바라와 마르코스가 한 묶음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자면, 이 둘을 엮고 있는 흥미로운 상업적 맥락이 보인다. 공통적으로 ‘위장된 정체성’이라는 심리적 배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가볍게 따라하는 수준을 벗어나는 이러한 욕망은 쳇바퀴와 같이 굴러가는 자신의 일상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정작 일상에서는 한 발도 빼지 못하는 소시민적인 병약함이 어우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게바라와 마르코스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는 자신이 벗어버리고 싶은 얼굴을 대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관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을 위장하고픈 바람에서, 순전히 정치적으로 선택된 전략일 따름이다. 최근 게바라와 마르코스의 얼굴들처럼 ‘기호의 정치경제학’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특히 게바라와 마르코스를 소비하는 이들 중 남성에게는 묘한 공감대가 있는 듯 보인다. 때때로 게바라가 헤매였던 남미의 밀림과 마르코스가 멕시코를 횡단하며 멕시코시티를 향해 걸었던 3,500Km의 거리가 고작해야 군대에서의 행군에 비교되어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가 그렇다. 게바라와 마르코스의 대장정이 대원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로 한발 한발을 내딛었음에 반해, 우리의 남성들은 군대에서의 행군을 통해서 강제된 훈련에 대한 분노 대신 알량한 만족감에 배불러 했을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게바라 붐을 가장 잘 이용한 매체가 조선일보였다는 사실과 올해 3월에 10여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멕시코시티에 입성한 마르코스의 대장정에 가장 큰 지면을 할애한 신문이 중앙일보였다는 점을 환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로써 게바라와 마르코스에 대해 우리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관중의 심리’를 터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바라와 마르코스는 남미의 밀림을 헤쳐온 그 게바라와 마르코스가 아니다. 불룩 나온 배를 가리고 있는 게바라와 마르코스의 얼굴은 우리의 지방기를 전혀 빼줄 수 없다. 다만, 그들이 가졌던 분노만이 우리의 일상에서 찌들은 지방기를 연소시킬 것이다. 게바라가 CIA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 당한 그 밀림과, 치아빠스 원주민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마르코스의 그 밀림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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