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나이지리아 인권시계
환경권리행동(Environmental Rights Action ) 7/3
이것은 최근 라고스에서, 구속 사유나 재판없이 한달 하고도 이틀 동안 두 개
의 경찰서 감방에 구금되었던 이삭 우수오카(Issac Osuoka) 경험에 관한 보고서
이다.
나를 체포한 수사관들과 민간인 협조자들은 6월 26일 금요일 밤에 나를 석방
하기로 결정했다. 부당하게 32일동안 감금된 이후 나는 실제로 교통비도 없이
라고스의 거리로 내던져졌다. 이것은 나의 세명의 동지 아데왈레 발레군
(Adewale Balogun), 달란디 압둘살람(Dalandi Abdulsalm), 그리고 무리탈라 라
흐만(Muritala Rahman)도 같은 처벌로 고통당했다.
우리 네명, 즉 아데왈레, 달란디, 14살의 무리탈라, 그리고 나는 금요일 이른
시간에 그 유명한 라고스주 경찰본부의 F구역 구치소 밖으로 내쫓겼다. 거기에
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려하는 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방으
로 떠밀려 버려졌다. 몇시간 후 날이 이미 어두워졌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와 우
리가 각자의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세명의 동지들은 내가 5월 29
일, 나의 변호사인 바리델리 아투루(Bamidele Aturu)와 함께 그곳으로 간지 몇
칠 후, F구역으로 보내졌다.
6월 8일에 석방된 아투루는 그의 직업적 의무를 행했다-나를 보석시키려는 시
도-는 이유로 감금되었다. 아데왈레, 달란디, 그리고 무리탈라는 나이지리아 군
사독재정권을 비난하는 리플렛과 포스터를 소지하고, 나이지리아 민중들에게 자
신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나라를 신식민지, 반동적 신봉건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
라고 주장한 이유로 긴급체포되었다. 포스터와 리플렛은 야당 동맹인 민주를 위
한 행동연합(United Action For Democracy)이 만든 것이다.
나는 택시를 수색하고, 환경권리행동(Environmental Rights Action)의 델타정
보서비스 계획으로 출판된 월간 잡지 ‘니제르삼각주경보(Niger Delta Alert)’의
복사본을 발견한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네덜란드 친구이자 동료인 아트 반 덴
훅(유럽석유감독 Oil Watch Europe 간사)과 함께 1998년 5월 26일 밤에 라고스
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잡지는 석유가 풍부한 나이지리아에서 다국적 석유회사,
특히 쉘(Shell)과 군대에 의해 날마다 저질러지고 있는 환경 오염과 인권침해를
폭로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포스터는 또한 나이지리아 민중들에게 이제는
고인이 된 과대망상 독재자 사니 아바차 장군을 오는 10월, 민간대통령으로 변
모시키려는 필사적 시도에 저항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그 포스터는 야당인
‘민주대안'(Democratic Alternative : DA)이 만들었으며 나는 거기에 소속되어
있다. 아트와 나는 즉각 체포되었고 라고스 오주엘레그바 근처 바랙스 버스정류
장 가까이에 있는 수룰레레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정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어야한다는 경찰과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야한다고 주장한 군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군인들은 나이지리아
민중들의 억압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군인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의 지원자들
(역주-경찰)은 실패했고 우리는 구금되었다.
아트는 다음날 석방되었고 그는 즉각 지속가능한 삼림관리와 관계된 대륙회의
에 참석하고 있었던 나의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나는 같은 회의에 참석
하기 위해 니제르삼각주에 있는 나의 근거지를 떠나 라고스에 왔었다. 내가 구
금된 지 4일 후, 나의 사건을 맡기위해 환경권리행동과 접촉한 변호사 친구 또
한 수를레레 경찰서의 관할 경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관할서는 아투루가 내가
소지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관할서는 우리를 결
박해, 라고스주의 경찰청장에게 데려갔다. 우리가 경찰청장 앞에 서자 그는 관
할서에 나를 체포한 군인들이 왜 나를 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보면서 그는 말했다. “그들은 너에게 총을 쐈어야만 했다.” 그의
명령으로 우리는 죽음의 F구역 구치소로 이송되었고 거기에서 우리는 평균 40명
의 죄수를 가두는 혼잡한 감방에 가둬졌다. 어떠한 형식적 구속사유의 제시나
재판도 없이 우리는 화장실로 이용되기도 하는 구석진 “독일 감옥”에 구금되었
다. 입소자들은 오래된 신문으로 똥을 닦아 구석에 있는 용기통에 버렸다. 우리
는 거의 언제나 눅눅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을 잤다. 우리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돌아가며 잠을 잤다. 위생설비도 없이 모기는 우리를 마음껏 즐겼고, 말라
리아는 흔한 병이었다. 그러나 의약품이나 의학치료도 없었다. 그들이 음식이라
부르는 혼합물이 구금자들에게 일주에 한번씩 제공되었다. 나머지 날에는 스스
로 알아서해야했다.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주머니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일부는 죽었다.
모든 입소자들이 기아나 말라리아로 죽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진
실을 말하도록 강요받으며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재판도 없이 강
도혐의자를 경찰이 총살하기도 했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경비병이 그들을 불러
냈다. 그리고 총소리만이 구금자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또 다른 생명이 사라졌
다. 고문실 아래에 있던 우리방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규로 잠
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 절규가 감방동료의 것임을 깨달았던 사람들은 잠을 이
루기 어려웠울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차례가 바로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거기서 나왔고 F구역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을 말할
수는 없다. 환경 정의와 민주적 나이지리아에 대한 나의 관심으로 인해 구속된
지 32일이 지난 후 나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다. 아바차는 죽었고 또 다른 군
인이 그 자리에 앉아 정치법을 석방하고 민족 화해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환호하기에는 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
국 민주주의를 위한 실질적 진전은 민중들 자신의 투쟁에 의해 보장될 뿐, 아부
바카(Abubakar) 장군과 함께 나라의 미래를 논의하고 있는-우리 나라를 파멸시
킨 같은 인자들- 전설의 우두머리나 정치 모략가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끝으로 나는 나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나이지리아와 해외 환경, 인권공동체
와 활동가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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