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 유리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시집 한권을 뽑아들 만한 계절이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다. 취업기상도는 ‘매우 흐림’이다. 취업 재수생과 예비 실업자의 가슴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캠퍼스를 뒤덮고 있다.

“캠퍼스가 아니라 전쟁터 같아요.”

지난 가을 지방의 ㅅ대를 졸업한 강아무개(25)씨는 그 ‘전쟁터’에서 끝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지난 1학기에 한 인터넷 쇼핑 업체에 취직했지만 월급도 못받은 채 2달 동안의 짧은 직장생활을 끝내야 했다. 회사가 문을 닫은 것이다. 이후엔 취업정보실에 아무리 줄을 서봐도 헛수고였다. 지금은 ‘워킹 홀리데이’나 떠나볼까 궁리중이다.

강씨가 나온 동물자원학과는 취업률이 10% 정도다. 그나마 전공을 살려 제대로 취업한 사람은 60명 가운데 1∼2명에 불과하다. 전공 공부에만 매달려온 모범생들은 처지가 더욱 난처해졌다. 나머지는 영업사원 등 닥치는 대로 일자리에 달라붙었다. 지난해처럼 “취업 준비하면서 1년쯤 놀아보지, 뭐”하며 배짱을 부리는 친구도 없어졌다. 어디든 원서를 내놓고 하루종일 호출기만 들여다보며 지낸다.

그러나 이들은 취업도 하기 전에 회의부터 느껴야 하는 처지다. 보통 업체에서 제시하는 임금은 월 40만∼50만원이다. 많이 주는 곳이 80만원 정도. 대기업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아르바이트로 한번에 300만원도 벌어본 강씨는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취업제한 연령에 이른 복학생들은 일단 입사해 경력이라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월급 20만∼30만원짜리 ‘저임금 직장’도 거절하지 못한다.

학교 도서관은 ‘실업자 인턴’이라고 불리는 졸업반 학생뿐 아니라 진짜 실업자인 졸업생들로 넘친다. 여기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한 선배들까지 합세한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후배들의 궁한 주머니라도 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쌍한’ 선배들과 민망한 조우를 피하고 싶은 후배들 사이에 웃지 못할 숨바꼭질이 벌어지는 교정을 고급 스포츠카가 요란한 음악소리를 내며 달린다. 요지경이다.

‘그래, 너희들은 취업 걱정도 없지.’ 강씨는 300원짜리 ‘솔’ 담배를 피우며 속으로 욕을 뱉지만 마음의 멍은 더 깊어진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솔’을 파는 담뱃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답답함을 달래려 술을 마시더라도 학교 앞 카페촌을 피해 소주병을 사들고 친구 자취방에 찾아드는 것도 새로운 풍경이다. 군대 간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뜯어봐도 병영생활의 냄새는 없고 취직 걱정만 그득하다. 술이 올라 불콰해진 친구의 넋두리. “전두환, 노태우는 지금 실업자니까 우리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겠냐?”

강씨가 전하는 1998년 가을의 대학 캠퍼스는 이렇듯 절망으로 기울고 있다. PC통신 나우누리 게시판에 ‘4학년의 비애’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는 글은 그 절망의 깊이를 짐작게 한다.

“내가 4학년이 되었다고 여기저기 취업을 알아보느라 뛰어다니는 모습이 참 스스로 우습게 보인다. 나는 결국 이렇게 조용히 없어지는 것일까. 근데 없어진다는 표현은 조금 무섭다….”

청년실업, 학생운동의 중심화두로

(사진/발랄한 듯 보이는 대학생들.)

이들은 ‘사라지는 세대’가 돼가는 자신의 모습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고 있다. 최승현 서강대 총학생회장은 “일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삶의 의욕도 잃게 된다”며 “홈리스로 살다 죽어가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에 버려지는 것은 인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국민승리21 실업대책본부가 지난 5월 인천지역 대학생들을 상대로 청년실업 실태조사를 시도했을 때 학생들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예비 실업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5달 뒤 실시한 재조사에서 학생들은 담담하게 설문에 응했다.

이 조사에서 학생들은 정부의 실업대책에 대해 146명 가운데 117명이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정책 결과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68명), ‘재벌기업들에 끌려다니고 있다’(30명), ‘신규고용 창출에 소극적이다’(12명) 등이 그 이유다.

조사결과에서는 학생들이 앞으로 실업상태가 됐을 때 어떤 대응 태도를 보일지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사회불안 요소로 우려하는 실업자동맹에 대해 71명이 ‘실업자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라고 답했다. 신규 미취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로는 98명이 ‘자기개발과 취업 노력’을, 48명이 ‘실업자의 권리 제기를 위한 조직화’를 꼽았다.

학생운동권도 청년실업 문제를 논의에 중심에 놓고 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등 20개 대학 실업대책기구들로 구성된 ‘전국학생 특별위원회’는 고용안정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여 1만5천여명을 참여시켰다. 경희대 총학생회는 청와대에 항의엽서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대학마다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인 요즘 선거의 최대 쟁점은 청년실업 문제다. 운동노선을 달리하는 학생운동 조직들도 ‘청년실업을 고민하는 대학생 모임’을 만들어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청년실업 대책을 요구하는 동맹휴업을 제기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박용진 국민승리21 조직부장은 “청년실업자들에게는 아무런 사회적·법적 보호장치가 없는 만큼 권리를 지키기 위한 독자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며 “내년 봄이면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이 학내로 ‘역류’해 들어오면서 조직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진한 먹구름이 잔뜩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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