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학이나 고교를 갓 졸업했거나 졸업하려는 젊은층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다. 빈곤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거품경제’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만큼 면역력이 결여된 상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량실업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전혀 예기치않은 사태인 만큼 그 충격은 더욱 크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갑자기 차가운 물에 뛰어든 것과 흡사하다. 그 ‘부적응의 정서‘는 자칫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50.5%, 그 절망의 수치
지난해 하반기와 올해 상반기의 대졸자 취업률은 50.5%. 취업률 조사를 시작한 68년 이래 최악이다. 전문대 졸업자의 취업률(66.3%)도 최근 10년 중 최저치다. 취업전문업체인 리크루트사는 지금까지 누적된 대졸 미취업자와 내년 초 졸업예정자를 합해 41만여명이 일자리를 찾고 있으나 30대 기업의 신규채용 자리는 1천여개에 불과하다고 전망한다.
지난 8월 기준으로 연령별 실업률 1위와 2위도 10대(19%)와 20대(11.7%)가 나란히 차지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들에게 갑자기 잿빛 미래가 열린 것이다. ‘청년실업’이 극복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띨까. 그들이 사회와 경제의 명실상부한 주역이 됐을 때의 미래를 한번 미리 가보자.
장면1.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날. 서울 마포구 상암동 경기장 앞은 21세기 첫 지구촌 축제의 시작을 지켜보려는 들뜬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사뭇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한무리의 청년들이 한켠에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박박 밀거나 사정없이 흐트러뜨린 머리에 한결같이 검정 가죽점퍼 차림인 그들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하면서도 까닭 모를 증오에 빛난다. 리더격인 청년은 5년 전만 해도 이른바 명문대를 다니는 공학도였다. 그가 은행 전산망에 침투해 돈을 빼내려다 쇠고랑을 찬 것은 취업이 3년 연거푸 좌절되던 2000년 겨울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의 짐 때문에 얻게 된 ‘전과’ 딱지는 계속 그를 따라다녔고, 그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려 사회를 향해 몸으로 복수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방송에는 ‘한국형 훌리건’의 등장을 알리는 뉴스가 첫머리를 장식했다.
이는 부정적인 상상의 극단적 형태다. 하지만 그 상상의 뿌리마저 허황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은 적어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 음지식물 같은 암울한 미래의 싹은 현실에서도 어느새 움트고 있다.
구제금융 이후 대학생들의 범죄가 부쩍 늘었다. 용돈 마련을 위해 길에서 강도짓을 하거나 사채를 빌린 뒤 빚독촉에 시달리자 아파트를 터는 식이다.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고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를 깨는 등 ‘화풀이성 범죄’도 많아졌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에 따른 구직난 △집안의 경제난 △취업에 대한 불안심리 등이 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아직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실업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나는 괜찮겠지”하는 생각으로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폴리아나 현상’이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일단 “어떻게 되겠지”하고 바라는 안일한 심리를 가리킨다. 이 단계를 넘으면 공포기가 오고 궁극적으로는 적응단계에 이른다. 그러나 생활고가 극에 이르면 적응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그들은 사회를 저주하게 된다.
다이아몬드 구조에 갇히는 직장인들
장상수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청년 실업자는 기본적으로 고급 두뇌”라며 “실업난이 계속돼 생계마저 막막한 상태가 오면 높은 지능을 해킹 등 지능 범죄에 사용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극심한 생활고가 좌절감을 안겨주고 좌절감은 공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심리학의 상식이다.
장면2. ㄱ씨는 오늘도 술을 마셨다. 21세기가 언제 시작됐던가. 새로운 세기를 맞는 2000년 12월31일 자정을 혼자 자취방에서 소주병을 벗하며 지낸 기억이 새롯하다. 늦게나마 직장을 잡은 게 아직 백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친구녀석들에겐 미안하다. 그렇다고 그가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몇년동안 백수생활을 한 공백을 쉽게 메꿀 수가 없다. 회사쪽도 왠지 자신을 삐딱하게 보는 것같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갓 졸업한 후배들에게는 밀리는 느낌이다. 직장을 바꿀까? 원한 직장은 아니지만 다시 백수생활을 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몇년의 백수생활은 삶에 대한 용기와 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아갔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텅빈 자취방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우리나라 기업 풍토는 아직 입사 기수에 따라 역할과 승진이 결정된다. 연령제한이라는 비합리적인 관문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입사할 시기를 놓치면 후배에 밀려 평생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에 성공한 이들의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교육과 산업의 연계가 불확실한 현실에서 신입사원들은 회사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업무능력을 쌓는다. 몇년을 놀다 입사하면 뒤이은 세대와 다를 게 없어진다. 뒷세대는 그나마 최신 교육을 받았다. “취업할 나이에 몇년을 잃으면 평생을 잃는 것”이라는 이건 동국대 교수(사회학)의 말은 기우가 아니다.
기업의 인력구조가 왜곡되는 현상도 예상할 수 있다. 회사원 유아무개(30)씨의 설명. “정상적인 피라미드 구조가 납작한 다이아몬드형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과장 1명에 대리 2명, 사원 3명이던 것이 과장 3명에 대리 1명, 사원 1명꼴로 되는 거죠. 그러면 과장급의 업무영역이 지나치게 좁아지는 한편 아래직원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 세대가 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이 공백으로 남는 기형구조가 나타난다. 이런 구조는 우리 경제가 위기를 벗어나 성장의 기회가 맞았을 때 장애물이 될 게 분명하다. 더구나 요즘은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다. 젊은 실업자층이 많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새 기술을 습득해야 할 세대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청년 실업자의 미래는 취업을 하더라도 우울한 일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낳고 싶지 않다”
혈기가 극에 달하는 20대 중·후반. 그러나 직장을 갖지 못하면 대부분 결혼을 미루게 된다. 결혼을 하더라도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이 는다. 이는 개인의 불행을 떠나 ‘인구 재생산’이라는 거창한 문제와 연결된다.
구제금융 시대가 도래한 뒤 10개월이 지난 무렵부터 신생아 출산율은 뚝 떨어졌다. 지난 9월 서울시내 몇몇 병원에서 태어난 신생아수는 1년 전보다 20% 가량 줄었다(표). ‘역베이비붐’ 현상이다. 인구는 노령화하고 인구구조의 평형은 깨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이 가임기간에 출산하는 평균 자녀수가 지난해 1.7에서 구제금융 이후 1.5로 떨어졌다. 만만치 않은 하락이다.
변용찬 인구가족연구실장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구제금융의 여파를 2세에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15∼20년 뒤에는 노동인력이 줄어든다. 노인 부양을 위한 세금 수요는 이에 반비례한다. 국가 발전의 원동력인 청년층의 급작스런 감소는 국가 경쟁력과도 무관치 않다.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더불어 짚어볼 문제 하나. 결혼 적령기의 미혼층이 늘어나면 혼외정사의 확산도 뒤따른다. 젊은 세대의 성개방 분위기도 이에 맞물린다. 지난 10월24일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유흥업소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 여고생과 여대생의 유흥업소 취업이 급증해 접대부의 3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방학 기간에는 50%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이들은 더이상 도덕적 우월감이나 특권을 누리던 예전의 ‘학생’이 아니다. 취업만이 유일한 잣대로 이들을 평가해준다. 때론 사랑을 잃고 얻는 갈림길에 취업이 버티고 서 있기도 한다.
‘직업 사냥꾼’으로 전락한 젊은이들에게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거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대학마다 올해 들어 기초학문 강좌의 폐강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대만 해도 ‘한국근대사상사’ ‘논리와 비판적 사고’ ‘고고학사’ ‘매스컴과 현대사회’ 등 인문학이나 전공기초 강좌 386개가 수강생 부족으로 폐강됐다. 법학, 컴퓨터공학, 영문학, 경제학 등 실용 분야도 취업과 관련이 없으면 수강생이 턱없이 줄어든다.
그들은 문화적 향취를 잃어버린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적 토대가 무너져 사회의 비전을 만들어나갈 수 없게 될 것이란 점도 학계의 걱정거리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는 “벌써부터 대학이 직업인 양성소처럼 변하고 있다”며 “기초학문이 쇠퇴하면 장기적으로 과학기술이나 문화 발전이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정신적 공황 상태인 것이다.
“과거로!”파시즘을 향한 짝사랑
루딘스타인 하버드대 총장은 최선의 교육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예술을 음미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예술가들이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대학은 전공뿐 아니라 철학에서 수학, 건축학에서 외국문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적 탐구를 유도하는 학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대학생들은 앞으로 당분간 최악의 교육을 받게 될 것 같다. 영어책만 붙들고 살아야 하는 세대. 그들은 풍성한 문화적 성취라는 한 세대의 과제 또한 뒷세대에 내줘야 한다.
장면3.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가 한창이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거리를 쓸어대지만 사람들 표정은 열병을 앓는 듯 상기돼 있다.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달아오른 선거열기는 새롭게 등장한 한 정치지도자에게서 비롯한다. 그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급부상했다. “민주화의 허울을 쓴 방종이 지금의 고통을 가져왔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다. 거리에는 연일 20∼30대 실업자와 자리가 불안한 직장인, 예비 실업자인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옛 군사독재자들의 얼굴과 나란히 그들의 ‘새로운 영웅’의 사진을 치켜들고 “과거로!”를 외친다. 그들은 강력한 권력이야말로 구원자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파시즘’이어도 상관없다.
사실 기성세대로선 이런 상황만이라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최선일 듯 싶다. 이 역시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청년 실업에 대한 대책이 ‘무대책’으로 흐르고 지금 같은 취업난이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균형잡힌 사회의식을 형성할 여유가 없다는 점도 그 촉발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청년 실업자가 50만∼60만명에 이르면 사회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온다고 말한다. 실업의 바다에 빠진 지금의 젊은이들은 두뇌가 있고 행동적인 세대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 전체에 쌓여가는 불만에 불씨를 던질 수 있다. 정권 초기에는 실업난을 과거 정부의 잘못으로 인식하지만 장기화할수록 현 정권의 책임도 함께 따지게 될 수밖에 없다. 반정부 세력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대량실업 상황이 지속되면 보호무역주의 등 민족주의로 포장한 극우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게 세계사의 경험이다. 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요구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된다. 이런 흐름이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20년대엔 별볼 일 없던 히틀러와 나치당이 30년대 들어 급부상해 집권한 배경에는 대공황과 600만에 이르던 실업자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최근 400만이 넘는 실업자를 내고 있는 독일에서는 극우파인 ‘네오나치’가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어 주변국의 우려를 사고 있다. 프랑스에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평균 15%의 지지를 받는 등 실업률이 10%를 넘어선 유럽 각국에서도 극우파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극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의 지리노프스키도 고실업과 극심한 소득격차로 박탈감을 느끼는 러시아인들의 정서를 개혁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하고 있다.
극단적 좌편향이 공감 얻을 수도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우리나라에서도 국수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색채가 분명한 흐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며 “2000년 총선에서는 이런 주장이 본격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회복이 안 되고 대졸 실업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 계층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면 중소 자영업자와 농민, 실업자 등이 주축을 이루는 파시스트 동맹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파시즘은 누적된 고통의 ‘속죄양’을 만들어내려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이는 동성애자 등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통일을 반대하는 논리가 힘을 얻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최근 <고대신문>이 재학생 259명을 대상으로 통일문제 의식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의 51.2%가 ‘통일은 필요하지만 그에 따르는 비용이 크면 유보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불과 2∼3년 전과 비교해도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반응이다.
조돈문 교수는 반대로 “극단적인 좌편향의 사회운동이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좌든 우든 청년 실업자군이 누적되면 파괴력을 지닌 급진 사회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점에 이견을 다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대량실업과 사회해체는 ‘총체적 위험사회’의 등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지금의 문제가 앞으로 사회에 끼칠 중장기적 영향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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