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아펙)의 장밋빛 미래는 끝났다.”
지난 11월18일까지 1주일간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프르에서 열린 제6차 아펙회의를 지켜본 국·내외 국제경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아펙에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비판과 실 망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아펙이 추구해온 야심찬 역내 무역자유 화 구상이 무참히 깨진 데다, 1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아시아 금융위기 에 대한 별다른 대책도 나오지 않은 탓이다.
사실 이번 아펙의 주요 의제의 하나는 지난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제 5차 회의에서 합의한 ‘자발적인 부문별 조기자유화’ (EVSL) 계획에 따라 수산업·임산업·에너지·완구·화학 등 9개 분야의 관세를 2005년까지 0%로 낮추는 세부계획을 세우고 이행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역 내 금융위기 안정을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 역내 무역자유화 등 야심찬 구상 깨져
이번 회의에서는 이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회원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 본 정부가 집권 자민당의 지지기반인 농·어민을 의식해 수산업과 임업 분 야의 관세 인하에 반대하고 여기에 한국·캐나다·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 아 등을 뺀 대부분의 동아시아 회원국들이 동조하면서, EVSL은 1년 만에 휴 짓조각이 됐다. 단 하나의 사안이라도 타결되지 않으면 합의를 끌어내지 못 하게 돼 있는 미국 국내 통상법도 일본의 반대에 못지 않은 걸림돌이었다.
9개 분야 관세인하 문제는 내년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협상으로 넘겨졌 다.
금융위기 안정방안 역시 이전에 선진7개국(G7)과 여기에 개발도상국 15개 국이 포함된 G22 등에서 논의된 내용을 ‘짜깁기’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일본이 주장하는 아시아통화기금(AMF)이나, 국제적인 부채재조정을 위한 채 무국협의회 구성, 국제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방안 마련 등은 미국의 반대에 밀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못했다.
이에 대해 LG경제연구원 김보경 실장은 “경제위기를 계기로 느슨한 경제 협의체로 출범했던 아펙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계무역기구(WTO)나 유렵연합(EU)처럼 법적 구속력 없이 합의 내용을 회원 국들의 자발적인 이행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구인 탓에, 자국의 이해를 먼 저 챙기게 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경제발전 격차가 큰 다양한 회원국들로 이뤄진 아 펙의 구성은 93년 출범 때부터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정상들의 단순한 ‘사진찍기 대회’ 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다닌 것도 바로 이 때문 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린 아펙의 모습은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만로 이뤄진 경제협력체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미국은 ‘ 개방적 지역주의’ 를 내걸며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미국은 물론 캐나다· 멕시코·브라질 등 태평양 연안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지금의 형태로 귀결됐 다. 아펙은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세력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작품이라는 성 격이 짙었던 셈이다.
이번 회의의 실패에 따라 아펙은 사실상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 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93년 출범 때만도 못하다. 회원국간의 감정의 골 이 패일 대로 패여 쉽사리 치유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회의 에서는 국제회의에 으레 따르는 외교적인 수사도, 예의도 없었다. 회원국간 의 원색적이고 비외교적인 무례함이 난무했다. 특히 미국 정부가 보인 태도 는 이번 회의를아예 엉망으로 만들자는 심산이 아니었는지 의심을 품게 할 만큼비외교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사진찍기 대회’ 전락… 미국의 좌충우돌
먼저 아펙 21개 회원국 정상들의 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 11월16일 역내 경제계 인사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는 이번 회의 주최국인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도 참석해 있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아펙회의에 참석한 앨 고어 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 렇게 연설했다. “경제위기를 겪는 국가들에서 ‘피플 파워’ ‘도이 모이 ’ ‘레포르마시’ 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우리는 계속 들어왔다 . 이 요구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용감한 말레이시아 국민들로부터 듣고 있 다. ”
듣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하티르 총리 면전에서 그의 정부를 사실 상 전복하라고 말레이시아 국민들을 부추긴 셈이다. 미국 정부의 일련의 태 도에서도 이런 의심은 더욱 커진다. 고어 부통령은 마하티르 총리와의 정상 회담을 거부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성추문 등의 혐의로 투옥 된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전 총리의 부인을 면담하고 바로 말레이시 아를 떠났다. 클린턴 대통령도 “나의 역할을 능력있게 대변했다”며 고어 를 감쌌다. 마하티르에 대한 미국의 이런 태도는 아펙 회원국의 인권이나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당사국 정상과의 양자 회담을 통해 의견을 전달해오던 관례와도 어긋난다.
미국이 이번 회의 주요 의제도 아닌 안와르 이브라힘 전 총리의 투옥을 둘러싼 말레이시아의 국내 인권·정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에 대한 반응은 회원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캐나다·필리핀 등은 미국에 동조 적이었던 반면, 나머지 회원국들은 침묵내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인권·정치 문제가 주요 의제가 아니었다는 데는 회원국 사이에 이견이 없다.
‘앨 고어 발언 파문’ 의 유력한 배경으로는 역시 일본과 중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마하티르 총리가 내세우는 헤지펀드 등 국제투기자본 규제와 IMF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겠다는 미국의 계산이 꼽힌다. 미국이 안와르 전 총리를 지지하는 것도 그가 민주주의의 투사이기 때문은 아니다.
안와르 전 총리는 한때 말레이시아 집권여당인 말레이민족연합기구(UMNO) 2인자로서 재계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마하티르 총리의 후계자로 떠 올랐던 인물이다. 안와르 역시 미국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꼽는, 정경유착으로 상징되는 ‘정실자본주의’ 의 한축을 맡고 있던 셈이다.
미국이 안와르를 지지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재정긴축과 고금리·통화긴 축으로 이뤄진 IMF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무역자유화는 물론 자본 이동 자유화에도 적극적이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반면 마하티르 총리의 경우 IMF프로그램을 전면 거부하고, 재정 확대와 외 환·자본시장 통제를 통해 환율 안정과 경기 부양을 꾀하고 있다. 물론 마 하티르 총리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책임을 모 두 국제투기자본 탓으로 돌리는 협소함을 보여 왔다. 하지만 헤지펀드에 대 한 규제를 바라지 않는 미국으로서는 그의 일관된 국제투기자본 비판이 부 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번 회의에서 드러난 미국과 일본의 갈등은 아펙의 장래를 더욱어둡게 한다. 정상회담이 끝나던 11월18일 샬린 바셰프스키 미국무역대표는 일본 정부가 임업·수산업 분야의 관세인하에 반대한것을 겨냥해 “일본은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도 거부했다.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관세인 하 실패는 (이에 따른) 비양심적 결과”라고 맹렬한 비난했다. 고무라 마사 히코 일본 외상의 “행복한 결말”이라는 평가와는 극과 극을 달리는 셈이 다.
– 동아시아 국가들도 이해관계 엇갈려
가진 ‘밑천’ 이 모두 드러난 아펙은 앞으로 새로운 의제를 찾아내지 않 는 한 겨우 이름을 유지하는 운명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동아시 아 국가들만의 경제협력체 구성 논의가 다시 등장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위기 극복방식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보 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한국·필리핀·타이 등 일부 국 가들은 전면적인 개방경제를, 말레이시아 등은 일시적인 폐쇄경제를 시도하 고 있다. 어느 쪽이 설득력 있을지는 브라질에 대한 IMF구제금융이 가늠자 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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