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위에 군림, 안기부는 지휘 못해…
정치 중립 문제도‘의심’
김영삼 정부 시절인 97년 8월 취임한 김태정 검찰총장은 그해 9월19일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가졌다.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정치판은 잔뜩 달아올랐고, 경제는 한보 사태 후 기업들의 연쇄도산으로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김총장은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원고향은 전남 장흥으로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레임 덕이 극심하던 시절인데 YS가 호남 출신을 검찰총장에 임명했으니,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야당인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가 검찰총장 임기(2년)를 채울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변했었다.“내가 죽은 후 우리 집안 족보는 나를 검찰총장을 지낸 이로 기록할 것이다. 검찰총장은 단 하루만 맡아도 영광스런 자리이다. 나는 검찰총장의 임기를 반드시 채울 것이며 그럴 자신도 있다. 검찰권은 국민에게서 나온 것이지 통치권자의 하사품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잘못이 없는데도 집권자가 물러나라고 한다면 나는 뿌리칠 것이다.” 그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검찰이 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돈 안드는 선거가 정착되도록 하겠다. 지위 고하와 여야를 불문하고 돈을 뿌린 선거 사범은 처단할 생각이다. 내가 검찰총장으로 있는 한 선거 사범 단속에 있어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두고 봐 달라.”
검찰의 위상 극명히 보여준 총풍 사건
김총장 재임 중 한국은 정권 교체를 단행했다. 그러나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경제는 구조 조정과 실업 문제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변화와 위기 속에서 과연 검찰은 김총장의 의지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자.
검찰은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명실 상부한 최고의 사정기관이다. 그러나 최고의 사정기관은 경찰이나 국세청 등을 지휘할 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법적으로 검찰은 안기부를 지휘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직속 기관인 안기부를 전혀 지휘하지 못했다.
지난 10월 초 터져 나온 총풍 사건. 안기부가 수사해서 서울지검 공안1부로 송치할 때만 해도 이 사건은 형법의 ‘외환(外患) 유치죄’를 범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를 거치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와 통신 회합을 한 죄’ 등으로 축소되었다.
76년 북한군이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에서 도끼 만행을 저질렀을 때 주한미군은‘데프콘 2’를 선포하고 개성까지 진격하는 ‘제한전’을 준비했었다. 북한이 총기가 아닌 도끼를 휘둘렀음에도 미국이 제한 전쟁을 준비한 것은, 도끼 만행을‘국제법’인 정전협정 위반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전협정은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에서는 권총을 소지할 수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이 지역에서 총기를 사용하면 이는 전쟁 발발 사유가 되어 반대측은 즉각 전쟁을 벌일 수 있다. 도끼 만행 때도 준전시로 돌입한 미국인만큼 판문점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난다면, 한국군에 대한전시(戰時)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곧바로 전시 상태로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전쟁이 선포되면 15대 대통령 선거는 무기 연기되고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연장된다. ‘총풍 3인’이 의도한 대로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김영삼씨의 재집권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3인의 총격 요청이 사실이더라도 이는 이회창씨 당선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불능(不能) 사건’이 된다.
“안기부가 말도 안되는 사건 만들었다” 푸념
그러나 우리 사법 체계에서는 북한을 국가가 아닌 ‘반(反) 국가단체’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도발을 처벌하기 위해 별도로‘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에는 외환죄나 외환유치죄 항목이 없어, 검찰은 3인의 총격 요청 행위를 기소할 수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안기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은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서울지검이 내놓은 결과물이 지난 10월26일의 ‘총격 사건 수사 발표’였다. 이날 검찰은 궁여지책으로 3인이 북한에 판문점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쇼를 벌여 달라고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총격전 요청을 한 것만으로도 ‘전단(戰端·전쟁의 단서)을 연’ 행위이므로,‘쇼’라는 말과는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면 검찰은, 법원이 ‘형법으로도 북한의 도발을 처벌할 수 있다’는 새로운 판례를 남길 수 있도록, 세 사람을 형법의 외환유치죄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마저도 포기했다. 여기에는 총격 요청 증거가 불충분한 데다 고문 조작 시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면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판단을 내린 후의 검찰 행동이다. 만약 경찰이 이 사건을 수사해 언론에“외환 유치 사건이다”라고 흘린 후 송치했다면, ‘법률 전문가’인 검찰은‘틀림없이’ 경찰을 ‘박살’냈을 것이다. 수사를 책임진 경찰 간부들은‘좌천’을 각오해야 할만큼, 경찰의 ‘무식한 법 적용’을 질타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치한 기관이 안기부일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눈 씻고 찾아도 홍경식 부장·박철준 부부장 등 베테랑 검사들로 구성된 서울지검 공안 1부가 안기부에 대해 공식·비공식으로 불만을 전달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검찰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수사 발표 후 서울지검 관계자들이 사석(술자리)에서 “안기부가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을 만들어 검찰을 곤란하게 했다”라며 푸념하더라고 전했다.
‘서민적’인 경찰에 대해서는 위세를 부려도, 대통령 직속 기관인 ‘귀족’
안기부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 비단 김태정 총장 시절만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검찰권을 받았으므로 정권 교체기에도 검찰권을 지켜내겠다고 호언한 검찰총장이라면, 안기부의 주제넘은 행위를 과감히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태정 총장이 이끄는 검찰은 ‘권력의 시녀’ 소리를 들었던 과거 검찰과와 달라진 점이 없다.
‘검찰청법’은 ‘검사가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11월3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검사장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총풍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직제상 검찰은 법무부 소속이기 때문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것은 적법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권 행사에 일일이 개입하면 이는 검찰권 독립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현직 검사 청와대 파견 제도 교묘하게 부활
공교롭게도 최근의 검찰 사정은 야당 의원을 주로 향하고 있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의원(31명) 중에서 상당수가 사정 대상자로 거론되던 사람이었다. 야당은 이런 점을 근거로 ‘여당이 검찰을 동원해 정계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 ‘표적 사정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난해까지 여당이었기 때문에, 금품 수수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금 벌어지는 양태만을 근거로, 검찰이 편파적 사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현직 검사가 청와대에 파견되어, 대통령이 검찰권을 장악하는 장치로 작용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 파견 검사는 대통령의 의지를 검찰에 ‘강하고·빠르게’ 전달함으로써,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문민 정부 시절 사정 비서관을 지낸 배재욱 검사처럼 청와대 파견 검사 자체가 권력자가 되어 재벌로부터 돈과 함께 청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야당 시절 국민회의는 이러한 점 때문에, 검찰청법 개정을 시도해 ‘검사는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되거나 대통령 비서실의 직위를 겸임할 수 없다’ (44조의 2)는 조항을 삽입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들어 이 제도는 교묘한 방법으로 되살아났다. 현재 대통령 비서실에는 박주선(법무)·이범관(민정)씨 등 5명이 검사직을 사직하고 법무부 산하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자격으로 파견되어 있다. 과거 정권에서부터 존재해 온 검찰청법 44조는 ‘검사는 법무부 직원을 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대로라면 법무부 직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이들의 청와대 근무는 적법하고, 파견 후 검찰 복귀도 가능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비서관 5명이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검찰 복귀를 시도하면 검찰청법(44조의 2) 위반 논쟁이 일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검찰청법에 44조 2항을 삽입한 국민회의 정부가 이를 어기고, 과거부터 있어 온 44조만을 적용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일 가능성이 높다.
“검사가 월급쟁이로 전락한다” 개탄
법무부장관은 검찰 인사권을 쥐고 있어,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제외한 모든 검사에 대해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 더군다나 박상천 장관은 현역 여당 국회의원 신분을 갖고 있어, 검찰 인사권을 행사할 때 자기 당의 이익을 관철할 가능성이 있다. 또 박상천 법무부장관·김태정 검찰총장·박주선 청와대 법무 비서관은 광주고등학교 선후배이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제아무리 줏대 센 검찰총장이 있더라도 검찰권 독립이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신 강한 인물로 꼽히는 김태정 총장이 취임한 후 벌써 1년이 지났으나 검찰은 과거부터 해오던 방식대로 권력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한 열혈 검사는 “이런 구도에서는 검사 정신이 살아 있는 검사보다는 윗사람의 취향과 권력이 시키는 바에 따라 생각 없이 움직이는 월급쟁이 검사만 탄생할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李政勳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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