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미국의‘폐지’요구에 반발…

12월 말 존폐 여부 결정날 듯

스크린 쿼터제 논란이 재연될 조짐이다. 지난 7월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의 스크린 쿼터(한국 영화 의무 상영 제도) 폐지 발언으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영화계가 넉 달 만에 다시 긴장에 휩싸였다. 최근 한·미 쌍무투자협정(BIT)을 위한 실무 회의에서 미국측이 정식으로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25일 영화인과 문화관광부 관계자, 국민회의 최희준 의원 등이 참석한‘충무로 포럼’은 예기치 않게 불거진 이 사안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워싱턴에서 열린 실무 회담에 참석했던 문화관광부 관계자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라는 것이 미국의 원칙이며, 12월 말까지 대안을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라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영화인들은 지난 12월1일 서울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미 쌍무투자협정의 협상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인지, 정부의 대책을 묻는 목소리가 한층 거셌다.

미국의 공세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7월 주무 부처인 문화관광부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밝히고, 김종필 총리까지 진화에 나서 반발이 잦아들었지만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외교통상부·문화부, 의견 차이 뚜렷

협상 실무자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현재의 구도는 한국이 ‘스크린 쿼터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다. 미국이 마련한 쌍무투자협정 표준 문안에 따르면 ‘양국에서는 자유로운 투자를 저해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된다’(6조)고 규정하고 있으며, 세칙에서 ‘자국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사용을 강제할 수 없다’(A항)고 못박고 있다. 조약은 국내법에 준하는 효력을 갖고 있어서 별도 규정이 없을 경우 ‘자국 재화의 사용을 강제하는’ 스크린 쿼터제는 자동으로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 조항은 영화뿐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 쿼터제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물론 통상 관련 조약에서 ‘문화적 예외’를 인정한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문화적 예외를 관철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때는 예외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이번 협상에서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들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관 부처인 문화관광부와 외교통상부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두 부처의 입장 차이는 지난 7월 이미 확인되었다. 문화관광부와 사전 조율 없이 폐지론을 폈다가 거센 반발을 샀던 외교통상부는, 현재 주무 부처인 문화관광부의 견해가 중요하다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기본 입장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공식 입장은 ‘최소한의 문화적 방어벽으로서 스크린 쿼터제를 유지하되, 범위는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폐지론을 폈던 7월에 비하면 한 발짝 물러선 듯 보이지만 그 밑에는 여전히 쿼터제보다는 간섭을 덜 받는 세금 감면이나 보조금 등을 통한 지원이 더 낫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양국의 마찰을 최소로 줄이자는 통상 논리가 우선인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나아가 현행 스크린 쿼터제가 오히려 한국 영화의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온실론’이다. 찍기만 하면 무조건 극장에 걸 수 있기 때문에 제작 풍토가 안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가 내세우는 원칙은 문화를 지원하되 경쟁 요소가 가미된 지원책을 펴자는 것이다.“경쟁력 없는 영화사는 퇴출돼야 한다. 다른 분야는 모두 그렇게 하는데, 영화만 예외일 수 없다”라고 교섭 담당자인 김원경 사무관은 말했다.

스크린 쿼터를 폐지하고 경쟁 요소를 도입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발상은, 유예 기간을 몇 년 둔다고 하더라도 영화인들에게는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으로 비친다. 문화관광부도 같은 생각이다. 영화진흥과 박영대 사무관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할 경우 5년 이내에 영상산업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지철 문화산업국장은 현재 문화관광부의 공식 입장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며 축소도 몇년 후에나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문화관광부는‘말이 좋아 직접 지원이 선진적이지, 보조금 등을 통해 스크린 쿼터제와 비슷한 효과를 거두려면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또한 스크린 쿼터제가 단순한 울타리가 아니라 한국 영화 제작을 독려하는 유인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관광부는 90년대 후반 들어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25%대로 뛰어오른 데는, 성수기에 한국 영화를 개봉할 경우 상영 일수를 1.5배로 계산해 주는 정책이 주효했다고 보고 있다. 비수기에 극장을 채우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한국 영화를 성수기에 내놓도록 유도함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고 관객 몰이에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을 제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작품만 잘 만들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는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영화인들은 이러한 생각이 영화 배급의 특성을 잘 모르는 데서 생겨난‘경쟁력 신화’라고 꼬집는다. 영화 배우 문성근씨는 “할리우드 영화와 자유롭게 겨룰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 영화사는 세계적인 독점 기업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 쿼터제는 일종의 독과점 방지 장치가 된다는 것이다.

외화 못 벌어도 영상산업 육성해야

문씨는 자유 경쟁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서울의 한 극장이 성수기에 흥행작인 <여고 괴담>(서울 80만) 대신 미국 메이저의 작품인 <고질라>(서울 20만)를 변칙 상영했던 예를 꼽았다.

스크린 쿼터제가 폐지되면 좋은 외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늘 것이라는 일부 관객의 생각도 순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지금도 한국 영화 때문에 외화 수입이 방해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끼워 팔기를 통해 싸구려 작품을 강요하는 메이저들의 횡포가 더 문제다.

현재 한국 영화 제작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극장주들이 제도가 폐지되면 외화 유통에 주력하리라는 것도 우울한 예측이다. 승률이 불확실한 영화 제작에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는 흥행 여부에 관계없이 대관료를 챙길 수 있는 유통 업자로 남는 것이 훨씬 속 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극장을 채울 소프트 웨어는‘바깥’에 무궁 무진하다. 지금 수입되는 외화만으로도 전국 5백여 개의 극장을 1년 내내 완전 가동할 수 있다.

영화 보호책을 마련하지 않고 시장을 개방한 많은 나라에서 영상산업 기반이 무너진 사례는, 이같은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대만의 경우 차이밍량·후샤오시엔 등이 자존심을 지켜 주고 있지만 영상산업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영상 분야가 미래의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이유로 육성책이 쏟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영화의 가치가 돈벌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또 설혹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영상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일 만하다. 한 나라의 정체성은 그 나라에서 만든 문화 산물을 통해서만 온전히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문제 전문가인 한 재미 변호사는, 자국 문화의 중요성을 돌아보기 위해서 거꾸로 세계 문화가 미국에 종속되었던 경우를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중국의 설화(<뮬란>)든 이집트의 전설(<이집트의 왕자>)이든 닥치는 대로 끌어들인다. 문제는 할리우드의 식욕이 왕성할수록 본래의 문화를 왜곡할 소지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는‘영혼을 팔 셈이냐’는 영화인들의 반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인들은‘과보호에 의존 말고 경쟁에 나서라’는 요구를 ‘생존이냐, 붕괴냐’라는 실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스크린 쿼터제가 과보호라는 주장도, 작품만 좋다면 할리우드와 경쟁할 수 있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魯順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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