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유출’과 ‘국민편의 도모’라는 정부와 시민단체간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논란이 계속돼온 전자주민카드제도는 ‘폐기’ 쪽으로 결론이 났다. 지난 12월7일 여당과 행정자치부는 당정회의를 열어 전자주민카드제도를 폐기하는 대신 단순 플라스틱 재질의 대체 신분증을 발급하는 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2월1일부터 단계적으로 전자주민카드가 발급돼야 했다. 작년 11월 정기국회에서 이 제도의 시행을 골자로 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이 후보 당시 반대의견을 피력한데다, 새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와 감사원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진통을 겪은 끝에 지난 9월 행자부는 2년간 시행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법은 살아 있고 실시만 유보된 어정쩡한 상태를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전자주민카드를 폐기한다는 계획에 따라 요즘 행자부는 내년 임시국회에 제출할 새로운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손질하느라 분주하다. 현재 마련중인 개정안은 주민등록증 소지 의무를 폐지하고, 분실 후 7일 이내에 의무적으로 신고하고 재발급받도록 한 규정을 삭제했다. 이 개정안이 발효되면 불심검문과정에서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곤욕을 치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재발급 의무규정 삭제에 대해서는 경찰이 수사상 필요를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최근 주민등록제도와 관련해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일단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는 단순히 주민등록증을 갖고 다니는지 아닌지의 차원을 넘어 ‘주민등록제도’ 자체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행정편의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모든 국민을 ‘신민’(臣民)으로 만든 전근대적인 이 법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몇년전 외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했던 한 노동단체 인사는 유럽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주민등록번호 이야기를 했다가 “네가 디지털(Digital)이냐”며 웃는 바람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참가국 중 비슷한 제도를 가진 나라는 남아공이 유일했다고 한다.
지난 62년 제정돼 몇차례 개정을 거친 현행 주민등록법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출생후 14일 이내에 거주지 관할 동사무소에 주민등록신고를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여기엔 예외가 없다. 이 신고와 함께 동사무소에서 부여받은 열세자리의 주민등록번호는 전산처리돼 그가 세상을 사는 동안 내내 따라 다니는 일종의 바코드 역할을 한다. 국가기관이, 필요하다면 주민등록번호 하나로 언제든 개인의 신상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정부 입장에서 이같은 등록제도는 ‘능률적인 행정 처리’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행자부는 “일본은 선거 공부(公簿)를 작성하는데 3개월 동안 6조엔이 소요되지만, 우리는 주민등록제도 덕분으로 단 하루에 종이값만 있으면 된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제도로 인해 개인은 국가의 시야로부터 숨을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권단체들은 이 제도가 본질적으로 기본권 침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주민카드 시행반대 공동대책위에서 활동해온 김기중변호사(34)의 지적. “정부는 불순분자와 범법자를 색출해 사회안녕을 유지하는데 이 제도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돼 피해를 보는 국민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작년 2월,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씨도 주소를 옮긴지 1주일만에 피살됐다. 범인들은 경찰에서 빼낸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그를 찾아냈다”
인권단체들은 만 17세 때 주민등록증 발급과 함께 이루어지는 지문 날인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우리의 제도는 모든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 인권선진국들이 국가의 지문 날인을 외국인이나 범죄자에 한정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행자부 주민과 관계자는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사고나 각종 흉악범죄 발생시 지문이 피해자나 범죄자의 신분을 신속하게 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작년에 이뤄진 정부의 한 조사에 따르면 주민등록제도를 활용하는 기관은 관공서와 정부투자기관, 민간단체 등 모두 95개(230개 시-군-구 제외)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고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기관과 단체에서 각 부문에 이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의 ‘주민등록 폐지 불가’ 논리에는 이처럼 사회 전반이 이 제도를 근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현실론’이 골간을 이룬다. 또 각종 신분증을 발급할 때 주민등록이 기본이 됨으로써 별도의 증명을 위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자주 언급된다.
이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폐지와 개선 두 방향이 갑론을박 중이다. “현재는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대안이 분명치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프라이버시 개념이 자리잡지 못한 근본 원인이 국민이 주민등록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출발한다면, 이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김기중변호사의 진단이다.
이 강 필 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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