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현직 민선 자치단체장인 김창현(37) 울산 동구청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의 1심 재판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경찰은 애초 “재판을 통해 증거가 공개되면 국민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유죄 입증에 자신감을 보였다. 현직 구청장을 전격 구속한 만큼 뭔가 결정적인 물증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 경찰은 감청테이프 1천여개와 압수한 컴퓨터 디스켓 100여개를 증거물로 제시하며 “3년을 준비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경찰,디스켓 건넨 ‘협조원’ 신분 안밝혀

그러나 구형공판(12월28·29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피고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용공조작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검·경찰과 피고인 양쪽은 제시된 증거의 신빙성에 대해 100%와 0%라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였다. 진실은 어느 쪽일까.

영남위원회 사건은 새 정부 들어 처음 나온 반국가단체 사건이라는 점에서 인권단체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반국가단체는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 체제를 갖춘 단체’로 정의된다. 그 우두머리에 대한 법정 형량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밖에 없을 정도로 무겁게 다뤄지는 죄목이다. 그만큼 엄밀한 증거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증거의 신빙성 논란도 반국가단체 부분에 집중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증거는 경찰이 피고인들을 체포하기 전 입수했다는 디스켓이다. 조직의 명칭과 구성, 조직체계 등 반국가단체임을 입증할 요소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탄압 영남위원회사건 부산·울산 공동대책위원회’(대책위)는 “감청자료나 연행 당시 압수한 물품에는 이른바 이적표현물은 들어 있을지 몰라도 반국가단체 구성과 활동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디스켓의 입수 경위다. 검찰과 경찰은 이에 대해 ‘협조원’이 사전에 제공했으며 영남위원회 ‘총책’인 박경순(41·늘푸른서점 대표)씨 집에 보관돼 있던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협조원의 신분은 수사기밀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고 있다. 피고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를 협조원이 제공한 자료를 증거로 인정한다면 이번 재판은 아무런 진실도 밝히지 않은 채 과거의 정치재판을 답습하는 것”이라며 비공개 재판을 통해서라도 그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협조원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디스켓 내용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김도형 변호사)고 지적한다. 형사소송법은 어떤 사실을 경험자 자신이 직접 판사에게 진술하지 않고 다른 형태로 간접 보고하는 것, 즉 전문(傳聞)증거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사 협조자로부터 입수한 내용은 그 협조자가 직접 법정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경찰이 프락치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자 프락치를 통해 얻은 정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판례도 있다. 서울지법 형사23부는 지난 10월29일 ‘국제사회주의자’(IS) 조직원들의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등) 사건에서 “경찰의 수사보고는 협조자로부터 입수한 내용을 기재한 것으로 전문증거에 불과해 증거능력이 없는 것”이라며 일부 무죄판결을 내렸다.

3년 추적 주장하면서 조직 명칭 혼선

이번 사건의 변호인인 정재성 변호사는 협조원의 존재 자체에 의문 부호를 찍는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조직의 핵심 문건이다. 이를 입수할 만한 협조원이 있다면 조직 내부자일 텐데 이른바 핵심 조직원은 모두 검거된 상황이다. 이 문건은 경찰이 박씨 집에서 훔쳤든지 조작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으로 본다. 협조원은 없는 것이다.” 대책위는 여기에 덧붙여 “얼마든지 변조가 가능한 컴퓨터 디스켓을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로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하”라고 반발하고 있다.

두번째 관심거리는 경찰이 지난 96년 5월부터 감청을 통해 수집한 자료들이다. 경찰은 총책으로 지목된 박씨 집을 24시간 감시하면서 전화통화는 물론 일상적인 대화 내용까지 무선 도청장치를 이용해 감청했다.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감청테이프는 47개이며 주로 박경순씨와 그 밖의 피고인들이 만나 나눈 대화를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감청테이프에 나오는 목소리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지난 12월1일 부산지법 법정에서 직접 감청테이프를 재생했을 때 녹음 상태가 나쁘고 잡음이 많아 무슨 말인지 분간해 듣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재판부는 감청테이프를 다시 감정해 안 들리거나 잘못 녹취된 부분을 빼고 확실한 부분만 채택하기로 했다.

경찰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결정적 물증이 제시되지 않으면서 이번 사건의 조작 의혹도 커지고 있다. 경찰과 검찰은 3년여 동안 추적해온 사건이라고 말하면서도 긴급체포영장과 수사과정, 공소장 등에서 조직의 이름을 여러차례 바꾸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반제청년동맹 영남위원회’로 불렀다가, 다음엔 ‘한민전 영남위원회’, ‘조선노동당 영남지역당’, ‘영남위원회’ 등이 며칠 사이에 번갈아 조직 명칭으로 사용됐다.

지난 7월22일 연행된 이의엽(37·부산노동자회 교육위원)·이창규(34·전 현총련 조직부장)씨가 이틀 뒤 석방된 것도 의혹으로 남아 있다. 대책위에 따르면 이씨는 경찰에서 “문건에 등장하는 가명 가운데 당신에게 해당하는 게 어느 것이냐”는 추궁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경찰은 일단 이씨를 조직원으로 지목하고 연행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할 수 없이 석방한 것으로 보인다. 대책위는 “반국가단체 가입 혐의로 연행한 사람을 두명이나 풀어준 사실은 일단 잡아들인 뒤 짜맞추기식 수사를 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수사결과 발표에서 “조선노동당 산하 한민전의 지도를 받는 영남위원회”라고 주장했지만 북한과의 연계 사실도 명백한 물증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김창현 구청장에게 “외국에 나갔다 온 적이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북 가능성을 캔 것이다. 그러나 김 구청장은 외국에 나간 일이 한번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북한동포돕기운동을 ‘김정일 보위 투쟁’으로 규정한 것도 무리하게 북한과 연계시키려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경찰의 이런 주장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참여한 많은 단체와 시민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대북지령 받는 중앙위원이 간첩신고?

더 흥미로운 것은 영남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지목된 정대연(37·울산연합 회원)씨가 지난해 10월 ‘울산 부부간첩 사건’에서 간첩 최정남을 안기부에 처음으로 신고한 사람이란 점이다. 경찰은 “정씨가 신고하는 바람에 더 많은 간첩을 체포할 기회를 놓쳤다”며 ‘조직보호’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으나,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북한과 연계된’ 조직의 핵심원이 간첩을 신고했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그 실체에 대한 의문과 함께 도·감청을 통한 인권침해라는 또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법원의 영장을 받지 않은 수사기관의 도청이 96년에 비해 8배나 느는 등 공안기관의 도·감청이 심각한 수준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감청에 따른 사생활 침해가 올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영남위원회 사건은 그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96년부터 계속해 도·감청을 당한 박경순씨의 법정진술은 이렇다.

“본인은 3년 동안 수사과정에서 자행된 치떨리는 비인간적 만행에 대해 고발하는 바입니다… 제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담당수사관으로부터 저희 부부싸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이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 마누라가 가끔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는 것은 당신이 충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저질의 말로 저희 부부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을 때….”

경찰은 박씨 집 건너편 2층에 방을 얻어 상주하면서 24시간 감시카메라를 작동시키고 박씨 부부의 대화와 전화통화를 녹음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감청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지만, 박씨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한 행위가 사법부에 의해 허가됐다면 과연 사법부가 법의 보루라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백승헌 변호사는 “도청은 최대한 제한돼야 하는 수사방법인데 이번 사건에서처럼 장기간에 걸쳐 포괄적으로 도청을 한 것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이런 도청자료가 유죄의 증거로 제출되는 상황이 우리의 인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녹취 인정해도 반국가단체 구성죄 적용 무리

영남위원회 사건은 새 정부에서 ‘신공안’이란 개념이 나온 뒤 터진 최대의 공안사건이다. 박상천 법무장관은 기회있을 때마다 국가보안법의 신중한 적용과 수사과정에서의 적법절차 준수 및 인권보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대책위 관계자는 “경찰의 녹취 내용을 인정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에 해당할 뿐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법적용”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조작과 인권침해 시비까지 더해진 이번 사건에 대해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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