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훈 중위 의문사 9개월 진상 추적기/

3월 말 사건 인지→7차례 의문점·타살 단서 보도

그것은 빅뱅(대폭발)이었다. 지난 12월8일 오전 <시사저널> 제477호가 시중에 나오자 세상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전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시사저널>이 커버 스토리로 보도한 ‘김 훈 중위 의문사 진상 추적 9개월, 북한 포섭 공작에 판문점 안보 구멍’ 제목의 기사를 받아 대서 특필했다. 국방 당국도 그동안 쉬쉬해 오던 김 훈 중위 직속 부하 김 아무개 중사를 구속한 사실을 이날 오후 언론에 전격 공개했다.

이튿날, 그동안 <시사저널>과 공동 추적 작업을 벌여온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위원장 하경근 의원)가 중간 발표를 통해 김 훈 중위가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군 수사 당국이 그동안 사실상 수사에 실패했음을 밝히자 파문은 일파 만파로 번졌다.

이렇게 되자 국방부는 황급히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을 원점에서부터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2차 수사에서 `‘격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불과 10일 만의 일이었다. 천용택 국방부장관은 청와대 지시로,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에 대해 기존 군 수사팀을 완전히 배제하고 `‘특별 합동(민군) 조사단’을 만들어 처음부터 다시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2월13일 양인목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 합동 조사단이 발족해, 김 훈 중위 의문사와 사망 관련 용의자로 거명되는 김중사의 불법 대북 접촉 행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합동 조사단은 김중위 사망 사건 진상 외에도, <시사저널>이 특종 보도한 판문점 경비병과 북측 공작조원들의 내통 실태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는 한편, 그동안 제기되어 온 군대내 의문사 사건 전반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김대중 대통령은 판문점 경비 체제에 대한 일대 수술 방안을 마련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

한미연합사 상황 보고서에서 첫 의문점 발견

‘김 훈 중위 의문사에 대한 원점 재조사’ ‘판문점 경비 체제 일대 개편’ ‘군대 내에서 벌어진 모든 의문사 진상 재조사’. 이 세 가지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시사저널>은 지난 9개월 동안 실로 ‘달걀로 바위치기 식’ 작업을 계속해 왔다. 무려 일곱 번에 걸쳐 김 훈 중위 의문사 및 판문점 경비 부대 군기 문란상을 추적 보도할 당시에는 메아리 없는 외로운 추적이었지만, 거대한 바위는 마침내 깨졌다. 그 과정에는 육군 3성 장군 출신인 김 척 전 3군 부사령관(김 훈 중위 부친)과 천주교 인권위원회, 그리고 국회 국방위원회의 공동 작업이 있었다.

<시사저널>이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한달 가량 지난 3월 하순이었다. 유족인 김 척 장군(97년 11월 예편) 이 한달 가량 개인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다 느낀 좌절과 분노의 사연을 들고 기자를 찾은 것이다. 당시 김장군은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군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군에 모든 생을 바쳤고, 자식까지 바친 마당에 우리 군이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다. 내가 자식을 군에서 잃은 억울한 사실을 세상에 밝히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그동안 내가 군에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셈이다.”

그날 이후 김장군과 <시사저널>의 끈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맨 처음 검토한 자료는 한미연합사 상황 보고서. 사고 발생 2시간 만에 연합사 한국측 최고 책임자(김동신 부사령관)까지 일사 천리로 결재가 난 자살 상황 보고서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군 수사팀은 시신이 발견된 지 4시간 후에 현장에 도착했다. 이는 곧 사고 발생 직후 현장을 장악한 누군가가 임의로 자살 보고를 올렸음을 뜻한다. 다음날이 대통령 취임식인 데다, 연합사 한국측 지휘 책임자가 이미 차기 육군 참모총장 물망에 올라 있는 상황과 관련해 시사하는 대목이 많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 김 척 장군은 연합사 틸럴리 사령관과 차기문 부참모관, 미8군 참모장 등을 접촉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했다. 김장군이 진상 파악 작업에 나서자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으려던 군 당국은 뒤늦게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기자와 김장군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수사는 매우 형식적이었다. 소대원 전원을 모아 서로 상의하며 진술서를 작성하게 함으로써 알리바이를 맞춰 준 점, 초동 수사도 끝내지 않은 채 사건 현장을 치워 버린 점, 타살 방향 혐의를 캐자면 반드시 실시했어야 할 소대원 지문 채취 및 화약 반응 검사를 실시하지 않은 점 등이 확인되었다.

당시 기자는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뒤 수사 책임자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수사 중인 사안인데다 안보 민감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기사화하지 말고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약 2주일 간의 취재 끝에 <시사저널>은 제443호(4월13일자)에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에 대한 첫 보도를 내보냈다. 타살 상황에 대한 수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보도였다.

계속된 추적을 통해 헌병대 수사가 여전히 김중위의 자살 동기를 캐는 데에만 집중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물론 헌병대도 형식적으로는 부소대장 김중사를 용의선상에 올려 놓고 있었다. 타살 동기까지는 접근하지 못했어도 알리바이가 맞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몇 차례씩 소환 조사를 벌였던 것이다. 수사팀은 그에게 거짓말 탐지 실험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대원 전원을 모아놓고 서로 상의해 작성토록 한 진술서를 토대로 모든 소대원의 알리바이는 간단히 맞추어졌다.

객관적이고 철저한 수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김장군과 기자는 이후 군 수사팀에 의존하지 않고 타살 동기를 직접 캐기 시작했다. 기자는 부대측이 유족에게 넘겨준 김 훈 중위 유품을 정밀 분석하기 시작했다.

김 훈 중위 유품에 감춰진 비밀

김중위 유품에서는 놀라운 사실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한국군 부대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엄청난 군기 문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요지의 소대원들 편지와, 김 훈 중위 근무 일지에 기록된 충격적인 부대 실태가 그것이었다. 김중위 메모지에는 실탄 은닉, 총구 위협, 실탄 판매 실상, 총기 장난, 술 먹고 초소 근무를 하는 실상 등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시사저널>은 제 445호(5월7일자)에 이같은 김중위 자필 메모와 소대원의 편지를 4쪽에 걸쳐 보도하고 이를 김중위 사건 수사에 적극 활용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수사팀은 이를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당시 기자가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었다. 김중위 유품 중에는 북한군 접촉 실상과 적 2초소까지 넘어가는 실상(이름은 없지만 훗날 구속된 김중사를 지칭한 듯), 그리고 적과 내통하는 사람을 모두 영창에 보낸 뒤 소대원 전체를 교체하려고 했음을 보여주는 메모가 있었다. 그러나 <시사저널>은 당시 이런 내용을 사진으로 싣고도 주목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kpa라고 적힌 영문이 북한 공작조를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4월29일 벽제에 있는 1군단 사령부에서 한·미 합동 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다. 결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살’이었다. 국방부 출입 기자단과 함께 발표 현장을 찾은 기자는 질의 응답 시간에 수사 책임자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김중위 유품 속에 든 메모를 확보했느냐는 것이었다. 수사 관계자는 입수하지 못했고, 그 대신 소대원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벌였더니 부대 내에서 아무 문제가 없이 잘 근무했다는 진술이 나와 타살 동기는 없었다고 답변했다.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날 수사 발표장은 주권 국가 국민으로서 수모감을 떨칠 수 없는 현장이기도 했다. 한국 국방 당국 대표로 나온 셈인 국방부 인사국장은 ‘오늘 수사 발표 후에도 남는 의혹이 있다면 계속 수사하도록 미군과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군 수사대 대표로 나온 워잭 중령은 말미에 한국 국방 당국의 약속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모든 수사는 끝났으며 미군 서류도 넘겨줄 수 없음을 주한 미군 사령관 이름으로 확언한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시사저널>은 이날 발표된 수사 결과와 함께 철저한 재수사 필요성을 촉구하는 기사를 제447호에 실었다.

이때를 전후해 국회 국방위 하경근 의원이 김 훈 중위 의문사 진상 규명에 가세했다. 그는 ‘김 척 장군의 청원서와 일련의 <시사저널> 보도를 보고 `뭔가 중대한 비밀이 숨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후 <시사저널>과 김장군, 그리고 국회 국방위 소위는 사실상의 공조 작업에 들어갔다. 6월 들어서는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가세했다.

미군측, 왜 노여수 박사 소견 무시했나

대부분의 신문 방송이 이런 상황을 철저하게 외면했지만 공조팀의 노력은 결국 육본 검찰부의 재수사를 끌어냈다. 그러나 당초부터 재수사는 1차 수사 결과를 토대로 유족이 제기하는 의문점을 해명해 주기 위한 수사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 척 장군은 놀라운 집념을 발휘했다. 국내 법의학계가 권총 사건 사망자를 부검해 본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을 우려해 권총 사고가 많은 미국의 법의학 전문가를 물색했다. 미국 뉴욕 주 정부 소속 법의학자로 권총 사건 사망자를 부검한 경험이 수백 회에 이르는 루이스 에스 노(한국 이름 노여수) 박사를 찾아내 자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7월 들어 국회 국방위와 유족이 입수한 모든 수사 관련 자료와 <시사저널> 보도 자료 등이 노박사에게 넘어갔다. 이를 면밀히 분석한 노박사는 자살로 교묘히 위장된 타살자 시신의 전형이라는 소견을 내놓았다. 이는 김중위 의문사 사건 규명 과정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8월 말 노박사가 김중위 유족과 천주교 인권위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국내에서 더 많은 부검 자료와 사진·비디오 테이프 등 김 훈 중위 사망 관련 초동 수사 기록을 검토한 끝에 `‘미국 법의학 면허를 걸고 김중위 부검 결과가 타살 시신임을 재확인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그제서야 중앙 일간지들은 이런 사실을 짧게 보도했다.

그러나 군 검찰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노박사의 소견을 공식 수사 자료로 삼지 않고, 그에 대한 참고인 조사만 벌였다. 김중위 시신을 부검했던 군의관은 노박사에게 호되게 비판을 받았다. 당초 미군측은 한국에 자신 있게 다른 의견을 내놓을 전문가만 있으면 법의학적 소견을 얼마든지 토론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미군측은 정작 노박사가 한국을 방문하자 `‘상부에서 만나지 말라고 지시한다’면서 끝내 토론을 기피했다.

<시사저널>은 제464호를 통해 노박사의 소견과 이에 대한 군 검찰의 소극적 수사 태도 등을 보도했다. 마침 서울방송(SBS)의 간판 다큐멘터리 프로인 <그것이 알고 싶다>가 그동안 네 차례에 걸친 <시사저널> 보도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다(9월13일). 이 프로그램은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황한 군 당국은 보도를 막기 위해, 서울방송에 현역 장성을 보내 제작 과정에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9월 하순께 <시사저널>과 유족측은 오랜 추적 끝에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건 현장에 있던 권총이 김 훈 중위 본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를 군 검찰에 들이대자 수사 책임자는 `‘충격적이다. 당연히 김중위 것으로 보고 조사를 못했다’고 밝혔다. 얼마 후 나온 군 검찰의 답변은, `‘부대에서는 그 날 김중위 권총이 고장 나서 다른 사람 총을 가져갔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 검찰도 진정한 수사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공동 추적팀은 결국 조사 결과를 독자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로 했다. 보도는 <시사저널>이, 국정 수렴과 대국민 발표는 국회 국방위원회가 담당하기로 했다.

소대원 입을 통해 나온 놀라운 사실들

이후 김장군과 <시사저널>은 사건 현장에 있다가 전역하거나, 다른 부대로 전출한 병사들을 직접 접촉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김장군 유족들이 수차례씩 만나 설득하고, 국회가 신변 보장을 약속한 뒤에야 놀라운 진술들을 하나둘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런 증언을 통해 김 훈 중위 부하인 판문점 경비대원들이 불법으로 대북 접촉을 해온 실상을 파악했고, 변용관 상위 귀순과 김 훈 중위 의문사에 상당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용의선상에 오른 김중사의 불법 월북 활동 실상이 드러났고, 김 훈 중위가 사망하기 전 이들을 징계하려고 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사저널>은 이들을 두세 차례씩 연쇄 접촉해 녹취를 마치고, 11월19일에 마지막으로 전방 모 부대에 전출한 현역 사병을 만나 확인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취재 내용이 국가 안보와 관련해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공동 추적팀의 요청에 따라 보도를 자제했다. 이 내용은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에 수렴되었다.

대신 <시사저널>은 제474호(11월26일자)를 통해 국방위 소위의 진상 규명 일정을 소개하고, 끊이지 않는 군대내 의문사 의혹을 다루었다. 김 훈 중위 외에도 올해 들어서만 3명의 육·해군 장교가 의문사했고, 30여 명에 이르는 군대 의문사 유족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진정을 내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시사저널>은 이들 유족을 국회 국방위원들에게 연결해 주기도 했다.

12월3일부터 그동안의 공동 추적 결과를 바탕으로 국회 국방위 소위의 비공개 회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전 1주일 동안 기자는 ‘비공식 전문위원’ 형태로 소위의 작업을 도왔다. 그 결과 사건 관련 용의자 김중사가 비밀리에 체포되었다. 12월 8일 <시사저널>은 비로소 그동안 공동 추적팀이 진행해 온 활동 내용을 커버 스토리로 공개했다.

‘김 훈 중위 의문사 원점에서부터 재조사’ ‘군대내 모든 의문사 진상 규명’ ‘판문점 경비 체제 대수술’. 보도 뒤 채 1주일도 안되어 쏟아져 나온 정부 대책들이다. <시사저널>은 앞으로도 공조팀과 함께 이 사건이 한 점 의혹 없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추적할 계획이다.

丁喜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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