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국민국가 개념은 세계화와 지방화라는 대립적인 장력에 끌려 크게 흔들리고 있고, 그 틈새를 정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세력’이 빠르게 메워나가고 있다. 바로 시민사회단체다. 비정부기구인 시민사회단체는 삶의 현장인 지역에 뿌리를 두되 지구촌 곳곳의 다른 단체와 연결돼 세계화·지구화된 거대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도 이런 물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더욱이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는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를 고발·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21세기에 들어서려는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단체는 스스로 변화해야 할 시점에 서 있기도 하다. 이 시리즈는 1부에서 해외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현상을 진단하고 안팎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는 등 한국 경제가 부도위기에 몰렸던 97년 12월. 주미 한국대사관 총무과는 `다른 일’로 바빴다. 97년 예산 가운데 사용하지 않은 `불용예산’ 처리 때문이었다. 불용예산을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 다음 예산 책정때 예산삭감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연말까지 이를 죄다 사용해야 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이 불용예산으로 화랑에서 그림을 구입해, 대사관내 사무실에 나눠줬다. 국가 예산낭비의 한 예다. 낭비되는 예산이 어디 불용예산뿐이며, 그런 일이 어디 주미 대사관에서만 일어났겠는가?

이런 일이 미국서 일어났다면, 정부예산 집행을 샅샅이 감시해온 시민단체 `정부예산 낭비감시 시민연대'(낭비감시)의 안테나에 걸려 영락없이 폭로되고 말았을 터였다. (왜 이제야 이를 보도하느냐고 책망한다면 달리 변명할 길이 없다.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낭비감시’처럼 정부와 의회의 예산낭비만을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활발한 시민단체가 있다면, 이런 사실은 쉽게 언론에 노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84년 출범 당시 5천명 정도의 회원밖에 없었던 `낭비감시’는 지금 미국 전역에 60만명의 회원을 갖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1년 예산이 200만달러(약 24억원)에 이르는 이 시민단체의 워싱턴 본부 사무실에는 전문지식을 가진 26명의 풀타임 직원들이 사방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낭비의 실체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낭비감시’는 사무실 전화번호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영어활자로 나열해서 보여준다. `분노하라'(BE ANGRY)가 바로 그것이다. 납세자들의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행정부와 의회에 대해 납세자들이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분노가 있어야 낭비를 없애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고,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세금을 내고 난 뒤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이를 감시하고, 낭비를 고발하고, 그 낭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저 돈이 모두 내 돈”이라는 자각과 그 `내 돈’이 함부로 낭비되는 것에 “머리끝까지 치미는 분노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낭비감시’의 창립 배경에는 이처럼 납세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절박함과 예산책정과 집행에 기업의 합리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낭비감시’를 창립한 인물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시 정부낭비 사례를 조사한 피터 그레이스와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이다. 47권, 2만1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그레이스 보고서’는 지금도 정부낭비의 실체를 속속들이 파헤친 보고서의 고전으로 꼽힌다. 26센트짜리 나사를 91 달러에, 7달러짜리 망치를 436 달러에 구매한 국방부의 어처구니없는 구매낭비를 폭로해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바로 그 보고서다. 그레이스와 앤더슨은 시민단체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미국 정부와 의회의 낭비와 비효율을 제거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낭비감시’를 출범시켰다.

이 단체의 강점은 낭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 이를 미국 국민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점이다. 26명의 전문지식을 가진 직원들은 정부 예산과 의회의 예산책정 과정을 면밀하게 연구 감시하면서 낭비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를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치밀한 홍보전략을 구사해왔다.

특히 의회의 예산책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혜성 예산’을 샅샅이 파헤친 보고서인 `돼지 장부'(특혜성 예산을 지칭하는 영어속어인 `포크’가 원래 돼지고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함)는 1년에 한번씩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를 발표할 때 `낭비감시’는 돼지 한 마리를 기자회견장에 끌고 나와 `돼지 장부’의 상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화당 중진의원이며, 2000년 대선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는 존 매캐인 의원은 “모든 미국인들이 꼭 읽어야 하는 필독의 보고서”라고 극찬했다.

`돼지 장부’ 외에도 1년에 네 번 나오는 계간지 `낭비감시’에는 예산낭비의 실체 외에 예산지출 심의를 제대로 하는지를 평가한 의원 성적표도 실린다. 미국 언론들은 이 성적표를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인다.

이밖에도 낭비가 적발될 때마다 `긴급 낭비보고서’를 발표해 사회적 쟁점화를 시도한다. 국방예산 절감을 위해 국방부가 기지폐쇄를 발표하면, 폐쇄대상 기지가 있는 지역구 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기지폐쇄 반대운동을 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낭비감시’는 그때마다 의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그들의 예산낭비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낭비감시’는 그 감시활동으로 수많은 기지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을 지금도 가장 큰 공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워싱턴/정연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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