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 선·후진국, 유전자 조작 상품 놓고 공방 치열…
안정성 평가·관리 기술 못갖춘 한국’무방비’
“신화(神話)는 시공을 초월한 사건에 관한 얘기이지만, 우리들은 오늘날 … 얼마나 치열하게 시공을 초월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고 있는 것인가.”(김열규, <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토마토는 서리에 약하다. 이것을 추위에 잘 견디게 만들 수는 없을까’. 생명 공학 자의 상상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가자미는 어떨까. 시린 바다에서도 끄떡없는 놈들에게는 추위에 강한 유전자가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상상은 실천에 옮겨진다. 실제로 북극에 사는 과학자들은 가자미로부터 떼어낸 항(抗) 빙결 유전자를 토마토에 주입해 서리에 강한 토마토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젖소에서 짜낸 우유에 사람 모유와 똑같은 면역 성분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환상적일까’. 생명공학자는 다시 상상을 실천에 옮긴다. 원리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여성의 염색체에서 모유 면역 성분을 만드는 유전자(락토페린 유전자)를 분리한 다음 이를 젖소 수정란에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이른바’락토페린 분비 젖소’라 불리는 이 젖소는 지난 91년 네덜란드 파밍연구소에서 처음 태어났다. 한국의 생명공학연구소(소장 변광호) 또한 96년 락토페린 분비 젖소 ‘보람이’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전자 조작 상품 시장, 2002년께 2천억 달러 규모
신화적 상상력으로 보자면 생명공학이 지난 20여 년 동안 거둔 성취는 경이롭기 그지없다.
스핑크스나 그리핀 같은 반인 반수(半人半獸) 괴물을 신화 속에서 창조했던 고대인도 반초 반어(半草半魚)·반균 반초(半菌半草; 세균에서 유전자를 떼어내 식물에 주입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생물체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같은 성취는, 인간이 유전자 조작 기술이라는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얻은 덕분에 가능했다. 70년대 초반 유전자를 마음대로 잘라 내고 이어 붙일 수 있는 기술을 과학자들이 찾아내면서 인간은 신화 속으로 성큼 다가섰다(19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신화를 떠난 현실은 냉엄하다. 먼 옛날 고대인이 신화를 창조한 원동력은 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꿈꾸는 생명공학자’를 밀어붙이는 힘은 자본과 국가에서 나온다.
‘유전자를 지배하는 자가 21세기를 지배한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말은 단순한 엄포용 경구가 아니다. 오는 2002년께면 2천억 달러(약2백60조원)라는, 천문학적인 시장 규모를 이룰 것으로 추정되는 생명공학 산업을 놓고 전세계는 이미 ‘유전자 전쟁’에 돌입했다.
여기에서 전쟁이란 유전자 조작 생물체를 둘러싼 전쟁을 말한다. ‘엘엠오(LMOs; Living Modified Organisms)’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유전자 조작 생물체는 유전자를 변형하거나 재조합해 만든 식물·동물·미생물을 뭉뚱그려 일컫는 용어이다.
제1차 유전자 전쟁은 기업과 시민 사회 사이에 벌어졌다. 9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의 환경·소비자·종교 단체는 유전자 조작 생물체가 인체와 생태계, 인류 미래에 끼칠 위험을 강도 높게 경고해 왔다(20쪽상자 기사 참조). 이들은 미국의 뒤퐁·몬산토, 스위스 노바티스 사같은 거대 생명공학 기업들을 상대로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생명공학 안전성 의정서’ 채택 눈앞에
제2차 유전자 전쟁은 바야흐로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공학 기술 선도국과 후진국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이다. 오는 2월 유엔에 속한 1백70여 나라는 콜롬비아에 모여 ‘생명공학 안전성의정서’를 채택한다. ‘유전자 조작 생물체의 국가간 이동에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 의정서 채택을 앞두고 선진국과 개도국은 벌써부터 치열한 탐색전을 펼치고 있다.
생명공학 안전성 의정서 구상은 유전자 조작 생물체가 환경에 미칠 잠재적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명분에서 출발했다. 그렇지만 의정서 이면에는 생명공학 산업을 둘러싼 국가간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생명공학연구소 변광호 소장의 지적이다.
의정서를 바라보는 국가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생명공학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부류이다.
인도·말레이시아·서아프리카 국가 등 개도국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국가는 유전자 조작 생물체가 인체나 생태계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마련될 때까지 이들 제품을 수입하는 데 엄격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유전자조작 식품 수입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생명공학 기술이 발달한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유전자 조작에 대해 대중적 거부감이 강한 스웨덴·덴마크 등도 규제를 강화하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부류이다. 미국·일본·호주·뉴질랜드 같은 생명공학 기술 선진국이 중심을 이룬 이 부류는 현행 자국법만으로도 안전성 확보는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의정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한 이들 나라의 규제 노하우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목표는 한 가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97년 말 현재 옥수수·면화·유채·토마토·콩 등 48개에 이르는 유전자 조작 작물을 상품화해 수출하고 있는 선진국은 다른 나라의 무역 장벽을 낮추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개도국은 생물 다양성 보호라는 명분 아래 자국 생명공학산업을 보호·육성하는 방향으로 협상 전략을 짜고 있다. 이를테면 선진국의 규제 완화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대가로 생명공학 기술이전을 요구하는 식이다. 선진국의 ‘생물 투기꾼’들에게 유전 자원(상업적으로 쓸 만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동식물)을 뺏겼다고 주장하는 일부 개도국은 선진국이 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이 국가간 유전자 전쟁을 비켜 갈 길은 없다. 다시 말해 오는 2월 채택될 의정서에 가입하지 않으면 한국은 유전자조작 생물체를 수입할 길도, 수출할 길도 막막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실태는 어떠한가. 산업자원부는 지난해 6∼9월 정부 차원에서는 최초로 유전자 조작 생물체 수출입 현황을 조사했다. 그러나 작업이 끝나고 두달이 넘도록 산업자원부는 조사 보고서(<생명공학 제품 및 변형생물체의 수출입 현황 등에 관한 연구>)를 공개하지 않았다.
98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유전자 조작 작물이 아직 수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부측 답변이었던 만큼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보고서는 ‘이르면 96년말부터’ 한국이 이미 유전자 조작 콩·옥수수 따위를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 시기뿐 아니라 규모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보고서 대로라면 97년한 해 수입 콩으로 만든 간장·된장·식용유 따위를 먹은 사람 4명 가운데 1명은 유전자 조작 식품을 맛본 셈이다. 수입 콩 가운데 24.9%가 미국산 유전자 조작 콩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97년 당시 한국은 콩 1백57만t을 수입했는데 그 가운데 82.9%를 미국에서 들여왔다(한국의 콩 자급도는 8.6%에 불과하다).
옥수수가 들어간 과자·식용유·마가린 따위를 먹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보고서는 전체 옥수수 수입량(약 8백32만t) 가운데 12.6%가 미국산 유전자 조작 옥수수일 것으로 추정했다. 면화 또한 97년에 미국산 유전자 조작 면화가 1백60t 가량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면화의 대미 의존도는 1% 안팎으로 미미하다.
이번 보고서는 유전자 조작 생물체 수입 현황을 ‘통계’ 아닌’추정치’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 보고서 작성을 주관한 생명공학연구소는, 애초에 상품 분류 코드(HS코드)로 수입 현황을 조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한국이 유전자 조작 생물체에 대해 코드 번호를 따로 부여하지 않고 있는 바람에 실패했다.
생명공학연구소가 다시 시도한 방법은 개발 회사·상품명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 동식물 수입 물량을 역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수출국이 무역협회에 제시한 자료, 국립식물검역소가 발행한 식물 검역증과 국내 검사 합격증 어느 것으로도 추적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옥수수·콩 따위 곡물은 메이저 곡물 회사들이 유전자 조작 품종과 재래 품종을 한데 섞어 가공·수송·저장하기 때문에 추적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한국, 수입 현황도 제대로 파악 못해
결국 생명공학연구소는 미국·캐나다 등 주요 곡물 수출 국가와 몬산토 사가 매년 발표하는 ‘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면적 비중’자료를 토대로 수입 물량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예로 미국대두협회는 지난 97년 미국 콩 재배 면적의 30%, 옥수수 재배 면적의25%, 면화 재배 면적의 40%에서 유전자 조작 작물을 재배했다고 밝혔다.
결국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 소비하는 유전자 조작 생물체의 수입·유통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생명공학연구소 장호민 과장(정책기획과)은, 유전자 조작생물체에 대해 상품 분류 코드와 검역 지침을 따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환경정책평가연구원 박용하 박사는 이에 못지 않게 시급한 과제로 안전성 평가·관리 기술 확립을 꼽았다. 유전자 조작 생물체의 수입실태를 파악한다 해도 그 안전성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면 한 국가의’보건 주권’은 무너진다는 이유에서다. 만의 하나 미국산 유전자조작 콩에 문제가 생겼다 해도 그 콩을 제조한 회사에 안전성 검사를 다시 의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국내 생명공학안전성 평가·관리 기술 수준은 선진국의 20%에 불과하다).
수출 쪽으로 눈을 돌려도 이 같은 기술의 확립은 시급하다. 국내에는 아직 상품화한 유전자조작 동식물이 없다. 그렇지만 인공 씨감자·락토페린 분비 젖소(생명공학연구소 개발), 모자이크 바이러스 저항성 담배(한국인삼연초연구원 개발) 따위는 1∼2년 사이에 상품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품목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들을 수출 품목으로 적극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안전성 평가·관리기술 확립이 절실하다는 것이 박용하 박사의 지적이다. 생명공학안전성 의정서가 채택되면 수입국이 요구하는 안전성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유전자를 조작한 미국 콩과 한국 콩이 있다면 수입국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안전성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한국은 생명공학 이류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라고 변광호 소장은 말한다.
물론 유전자 조작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모든 논의는 개량주의로 비칠 수 있다. 그럼에도 식량 자급도가 30%에 불과한 한국 현실에서 수입선을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 한 유전자 조작 식품의 유입은 피할 길이 없다(유전자 조작 동물은 아직 실험용 쥐 정도만 수입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면적은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이다. 96∼97년 한 해 동안 이 작물을 재배하는 면적은 7백만 에이커에서 3천1백50만 에이커로 4.5배 가까이 늘었다. 더욱이 한국이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는 곡물 수입국 미국은 같은 기간 유전자 조작작물 재배 면적이 가장 극심하게 변한 나라이다(5.6배 증가).’생명공학을 키우는 것은 풍부한 상상력’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전지구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유전자 전쟁은 이 같은 낭만이 끼여들 틈조차 주지 않는다. 신화를 꿈꾸기에는, 인간은 신의 땅을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다.
金恩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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