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통과 규제개혁 법안 2백88건 중 1백14건 변질 … 일부 법안 상정조차 안돼
규제개혁이 국회에서 변질되고 있다. 정부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자찬하며 냈던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누락되거나 내용이 크게 훼손됐다. 상임위의 심사과정에서 관련 이익단체의 치열한 로비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부처의 이기주의가 작용한 때문이다. 국회는 여전히 ‘철밥통’ 수호신인가?
△무엇이 바뀌었고 문제는 뭔가=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정기국회와 지난 7일 끝난 199회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규제개혁법안 2백88건 가운데 애초 개혁취지에서 크게 후퇴한 법안이 12일 현재 50개, 규제건수로는 1백14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더구나 변호사 징계권의 정부 환수를 명시한 변호사법을 포함한 각종 사업자단체법 등 66개 법안은 해당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해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그대로 남아 있는 규제건수가 9백여건이 넘는 것으로 규개위는 보고 있다.
규개위가 특히 ‘변질정도가 심한’ 것으로 꼽고 있는 법안은 증권·선물거래법(개정), 공중위생관리법(제정),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개정) 등 4개.
증권거래법·선물거래법 개정안은 정부 권한의 축소·유지를 놓고 규개위와 재경부가 법안 제출전부터 논란을 벌여왔던 내용. 개정안은 애초 증권거래소·선물거래소의 이사장과 상임감사에 대한 재경부 장관의 임명 승인권을 폐지하는 것이었으나,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위원장 김동욱·한나라) 통과 과정에서 되살아났다.
재경위는 “국가 공공기관은 국회가 감시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 기관을 국정감사 대상에 넣어 인사·경영에 간섭할 여지를 남겨두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재경부 관료들도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경위는 또 은행법 개정안에도 손을 대, 애초 금융기관의 유가증권 포괄범위에 사채를 뺀 원안을 다시 사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고쳤다.
이 과정에서 사채관리를 빌미로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을 놓지 않으려는 재경부 관료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규개위는 이밖에도 상호신용금고법·신용협동조합법·종합금융회사법·예금자보호법 등 재경부 관련 법안 가운데서 9건이 국회 통과 과정에서 원안과 달리 바뀐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규개위가 최종 폐지키로 한 행자부 소관 규제들도 이번에 대거 부활했다. ‘필요시 시·도 조례로 정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장려하려고 폐지키로 했던 옥외광고물관리법상 광고제한 조항이나, 건전한 모금활동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폐지키로 했던 기부금품모집규제법 등이 그것.
특히 기부금품모집규제법상 ‘허가없이 모집 금지’ 조항은 시민단체들이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어서 앞으로 거센 논란이 예상된다.
해당 행정자치위원회(위원장 이원범·자민련)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만 되풀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중위생관리법은 기존 공중위생법을 폐지하고 대체법안으로 만든 것인데, 애초 규개위가 없애기로 했던 숙박업소·목욕탕·미용실 등 공중위생업소의 시설기준이 국회 심의 과정서 다시 삽입됐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위원회(위원장 김찬우·한나라)는 “시설기준을 없애면 퇴폐업소들이 주택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고, 소비자단체들도 이런 부분에 대해선 동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업소 설립신고제를 통보제로 완화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지난해말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목요상·한나라)를 통과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애초 존치키로 했던 ‘해고의 제한’(30조), ‘해고의 예고’(32조) 조항에서 노동부 장관의 사전 승인·인정을 받도록 한 내용이 빠진 것.
이에 따라 사용자는 천재·사변 등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 노동부 장관의 인정 없이 해고할 수 있고, ‘노동자가 고의로 사업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재산상 손해를 끼친 경우’에도 장관의 승인 없이 해고할 수 있게 됐다.
노동계는 이에 대해 “노동부령으로 구체적으로 정하게 돼 있는 해고 요건을 너무 포괄적으로 확대해 가뜩이나 실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불리한 처지로 몰릴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체육시설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문화관광위원회(위원장 이협·국민회의)를 통과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규개위는 소규모 체육시설의 활성화를 꾀한다는 취지에서 애초 볼링장·테니스장·롤러스케이트장·체력단련장·에어로빅장·당구장·썰매장·골프연습장·탁구장 등 9개 체육시설업의 신고의무를 폐지키로 했으나, 문화관광위는 탁구·롤러스케이트장을 뺀 7개 시설의 신고의무를 그대로 유지키로 했다.
△잠자고 있는 규제개혁 법안들=변호사·회계사·세무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단체가입 의무조항을 명시한 각종 사업자단체 개혁안은 해당 상임위와 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상태.
재경위는 지난달말 이들 전문직 사업자단체의 복수설립허용 등에 관한 관련법 개정안 심의를 유보한 채 시간만 끌고 있고, 보건복지위도 의사·약사 사업자단체 관련 법안 심의를 반대청원에 부딪혀 시작도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재해구호법, 수도법 등이 아직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규개위 방침=아직 국회에 계류중인 규제개혁 법안 69건과 이번 국회에서 변질된 법안들을 2월 임시국회에서 정부 원안대로 통과되도록 강력히 밀어붙인다는 입장. 규제개혁을 이제 막 시작한 마당에 처음부터 국회에 밀리면 규제개혁은 물건너 간다는 판단 때문이다.
/ 배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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