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에 남겨진 의문들
노동자세계 1/28
1월 21일, 프랑스의 르 몽드 신문은 코소보 특파원이 쓴 한 기사를 게재했다. 그 글은 코소보의 미국 대리인인 윌리엄 워커 등이 유포한 1월 18일의 학살에 관한 이야기에 회의를 표하고 있다. 르 몽드 지의 보도에 따르면 세르비아 경찰의 당시 작전은 국제 감시단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되었고, 학살은 마을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코소보 해방군(KLA)의 전투 조직과 관계있는 어느 산간 마을에서 벌어졌다. 또한 시체 주위에서 핏자국과 탄피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들이 다른 어떤 곳의 전투에서 살해된 후 코소보 해방군에 의해 선전용으로 한데 모아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전했다. 다음은 1월 21일 목요일에 올린 기사의 번역문이다.
라챠크의 시신들 : 정말로 그들은 냉혹하게 학살되었는가? 그 사실에 관해 코소보인들에 의해 유포된 설명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베오그라드 당국은 스물네구의 시신은 전투중 사망한 코소보 해방군의 테러분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어떤 국제적 조사도 거부하고 있다. 당시의 경찰 작전을 촬영한 한 필름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의 설명에 모순점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프리슈티나(코소보)에서,
르 몽드 특파원 크리스토프 샤틸로
라챠크의 학살은 어느 정도 너무 완벽하지 않은가? 르 몽드는 1월 18일 월요일에 벌어진 참상의 사실 여부를 의심케하는 몇몇 새로운 증언들을 확보했다. 시체 더미들은 지난 금요일 (15일) 세르비아 보안군에 의해 즉결처분된 수십명의 알바니아인들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희생자들은 코소보 해방군이 말한 대로 잔혹하게 살해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세르비아 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전투중 사망한 것일까?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의 코소보 휴전 감시단(KVM: Kosovo Verification Mission)에 의해 보도진에 배포된 자료에 따르면, 학살은 1월 15일 이른 오후에 자행되었다. 그 날 아침 유고슬라비아 군의 탱크에 포격된 라챠크 마을에 “복면을 한” 세르비아 경찰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가정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여자들을 집 안에 머무르게 하고 남자들을 마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쐈다. 그전에 희생자들을 고문하고 몇몇의 팔다리를 자른 것은 물론이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그들의 더러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노래
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그 지역을 떠난 것은 오후 3시 30분 경이었다.
라챠크의 경찰 작전을 촬영한 에이피 텔레비전(Associated Press TV)의 두 기자의 설명은 이상의 이야기에 모순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오전 10시 그들이 경찰 장갑차의 뒤를 쫓아 그 지역에 들어갔을 때, 그 마을은 사실상 버려진 상태였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숲 속에 숨은 코소보 해방군들의 사격을 받으며 그들은 거리를 따라 나아갔다. 전투 내내 이러한 총격전이 다소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주전투는 숲 속에서 벌어졌다. 알바니아인들은 새벽에 세르비아인들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마을을 도망쳐 숲에서 안전한 곳을 찾으려 했다. 거기서 그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있던 세르비아 경찰과 맞부딪히게 되었다. 코소보 해방군은 협공에 걸린 것이다.
금요일, 경찰이 맹렬히 공격한 곳은 알바니아계 코소보 해방군 독립부대(?)의 요새였다. 거의 모든 주민들이 1998년 여름 세르비아인들의 강력한 공세 동안에 라챠크에서 도망쳤다. 소수의 예외를 빼고는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두 개의 굴뚝에서 연기가 날 뿐” 이라고 에이피 텔레비전(APTV)의 기자들은 전한다.
세르비아인들의 작전은 이제 놀랍지도, 비밀스럽지도 않았다. 공격 당일 아침, 경찰의 한 취재원은 에이피 텔레비전에 이런 정보를 흘렸다 : “라챠크로 가보라, 거기서 뭔가 벌어질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취재팀은 현장에 있었다. 마을쪽으로 돌출한 산마루에서, 그리고 거리에선 장갑차 뒤에서 경찰을 따라다니며 촬영을 계속했다. 유럽 안보 협력 회의 역시 그 작전에 대해 미리 연락받았다. 최소한 두 팀의 국제 감시단이 마을 일부를 볼 수 있는 언덕에서 전투를 지켜보며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경찰이 떠난 후 곧 라챠크에 들어갔다. 그들은 민간인 부상자들이 있었는지 몇몇 알바니아인들에게 질문하며 상황을 조사했다. 오후 6시가 되어가면서 그들은 스팀제라는 인근 마을의 병원으로 다른 네명의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매우 경미한 부상을 입은 여인 둘과 두 노인이었다. 감시단 측은 당시 “그날 전투에서 부상자들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세르비아 경찰이 이번 작전에 대해 보인 반응은 격렬했다. 오전 10시 30분에 첫 기자 회견문이 나왔다. 경찰 측은 여기서 지난 일요일 “한 경관을 살해한 일단의 테러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라챠크란 마을을 포위했다”고 밝혔다. 오후 3시, 네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전투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정하는 첫 속보가 들어왔다. 그 다음 날인 토요일, 경찰은 작전의 성공을 자축했다. 경찰 측 추산에 의하면 그 작전에서 십여명의 코소보 해방군 테러분자들이 사살되었고, 중요한 무기 은닉처가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인 경관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알바니아인 한명을 체포하고자 했던 시도는 학살로 끝을 맺었다. 오후 3시 30분, 험준하고 거친 지형에 엄폐한 몇 명의 코소보 해방군들의 산발적인 사격을 받으며 경찰은 그 지역을 떠났다. 그리고 나서 바로 안전한 곳에 숨어있던 알바니아인 생존자들이 마을로 돌아왔고, 세 대의 코소보 휴전 감시단 차량이 뒤따랐다. 경찰이 떠난 한 시간 후 어둠이 깔렸다.
코소보 해방군의 안내
그 다음날 아침, 코소보 휴전 감시단과 보도진이 전투 피해 상황을 집계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다시 점령한 코소보 해방군의 무장 병력들에 의해 그들이 문제의 수로로 인도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대부분이 남자인 20여구의 시신이 거기에 쌓여 있었다. 그날 정오 무렵, 감시단장인 미국 외교관 윌리엄 워커가 직접 현장에 나타나서, “세르비아 경찰과 유고슬라비아군”의 잔학성에 대해 분노를 표했다.
비난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은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세르비아 경찰은 상당한 수의 남자들을 한데 모아 처형 장소로 뎨려갈 수 있었는가? 그들은 코소보 해방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사격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그 수로-라챠크 마을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음-는 지역 주민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들은 마을 주위를 훤히 알고 있었고, 그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그렇게 조그만 마을에 두 시간 이상 머무른 감시단의 눈을 피할 수 있었는가? 왜 시체 주위에서는 탄피와 핏자국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가? 2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머리에 수발의 직격탄을 맞고 살해된 걸로 추정되고 있는데 말이다. 세르비아 경찰과의 전투에서 죽은 알바니아인들의 시체가, 여론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분명한, 그런 참혹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그 수로에 한데 모아졌다는 설이 좀더 그럴 듯 하지는 않은가? 이 폭력과 베오그라드가 반응한 그 신속함-코소보 휴전 감시단장 워커에게 48시간 안에 유고슬라비아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은 그 자체로 유고슬라비아 당국이 자신들의 설명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가?
오직 국제적 조사만이 이런 모든 의심스러운 점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의 핀란드와 벨로루시의 검시 전문가들이 유고슬라비아 의사들과 함께 이번 부검에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문제는 베오그라드 당국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한번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던데 있다. 왜인가? 조사단의 결론이 무엇이든지 간에 라챠크의 학살은 코소보 위기의 해결이 곧 찾아오리라는 기대가 상당한 착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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