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효과 의심되는 빅딜 반대”, “재벌개혁에 반하는 빅딜 중단”, “노동자 생존권 위협하는 빅딜 결사반대”. 요즘 뒷유리에 이런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승용차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빅딜 대상에 포함된 기업의 노조원이나 직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도 수긍하는 눈치다.
정부가 재벌개혁의 전부라도 되는 양 침이 마르게 강조했던 5대 재벌간 빅딜이 진통끝에 성사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여론이 곱지 않다.
최근 현대전자의 LG반도체 합병,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 등 굵직굵직한 ‘거래’가 진행되면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탓이다.
일각에서 빅딜의 첫번째 문제로 제기했던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재벌들의 ‘버티기 시장원리’를 더이상 묵과해선 안된다는 여론에 힘입어 일단 해소된 듯하다.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이나 시민사회단체들도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조심스러우나마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대상 업체의 선정 잣대가 공정했느냐는 것. 합병이나 맞교환이 얼마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지도 의심된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대우전자·엘지반도체 등 빅딜 대상 업체들이 ‘희생’의 댓가로 정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을 것으로 보여, 부실 대기업에 또다시 특혜를 주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 해당기업들의 고용승계도 매끄럽지 않고, 정부도 효과적인 실업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빅딜로 인한 추가실업이 큰 사회문제로 번질 가능성마저 높은 실정이다.
△업체 선정 석연찮다=국내 반도체업체 빅딜 평가작업을 맡았던 경영컨설팅업체 아서디리틀(ADL)이 지난해말 반도체사업 통합법인의 경영주체로 현대를 낙점했을 때 LG는 거세게 반발했다. ADL쪽이 평가기준·방법에 대한 사전 합의와 실사·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은 물론 당사자가 빠진 채 실사가 진행됐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LG의 반발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자 채권은행들은 논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출금 회수’, ‘신규여신 중단’ 등 강수로 LG를 압박했고, 그래도 굴하지 않던 구본무 회장은 청와대에 불려갔다온 그날 현대로 반도체를 넘기는데 동의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적자가 LG보다 1천억원이나 많은 현대가 주체로 선정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부가 현대를 미리 점 찍어놓은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퇴출대상 1호인 삼성자동차를 대우가 맡기로 한 것도 어설프다. 전문가들은 하루라도 빨리 삼성자동차를 처리해야 한다는 집착에 빠진 정부와, ‘위기설’로 곤욕을 치르다 반격을 노리고 있던 대우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대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돈줄이 말라 휘청거린다’는 소문에 휩싸였고, 급기야 김우중 회장이 뇌수술까지 받자 자금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퇴출시키기엔 너무 부담이 큰 삼성자동차를 대우에 넘기는 대신 대우쪽에 자금지원을 약속했고, 대우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전자를 내놨다는 의혹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역갈등 부추긴다=애매한 업체 선정은 유언비어를 낳고, 유언비어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삼성자동차(부산)·대우전자(구미)가 있는 경상도 지역에선 ‘빅딜은 경상도 죽이기’, ‘전라도엔 실업자가 없다’는 등 유언비어가 나돌 정도.
ㅅ대학의 한 교수(사회학)는 이에 대해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경제논리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 기준에 따라 빅딜 대상 업체를 선정한 데 따른 결과”라며 “이는 광주항쟁 때 전라도 지역에 떠돌던 유언비어처럼 사회통합에 치명적이고 망국적인 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민회의는 20일 구미공단 방문단을 꾸리는 등 수습에 나서고 있지만 이런 소문은 이미 전국을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 효과 의심된다=대우의 삼성차 인수는 부실을 확대할 뿐이라는 게 중론이다. 삼성자동차는 지난해 상반기 4천억원대의 적자를 냈다. 대우가 안고 있는 쌍용자동차의 적자규모와 합할 경우 연간 적자규모가 1조원을 넘는다는 계산이다. 또 삼성차는 차종도 SM5 하나뿐이고 이마저도 대우와 겹친다. ‘시너지효과’가 날 수 없다는 얘기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도 마찬가지. 두 회사의 합병은 총부채 17조원, 연간 적자 1조원짜리 부실기업의 탄생을 뜻한다. 세계 반도체 시장도 초과 공급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마당에 이 회사가 어떻게 앞길을 헤쳐갈지 걱정이다.
△실업대책이 없다=현대전자-LG반도체, 삼성차-대우전자, 현대차-기아차 등 ‘3대빅딜’의 고용승계는 지금까지 진전된 게 거의 없다.
현대전자는 LG반도체쪽의 고용승계 요구를 거부했고, 삼성-대우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기아의 현재 인원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이었으나 과장급이상 임직원 30%를 내보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거리로 내몰리는 실업자는 최저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올 1/4분기에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보이는 40만명을 합하면 실업률은 8%를 넘어서고 결국 실업자 2백만명 시대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 기간 중 공공근로사업 35만명분 일자리를 만든다는 방침이지만 이를 감당하기엔 부족하다.
△재벌개혁 역행=현대자동차는 지난해 기아·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무려 8조원이나 되는 부채를 탕감받았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최근 ‘삼성자동차를 맡는 대신 다른 계열사에 자금사정이 좋아질 수 있도록 지원을 바란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LG는 반도체를 현대에 넘기는 ‘대가’로 한화에너지나 온세통신·데이콤의 경영권을 보장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현대는 김대중 정부 아래서 자동차·금융·방위산업(잠수함 건조)과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가는 금강산 개발사업 등을 따내 덩치를 더 키우고 있다.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던 재벌들이 빅딜을 빌미로 다시 되레 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빅딜을 대가로 대규모 금융·세제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이는 그대로 국민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재벌개혁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부실경영의 책임을 져야 할 총수들의 지배체제가 다시 견고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통상압력 빌미=지난해 천문학적 경상수지 적자(2천3백억달러, GDP대비 2.7%)를 기록한 미국은 올들어 보호무역을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 경쟁법(독점금지법)을 잣대로 우리의 자동차·반도체 산업을 독점품목에 넣어 보복관세를 높게 매기는 등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배영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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