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인천 서구 가좌동 영창악기노동조합 사무실. 어지럽게 나붙은 현수막에서부터 이곳 사정은 어렵지 않게 읽힌다. 지난해 10월 금융권으로부터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업체로 지정된 뒤, 인원 줄이기 문제 따위를 놓고 회사와 노동조합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보름 동안 파업을 치렀고, 노조위원장이 구속되는 시련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현수막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비단 이 사업장의 사정만은 아니다.
꼼꼼히 살펴보면 현수막에 적힌 이름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속산업연맹에 들어 있는 다른 노조들이 갖다붙인 것들이다. 그저 영창악기노조를 격려하기 위한 배려만은 아니다. 영창악기노조는 교섭권을 금속산업연맹에 위임해 놓은 상태다. 싸움은 회사와 노조뿐 아니라, 회사와 연맹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섭권 위임은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민주노총 등 중앙조직이나 산별연맹들은 지난해부터 산하 단위사업장에 교섭권을 위임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계의 만만치 않은 속뜻이 담겨 있다. 산업별로 개별 사업장 노조들을 하나의 노조로 통합하는, 다름아닌 산업별 노조(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사전포석이다. 민주노총 이병우 정책부장은 “지금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교섭권 위임은 산별노조로 가기 위한 단위노조들의 훈련”이라고 풀이했다.
민주노총은 올해 조직사업의 1순위로 `산별노조 건설 앞당기기’를 세웠다. 다음달 증권산업노조가 출범하는 것을 비롯해 오는 2002년까지 산하 연맹을 모두 산별노조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곧 산별노조건설기획단을 만들어 정책과 사례를 연구하는 일을 도맡게 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민주노총 차원의 강한 의지가 실려 있다. 사실 산별노조 건설은 지난 95년 민주노총이 세워질 때부터 첫번째 조직과제로 삼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도 구체적인 사업을 벌여보지 못했다는 게 냉정한 평가다.
“지난 1년은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한해였다. 산업 전체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의 틀로는 현장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싸워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눈앞의 싸움에 매달리느라 산별노조같은 중장기 사업에는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병우 부장은 “그러나 더이상 늦추다가는 조직은 조직대로 깨지고 산별노조를 건설하려 해야 건설할 조직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위기감을 나타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노총도 예외가 아니다. 산하 연맹들의 통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이룬 뒤 산별노조 전환으로 수순을 밟아나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3월 안에 산별노조건설추진특별위원회를 구성한 뒤 연맹별로 산별노조 건설 일정을 결의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이정식 기획국장은 “우리가 서둘러 제2교원노조를 만드는 이유도 전교조를 의식한 것 못지 않게 산별노조의 경험을 쌓기 위한 계산도 깔려 있다”고 말했다.
산별노조의 중심이 될 각 산별연맹들의 분위기는 훨씬 절실하다. 민주노총 산하 최대 연맹인 금속산업연맹은 지난 6일 대의원대회에서 오는 2000년 10월까지 산별노조로 전환하기로 결의했다. 금속산업연맹은 지난해 가장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정리해고 등으로 조합원수도 19만6천명에서 17만6천명으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연맹을 다급하게 만든 것은 단위사업장에 대한 지도력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지난해 5월 현대자동차 사태 때 연맹은 총파업을 결의했으나, 이를 따른 조합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맹은 총파업을 결의했을 뿐 결정권은 모두 개별 사업장 노조가 갖고 있었다. 우리가 현대자동차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도 그저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이었다.” 연맹 조직국의 한 관계자는 “소대장 없이 각개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총파업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고 당시의 무력감을 드러냈다. 자금, 조직, 정치력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급단체들과 달리, 개별 사업장으로 내려가면 현실인식에 대한 편차가 적지 않다. “회사와 어려운 싸움을 벌이면서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집행부 안에는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영창악기 윤창기 수석부위원장은 “연맹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을 넘겨주기 싫어하는 정서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정작 노동조합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조합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산별노조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다른 사업장의 도움이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영창악기 노조원 김종선(25)씨는 “어느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어쩌면 그가 가진 산별노조에 대한 인식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영춘 기자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