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학내외를 막론하고 정당 또는 정치적 목적의 사회단체 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을 할 수 없으며 집단적 행위, 시위, 성토 , 농성, 등교거부, 마이크 사용 등으로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으며 또한 학교운영에 관여할 수도 없다.”
오리엔테이션 치렀다고 총학생회장 제적군사독재 시절의 살벌한 학원안정화 대책을 떠올리게 하는 이 규정은 한 전문대 학칙의 ‘학생활동 금지’조항이다. 전문대의 학생활동에 대한 제약은 그동안 일반의 관심권 밖에 밀려나 있었지 만, 헌법의 테두리마저 넘어설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어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현재 이런 학칙을 두고 있는 전문대는 확인된 곳만 해도 서울의 ㅂ·ㅅ·ㅎ대, 부산의 ㅂ대, 대전의 ㄷ·ㅎ대, 마산 ㅁ대, 순천 ㅈ대, 목포 ㅁ대 등이다. 내용은 앞서 든 예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거나 표현만 약간 달리할 뿐 천편일률적이다.
이런 학칙은 4년제 대학들의 학생활동 제한과 비교해보면 터무니 없는 과잉 규제임을 알 수 있다. “학생은 수업·연구 등 학교의 기본기능 수행을 방해하는 개인 또는 집단적 행위
와 교육목적에 위배되는 활동을 할 수 없다.”(서울대) “학생은 학업을 방해하 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다.”(연세대)
전문대들은 또 4년제 대학에서 사라졌거나 사문화되다시피 한 학 생활동 사전승인제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조사대상 전문대들 은 △교내외 10인 이상의 집회 △교내외 광고, 인쇄물의 첨부 또 는 배포 △각 기관 또는 개인에 대한 학생활동 후원요청 또는 시 상의뢰 △외부인사의 학내초청 등을 ‘사전승인’ 대상으로 정해 행사의 목적, 일시, 장소, 참가예정 인원 등에 대해 학장의 승인 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어긴 학생에 대한 제재도 가혹하다. 이 규정을 어겨 제적된 학생은 재입학이나 편입학 기회가 박탈된다. 심지어 다른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에게도 이 규정이 적용된다.
조사대상 가운 데 3개 대학은 교수회의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채 학장 직권으로 징계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대전의 혜천대학(옛 대전전문대)에서는 이런 학칙 위반을 이 유로 총학생회 간부 2명을 제적처리했고,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해 큰 진통을 겪고 있다. 학교쪽은 “지난 3
월3일 총학생회 가 학교쪽 행사와 별도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열면서 사전 승 인없이 스피커를 학내로 반입해 수업을 방해하고 신입생을 유인해 불법집회에 참여토록 한 것은 학칙
위반”이라며 총학생회장 정찬 희(전자출판과 2년)씨와 부학생회장 신문영(전산정보처리과 2년) 씨를 제적시켰다.
학생들은 이에 대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는 지난 96년까지 학생회가 맡아오던 것을 97·98년 학교쪽이 가져갔다”며 “올해 부터 다시 학생회가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학교 당국과 대화도 했 는데 이를 허가하지 않은 채 불법집회로 규정한 것은 학생자치권 에 대한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학교쪽 방해로 총학생회 선거 못 치르기도 한 학생은 “교정에서 친구들끼리 족구 경기를 한번 하려 해도 학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셈”이라며 “학칙이 지나치게 가혹하다 ”고 꼬집었다. 이 대학 학생준칙은 △용의·복장이 지나치게 불 량한 자 △학습·생활태도가 불량한 자 △유관기관에 연행된 뒤 훈방된 자 △지정된 장소 이외에서 흡연하거나 흡연태도가 불손한 자 등 모호한 표현의 사유에 대해서도 징계가 가능하도록 규정해 놓았을 정도다.
더구나 학교쪽은 “학생을 징계하고자 하는 경우 해당 학생에게 의견진술의 기회를 부여하는 등 적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고등교육법 13조를 어긴 채 일방적으로 제적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학교쪽은 3월25일 뒤늦게 학생지도위원회를 열어 당사자에게 소명기회를 줬다.
이 밖에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치른 선거를 학교쪽에서 무효화해 재선거가 진행되거나 아예 총학생회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전문대도 4곳이나 있다. 한국대학교육연구소 김삼오 연구원은 “전문대의 학칙과 학생지도 방향은 철저히 통제위주의 발상을 담고 있다” 며 “전문대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유독 전문대의 학칙이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 까. 지난해 3월1일 고등교육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전문대 학칙은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전문대 학칙이 승인제에서 보고제로 바뀌기는 했지만 이전에도 일정한 가이드 라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대 학칙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내용과 표현으로 구성돼 있다. 정치활동 금지 조항의 경우 9개 전문대 모두 학칙 제34∼37조 사이에 들어 있다. 김삼
오 연구원은 “전문대가 처음 설립된 79년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학칙이 지금까지 답습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93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은 교내 학생단체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비디오를 상영하자 학교쪽이 허가없이 불법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주동자를 퇴학처분한 데 대해 “집회의 허
가제를 규정한 학칙규정 자체가 무효이거나 비디오 상영행사가 불법집회에 해당 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퇴학처분을 무효라고 판결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규
제하는 학칙은 위헌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학칙규정은 학생들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이자, 학내 비리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라는 의혹도 사고 있다. 전문대 운영실태가 그만큼 부실하고 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학생활동이기 때문이다.
혜천대의 경우 학생들은 “새로 구성된 총학생회가 지난 1월 학교발전 전망 제시와 예결산 공개 등을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보낸 게 사실상 제적사태의 발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파행적 운영과 학생활동 탄압 고리 밝혀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의 ‘97년 전문대학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46개 사립전문대의 세입총액 1조7939억원 가운데 학생 등록금이 92.4%를 차지하는 반면 재단 전입금은
290억여원에 그쳤다. 재단 전입금을 한푼도 안 낸 전문대도 10곳이나 됐다. 또 장학금을 법정기준의 63.1%밖에 주지 않는 반면, 다음해로 이월·적립되는 예산이 4993억원에 이르는 등 불투명한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전문대 운영에 대한 외부 감시는 부실하기 그지없다. 91개 사립전문대는 설립 이후 한차례도 교육부 종합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96년 경기도 ㅅ전문대 감사에서 수입금 65억
원과 양도성예 금증서 매출자금 50억원을 유용한 사실을 적발하고도 관계자 2명 을 자체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등 징계도 솜방망이에 그치 고 있다.
전문대는 79년 127개 대학, 학생수 7만8천여명으로 시작해 99년 현재 158개 대학, 학생수 80만1천여명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직도 파행적 학사운영과 자율적인 학생활동 탄압이
라는 그늘에 가려 있다. ‘양자의 교묘한 결탁’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묶인 손발과 입부터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박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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