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실시된 재·보궐선거는 투표권자 중 36%만이 참여한 초라한 잔치로 끝났다. 여권이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에도 유권자 3명 중 1명은 기권이라는 의사표시로 낡은 정치를 `심판’했다. 한 정치학자가 “충격적”이라고까지 표현했던 낮은 투표율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달걀로 바위치기’로 비유돼온 진보정당 창당 운동이 다시한번 신선한 희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정치권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의 이면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웠던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한 재야 진보정치세력의 `실험’은 지난 18일 열린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낡은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서 진보정당 창당이라는 실험은 과거 에도 여러차례 시도됐다. 그러나 국민승리21 관계자들은 대중적 조직 기반과 사회·제도적 여건 변화 등을 들어 실패한 과거의 진보정당의 연장선상에 놓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노회찬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은 “과거의 민중당이 활동가 중심 정당이었 다면 이번에는 민주노총 등의 대중조직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등 기반이 튼튼하다”며 “추진과정에서도 과거와 같은 진보운동진 영의 심각한 분열 양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고 말했다.
국민승리21 등은 6월말에 있을 창당준비위 발족식 때까지 발기인 1만명을 모은 뒤, 창당 때까지는 최소한 2만 3만명의 당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조직 다지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노조가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동관계 법이 바뀐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여건 변화로 꼽힌다. 법이 바뀐 뒤 처음 실시된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국민승리21 소속 후보 2명이 울산 동구청장과 북구청장에 당선된 것도 노조의 공개적인 지지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진보정당 창당 추진세력이 무엇보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최근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중선거구제와 정당명부제 도입이다. 특히 정당 전국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도입될 경우, 당장 내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가능할 것 이라는 다소 성급한 전망도 내놓고
있다.
실제로 국민승리21이 지난달 초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당명부제를 도입했을 때의 지지정당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24.4%가 “새로 창당될 진보정당을 지지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진보운동쪽에서는 최악의 경우 단 한석이라도 원내 교두보를 확보해도 성공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것만으로도 진보정당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게 돼 당세가 급속히 커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시기상조론’에도 불구하고 국민승리21 등이 올해 안 창당을 목표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는 구제금융사태 뒤 노동자들이 대책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이를 더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상현 국민승리21 조직위원장은 “저성장·고실업 이라는 사회적 조건과 사회안전망 확충이라는 국민의 잠재적 요구 등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이 진보정당을 탄생시킬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구제금융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면서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됐다는 데에는 상당수 진보적인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손혁재 한국정당정치연구소 정책위원장은 “경제성장 기에 급속히 보수화됐던
중산층이 일순간에 무너지면서 진보이념 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토
대가 마련됐다”며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공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의 출현은 반드 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진보정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진보진영의 많은 학자들은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는 결국 표로 심판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성없는 정책만 내놓는 만년 군소정당의 이미지를 하루빨리 벗고 정책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지적이다.
제도적 장벽을 없애기 위해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중선거구제를 쟁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또 조직내부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아직 합류하지 않은 민주·진보세력을 끌어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저 자] 이종규 기자
[출 처] 한겨레신문
[발 행 일] 199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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