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부의 위험한 불장난

에바 정, 주간녹색좌파 5/19

5월 7일 나토가 베오그라드에 있는 중국 대사관을 폭격한 다음 날, 중국 정부는 거의 20개에 이르는 도시에서 수십만명의 학생들을 시위로 동원했다.

경찰이 시위자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5월 12일부터 시위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최고위 관료들은 이 행동을 옥내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는데, 즉 누군가 이를 사회질서 혼란의 호기회로 이용할 수 없도록 주제에 관련된 공식 발언을 하는 연구발표나 내부 세미나, 그리고 탄원 등의 형태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가, 한때 대규모로 조직되어 힘을 발휘했던 시위자들이 곧 중국의 비민주성과 다른 사회적 모순에 반발하여 그들의 관심사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위험은 6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학살 10주년을 앞두고 급격히

증가했다.

일부 서방 언론은 중국 전역에서 미국/나토 반대 시위가 가장 대규모로 열린 5월 ∼10일 사이에 4십만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했다. 보도에 따르면 시안에서는 하루에 2만∼5만명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항쩌우에서는 3만명 이상이, 그리고 광쩌우, 상

하이, 우한에서도 각각 1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베이징, 청두, 션양, 난징, 길린, 청샤, 난닝 등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마카우에서도 중국인들의 항의시위가 열렸다. 중국통일전선(Chinese Unificati- on Front)이 소집한 5월 10일의 대만 시위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5월 10일 홍콩 시위는 지역적인 수준으로 봤을 때 대단히 많은 2천명의 사람들이 결합했다.

폭격은 우연한 사고라기 보다는 도발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훼손된 국가의 자존심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위를 벌이라는 관의 요구에 즉각 응답하게 했다. 돌, 보도블록, 페인트 폭탄, 토마토, 달걀 혹은 시위자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 몇시간 동안 계속해서 대사관들, 특히 미대사관에 던져졌다.

청두에 있는 미 영사관에서는 불길이 솟았고 광쩌우의 독일 영사관도 기습을 받았으며 베이징의 미 대사관 주위에 있는 차들이 부서졌다. 다른 도시에서도 목표가 된 건물 대부분의 창문들이 깨졌다.

시위자들은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이 묵었던 시안의 하얏트 호텔을 기습했다. 그들은 호텔 경영진으로부터 클린턴의 사진을 내리고 불태우기 위한 용도로 성조기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물러났다. 여러 도시에 있는 멕도날드와 캔

터키후라이드치킨 상점들도 공격을 받았다. 미국과 나토 회원국 제품들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주장들이 대학의 정치 포스터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도 퍼져나갔다. 항의 시위자들은 관제 언론의 미국과 나토에 대한 맹렬한 비난 문구, 국영 TV에서 재빠르게 재상영된 반제국주의 영화들, 그리고 후진따오 부주석의 5월 10일 시위 격려문 등에서 주요 슬로건을 따왔다.

중국 정부는 6월 4일에 즈음한 새로운 시위의 가능성을 염려했다. 5월 10일 베이징 사법 당국은 민주화운동가인 수웬리와 딩질리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글을 소지한 리우 시안리에게 4년형을 선고했다. 딩은 천안문에서 사망한 한 학생의 어머니이자

‘반혁명’으로 규정된 1989년 시위의 공식 성격을 전도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주창한 활동가이다.

1976년 4월 천안문에서 있었던 대규모 반관료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마오쩌똥은 이를 반혁명으로 선언했지만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78년, 혁명으로 공식 재규정되었다. 장쩌민이 1989년 시위를 이와 비슷하게 재규정할 것이라는 기대가

널리 퍼져있다.

전세계에 있는 중국 민주화운동가들은 6월 4일 최고점에 이를 이 주제에 관해 국제적인 탄원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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