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가지 풍문?

올해 4.19는 지하철 노조 파업으로 시작되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노조원 6,000-7,000명이 서울대에 진입하였고, 이후 버들골과 노천강당에서 8일간의 농성을 벌였다. 정리해고 반대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김대중-IMF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 정면으로 맞선 구호를 내건, 그래서 단위사업장으로서 올해 전국적 정치투쟁의 과제를 한몸에 부여안았다고까지 평가받은 이 ‘선봉투쟁’에 전국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5일 결국 공권력이 투입된 다음날, 일간신문에는 ‘불타는 서울대 교문’ 사진이 1면에 컬러로 실리기도 하였다. 서울대가 대학입시나 무슨 교육계 관련 일이 아니라 ‘시국사건’과 관련해 이처럼 주목받은 적이 최근에 또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과거에 서울대가 학생운동의 선도주자(메이저 캠?)의 위치와 관련하여 ‘시국사건’의 초점이 되곤 했다면, 이번에는 순전히 지하철 노조가 관악 캠퍼스라는 이 외지고 퇴로(관악산)가 다양한 장소를 장기농성의 자리로 택함으로 해서 서울대는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지하철 노조 파업 당시 나는, 다른 학교를 다니거나 또는 이미 졸업한 친구들, 그러니까 자기들보다 내가 서울대 상황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 친구들로부터 질문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이 서울대 상황에 대해 전해 들은 통로는 주로 통신망의 속보게시판(상업통신망의 진보적 동호회나 진보넷)이었는데, 그에 기반한 자신의 궁금증을 풀고 싶은 것이었다. 그들은 물었다. “야, 너 지금 서울대에서 오는 길이지? 지금 어때? 장난 아니라며?” “노조원 7천에 학생 1천명이 싸우고 있대며? 굉장하겠다.” 그들에게 그러한 모처럼의 강건한 노학연대 이미지를 심어준 ‘속보’내용이 대강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왜곡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곡을 이야기하자면 사실 다른 화제가 필요하다. 비슷한 시기, 이른바 제도언론매체들은 파업 보도에 있어 몇년 전으로 퇴행해버린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애초 노동자편을 들어주기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엔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처음부터 ‘불법 엄금’만을 되뇌인 정부에게는 호의적이었고, 그동안 교섭과정과 노동자의 파업 이유는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않았으며, 전가의 보도 ‘시민의 발목’론과 ‘소수의 노동자와 대다수 시민’이라는 갈등구도가 다시 등장하였다. 그런 와중에 매스컴을 탄 것에는 이런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당장 중간시험을 준비중인 학생들이 불만이다. 심모(28·대학원생)씨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던 학생들이 시끄러워 집에 일찍 돌아갔다”고 말했다({조선일보} 99년 4월 21일자)”는 식의 보도들. 마치 ‘선량한 학생들’이 큰 피해라도 입고 있다는 것처럼.

노동자와 학생이 하나된 캠퍼스, 그리고 노동자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학생—상반되는 이 풍문 중 어느 것이 진실인 걸까.

* 대자보 이야기 두 가지

이제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하철노조의 농성 기간 동안 내가 보았던 것을 요약하자면, 4월의 햇살 속에서 잔잔하기 그지 없는 캠퍼스의 물결과 그 안에 외딴 섬처럼 떠있던 투쟁의 현장이었다. 정문을 통해 학교에 등교하여 버들골 쪽으로 올 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밤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학생이라면, 그는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더라도 학교 안에 누가 들어와있는지도 몰랐을지 모른다. 그만큼 캠퍼스 내에서조차 지하철노조 농성은, 공간적으로는 버들골과 노천강당, 시간적으로는 일몰 이후라는 시·공간만을 ‘점거’할 수 있었다(그러한 것은 지하철 노조 지도부의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물론 서총련 학생들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학생들이 노학연대 기치 아래 연대투쟁을 벌였고, 학내 곳곳에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을 돌렸으며, 또 일몰 이후 공권력의 투입에 대비하여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샜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러한 ‘큰 사건’이 갖는 캠퍼스 내 규정력의 제한성이다. 80년대 서울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학생사회를 문화기술적으로 묘파한 한 논문을 보면, “(서울대) 교문은 캠퍼스 내외의 경계이고 학생의 집단적 시위가 공권력과 충돌하는 곳이기 때문에 신입생은 이 곳에 의미를 부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한 의미를 유지·강화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교문 시위를 기획하곤 했다는 해석도 들은 적 있다.

모든 투쟁을 ‘의미 투쟁’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얘기지만, 어쨌든 90년대 초반까지 흔히 벌어졌던 교문투쟁(교투)이 당시의 학생들에게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의 대치선이 바로 눈 앞에서 ‘가시화(可視化)되고 육화되는’ 체험을 제공했으리라는 추론은 무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99년 현 시기의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이 바로 우리 가까이서 ‘가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란 80년대와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영향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나마 안 좋은 방향으로의 영향력, 즉 학생들의 집단적인 반발 같은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삼아야할까.

지하철 노조원들이 집결해있던 버들골에 가본 적 있었다. 시간이 낮인지라 많은 노조원들은 그늘에서 쉬거나 잠들어 있었고 노천강당에서는 일부 조합원들이 족구를 하고 있었다(같이 있던 친구와 “낮과 밤의 분위기가 이렇게 다르다니 지금이 낮밤으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6.25 때 전라도 산간 마을인가”라며 썰렁한 웃음을 나누기도 했다). 노천강당 벽에 대자보가 줄지어 붙어 있었다. 각 지부별 분임토의 결과와 결의사항을 적은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역 사무소

※토론결과

– 구조조정시 복귀자부터 해고 / 다른 사람에 연연해하지 말고 나라도 열심히 하자 / 파업참가서명후 미참가자는 본인에게 공개사과조치 / 커피 타주지 않기 / 중간관리자 호칭 안하기

2호선 ○○ 역무소

※ 토론결과

① 역무소 왕따시키기

– 연동내용 바꿔 보내기 / 유선 보고 하지 않기 / 문서 보고 날짜 안지키기 / 아침, 점심, 저녁, 출근후, 중식 전, 퇴근시간 직전 전화해서 아무 말 않고 전화끊기

② 역별 왕따시키기

– 서로 인사하지 않고 업무적인 것만 / 점심식사 같이 안하기

※ 여성부 소식지에 복귀 여직원 명단 싣기

복귀자(반조직행위자)

19일: 김○○ 임○○ 강○○ 최○○ 박○○ 이○○ 박○○ 김○○ 유○○

20일: 정○○ 권○○ 박○○

□□ 역사무소

※ 토론결과

– 노조에서 정리해고로 철저히 응징

※ 이번 파업으로 승리할 경우 1급지만 돌려서 무지 고생시킨다

– 사내 복지기금 대출금지

※ 역무소에 근무하는 반조직행위자 반드시 정리해고 하고 역무소 순환근무 배치

※ 제안

– 복귀자 재설득해서 참여시키거나 근무하지 못하도록 물리적 압력 가할 것

대자보마다에는 해당 지부의 ‘반조직행위자(파업 도중 복귀자)’명단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오싹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노조원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한마디씩 했다. “○○씨도 복귀 했구만” “그 사람 원래 사표쓴다고 했잖아” “이거 너무 유치한 거 아냐? 허허” “이렇게라도 해야지.” 대자보 대열 한켠에는 ‘반조직행위자에게 한마디씩……’ 이라는 제목으로 백지 대자보가 한 장 붙어있었는데 거기에는 이탈 조직원들(특히 여성 노조원들이 많았다)에 대한 분노가 여과없이 드러나 있었다. “전○○ 솥뚜껑이나 운전해라 – 연신내 역조합원” “조○○, 넌 남자도 아녀. 모두 앞에서 사직서 쓴다고 했으니 꼭 지킬 것! 임마!”….

파업 와중의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복귀 이후 이른바 ‘왕따 현상’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꼭 그런 방식이어야 했을까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적어도 ‘왕따 현상’의 기본적 성격 자체는 ‘맘씨 못된 사람들의 약한 동료 괴롭히기’ 차원이 아니라 세계의 파업현장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피켓팅(파업이탈 감시행위)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는 점은 지적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피케팅의 보장은 파업권에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그런 면에서 검찰당국의 ‘왕따’ 적발 운운 내지 ‘왕따’라는 단어의 적용 자체가 심히 이데올로기적인 일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험악한’ 대자보 내용에 대한 시비보다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이들 노동자가 처해 있는 상황의 절박함과 강파름이다. 외부의 공권력과 여론의 압박, 믿을 것은 ‘우리 조직’의 결속력밖에 없는 상황. 나는 우리 사회에서 건국 이후 최초의 총파업이 실현된 순간(96년말∼97년초)이 역으로 80년대에 진보운동권이 고대해온 총파업, 즉 20세기 초엽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식의 체제 자체를 총체적으로위협하는 파업은 불가능하게 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총파업’은 민주노총이 국면에 따라 내걸 수 있는 여러 카드 중에 가장 유력한 방안,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게 된 상황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파업은 노조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절박한 권리투쟁이고, 노동자만이 취할 수 있는 ‘기계를 멈춰 역사를 여는’ 행동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파업이 감수해야 하는 비용(cost)은 너무도 높다. 헌법에 보장되어있는 파업권(단체행동권)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부정되고 있는가는 이번 지하철파업에서 본 바 그대로이다. 파업을 결행하는 순간 지도부는 구속을 각오해고 하고, 노조는 온갖 여론의 돌팔매를 맞아야 하며, 노조원은 모든 ‘월급쟁이’의 권리를 위해 분투하는 그 일로 인해다른 월급쟁이 ‘시민’에게 멱살도 잡혀야 한다. 정부는 파업의 정당성을 훼손시키기 위해 모든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동원하고, 파업의 효력을 줄이기 위해 군대 인력 투입까지 강구한다. 대규모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노조가 학교에 가면, 시설을 훼손했다고 대학 당국은 손해보상을 청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몇 년 전 운수노조가 파업을 해서 농민들이 돼지고기를 출하하지 못하자 트럭 운전사 멱살을 잡는 대신, 어차피 묵힐 고기를 잡아 ‘연대의 바비큐’를 나눠 먹었다는 그러한 아름다운 광경은, 정말 꿈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 그속에서 파업을 결행하고 8일간을 버틴다는 것. 그것이 어찌 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드라마가 안 될 수 있을까. 겉에서 보면 그저 신문기사 며칠짜리 취재원이거나 또는 한국노동운동사 논문에 잘하면 어느 정도 분량에 할애되는 정도겠지만, 생각해보라, 투쟁의 고양, 역사적 현장에 참여한다는 뿌듯함,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동지애와 불신, 지도부와의 관계, 가족에 대한 걱정, 회유와 협박, 환호와 억하심정, 벅참과 허탈함, 그 모든 것의 극적인 교차… 노조 내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얼마나 많을까. 쉽게 말못할 것은 얼마나 많을까. 아직 말로 나오지 못한 것들은 얼마나 또 얼마나 많을까…. 요컨대 아직 노동운동에서는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비유컨대 “문학도 죽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투쟁의 섬’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90년대 대학 캠퍼스로. 지나가다보니 거기서도 족구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까 노천강당에서 보았던 족구 장면이 겹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보통 노동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투쟁의 현장 속에서도 여유와 낙관성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잠시 긴장도 눅이고 의지도 재충전하는 시간. 그러면 그 바로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이 태연하게 팩차기와 족구와 공던지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은? 같은 기표도 맥락에 따라 기의가 달라지는 것? 나는 어떤 재단의 마음을 여기에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같은 광경이 주는 이 상이

한 감정 앞에서 느껴야했던 어질어질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혹자는 ‘전투성’의 시기는 대학도 지난 수십년간 치를만큼 치렀으며, 그 시기를 ‘졸업’한 것이 대학으로 보거나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다행이지 않냐고 말할 지 모르겠다. 나 역시 내가 처음대학에 들어온 노태우 정권 시기와 현재 분위기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당혹감을 때때로 느끼긴 하지만, 학생운동이 좀더 활발했다고 하여 그 시기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마전 {대학신문}에 보니 한림대 유팔무 교수가 “학생운동이 대학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은 정치의 부재 탓이 크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학이 그러한 기능을 대신 떠맡은 것이 그 이유이다(99년 5월 10일자)”라고 썼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이 대학문화의 좀더 덜 중요한 일부’가 되어가는 현금의 상황이 그렇게 문제삼아야 할 바는 아닐지도 모른다. 더디나마 정치가 좀더 발전되어가고, 또 더 중요하게는 대항정치를 수행할 중심 주체의 몫을 혼자 떠맡아야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 되니까(노동운동으로의 중심의 이전). 그리고 전체 운동을 대변하고 커버하겠다는 과욕에서 벗어나 학생사회 내부 그리고 운동진영 내부와 일상문화를 되돌아봤을 때, 거기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통찰과 문제제기들은 아직 다른 운동진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함과 유의미성이 있는 게 사실이다(특히 (여)성문제와 문화 부분이 그렇다). 그것은 사실 ‘전투성’과 ‘최대다수 동원’의 전략과는 현실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준 바이고, 이제 이마만큼 된 것이 대학으로 보거나 사회적으로 보거나 발전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런데 위의 ‘왕따 대자보’를 본 뒤 얼마되지 않아 중앙도서관 통로에서 다른 대자보(?) 공방을 볼 수가 있었다. 앞줄에 ‘대자보’ 다음에 물음표를 붙인 것은, 거기 붙여진 종이들이 보통 볼 수 있는 대자보 크기(전지)가 아니라 A4 용지나 노트 정도 크기였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공방은 공식적인 단체간의 ‘틀갖춘’ 논쟁이라기보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학우들의 자발적인 발언의 난장이었다. 사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등장한 대자보의 유래로 볼 때 그것이 대자보의 원뜻에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통신망이 그 역할을 많이 대체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 ‘소자보(小字報)’ 논쟁은 “총학생회는 이번 폭력 시위사태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참다 못한한 94 서울대생’의 글로 촉발되었다. 요지는 “(지하철 노조를) 일단 불러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그들이 학교를 깨끗하게 이용하고 떠날 수 있도록 해야…이 학교에는 총학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상당히 많은 학우들이 있습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투쟁”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며, 이어 총학생회에 요구하기를, 첫째 성의있는 해명과 사과를 할 것, 둘째 “지하철 노조의 서울대 농성과 그로 인해 야기된 학내 폭력 사태”에 대해 지지여부를 묻는 투표 실시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승인되지 못할 경우 물러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글이 게시된 후로, 이에대해 찬성 또는 반박을 표하는 또다른 수많은 소자보들이 벽면을 빽빽하게 메웠다(학생들이 그것을 들여다보는 광경이 {대학신문} 1면 사진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는 당신은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서는 무엇을 했느냐”라는 공격에서부터 지지를 표한다며 서명을 해놓고간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좃선일보 기자님. 여기 특종 하나 생겼어요”라고 뼈있는 비아냥도 해놓았다.

학생운동의 침체가 그 배경을 살펴볼 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듯, 이러한 문제제기 역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예전에 당면 투쟁 사안에 대한 전술적 문제를 놓고 대중적 토론이 진행되던(투쟁 자체에 대한 공감은 전제되어있다는 가정 하에) 상황과 비교하면 너무 소박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동권’의 활동에 대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진다는 것은, 90년대 이후에 와서 비로소 가능해진 측면도 있을 것이고, 또 하기에 따라서는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위에서 인용한 문제제기의 경우, 학생회기구의 대의성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80년대 후반 이후 ‘전투적 학생회’의 전통 아래에 있는 현재 학생회의 건설과 운영의 방식이 과연 당시에 비해 훨씬 복잡·다양해진 학생사회를 전반적으로 대변하고 있고, 또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은 이제까지 제대로 논의가 되지 못했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해볼만한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처럼의 ‘사회운동적 학생사회’의 재현 앞에서 이러한 논쟁만이 학우들의 대중적 관심을 북돋았다는 현실이 긍정적이기만 할까. 다른 사람의 주장을 동의 또는 용인하는 것은 ‘나에게 불편을 안 주는 선’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노동자 권리 주장하는 것은 좋은데 시민의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라는 선동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학생이란 존재는 정부편도 노동자편도 아닐 수 있다. 강요되지도 않는다. 아마도 다수는 ‘무관심파·방관파’인 것이 아닐까. 문제는, 학생은 언제나 미래의 무엇이라는 점이다. 학생운동의 흐름이 얼마 후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반영되고 전파되던 때가 있었다. 386세대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들은 기존과는 무엇인가 다른 캠퍼스를 다녔고 그속에서 싹튼 집단적 정서(맨털리티)는 그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에도 그들에게 무언가 새롭고 건강한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한때 ‘학생=미래의 노동자’라는 담론이 떠오른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은 미래의 누구이며, 지금의 학생사회는 미래의 어떤 사회상의 근거가 될 것인가? 혹시 이른바 ‘대다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노동자와 대립항으로서 보도되는 그런 ‘시민’. 평소 지하철은 누구에 의해 굴러가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다가 지하철파업이 일어나면 ‘노동자이기주의’를 불평하는 그런 ‘시민’. 정리해고는 남의 일이 아니지만 지하철 파업은 남의 일인 그런 ‘시민’. 지금의 학생은 ‘정부 편도 아니고 노동자 편도 아닌’ 중립지대에 남아있을 수 있지만, 그때의 시민은 그렇게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 대학은 사회의 미래?

결론적으로 지하철 노조가 서울대를 만났을 때 내가 보았던 것은, 무언가 ‘시간대’가 다른 것 같은 두 문화가 접합된 양상이었다고 할까. 노동자들이 학생들을 못 살게 군 것도 아니지만, 학생과 하나가 된 것도 아니었던. 80년대 한창 노학연대가 주창되었을 때 그 ‘노’와 ‘학’은 같은 시간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는? 80년대 연장선상에서 그 조직적 성과를 이어나가면서 신자유주의 시대 오히려 ‘새로운 전투성(new militancy)’을 갖춰나가는 90년대 노동운동. 반면 90년대 들어와서 80년대를 건너뛰어 차라리 70년대 끝에 가서 붙은 것 같은 학생사회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학생운동. 90년대 학생사회의 특징은 ’80년대적인 것들의 전반적인 90년대화’가 아니라, 온갖 연대(年代)의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무감한 채 병존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학생사회의 분화 양상은 이제 대학을 한두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부에서는 학생운동 논리가 훨씬 세련되고 또는 급진화되었으며 국제연대와 정보화의 시야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전체 학생사회의 하위문화는 그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한 학생사회. 거기에 어느날 노동운동의 현장이 교차된다면? 이번 지하철 파업이 보여준 주변풍경들이 그 단면 아닐까?

얼마전 김세균 교수가 대학 구조조정에 대해 쓴 글에 보면, “(대학개혁 문제가 ‘대학민주화’ 차원에서 제기돼온 이유는) 교육의 내용 역시 학생을 민주적 품성과 지성을 지닌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민주적 품성과 지성을 지닌 시민”이라고 하면 그간 학생운동의 논리와 정서로서는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 미약한 미래상(像)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사회(학생운동권 내부가 아니라)가 최소한 ‘노동자에게 발목을 잡혔다고 주장하는 시민’ ‘그래서 노동자이자 같은 시민의 발목을 잡는 시민’을 길러내지 않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는지. ‘노동자와 시민의 대립구도’는 대학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학이 그 사회의 미래라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밝고 얼마나 어두울지…. 지하철 파업은 철회되었고 버들골은 다시 ‘평상’을 되찾았지만, 그러한 화두는 사그러지지않을 것이다. [이수강]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