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광장 대학살 10년 후: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적 교훈

제임스 코나치,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 6/4

편집자주: 올해는 톈안먼 학살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7호의 “미국의 68년”과 같이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안은 특집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0년 전 오늘자 뉴스 방송은 탱크와 피, 시신들로 가득찬 베이징 거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89년 6월 3일 저녁, 인민해방군 제27군 소속 4만명의 군대가 6주간 계속된 학생, 노동자들의 항의시위를 분쇄하고 그들의 정치 변화 요구를 종식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중국의 수도로 입성하였다.

이에 앞선 몇주간 중국, 특히 베이징은 특별한 사태를 목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톈안먼광장 점거는 태동하는 노동계급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독립노동자자율연맹(Independent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s)들은 많은 도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5월 20일부터 운동은 계엄령을 무시하고 계속되었고 중앙정부는 마비된 채 분열되었다.

이러한 마비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목격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군대가 수도를 되찾은 이후 계산된 테러가 진행되었다.

“… 명령이 떨어지자 군인들은 총을 들어 주민과 학생들을 향해 일제히 발포했어요. 총에 맞은 이들이 쓰러졌습니다. 총격이 멈추자마자 다른이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을 돌보러 뛰어나갔습니다. 시단 근처에 있는 병원 계단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어요. 그래도 교차로에서 투쟁이 멈추질 않았지요. 장갑차들은 바리케이드 위로 돌진하고 자동차와 버스를 들이받았습니다. 비무장인 사람들은 돌멩이밖에는 없었지요… 그 대가로 돌려받은 건 총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군인들은 그들 뒤를 쫓으며 총을 난사했어요. 주민들은 뒤뜰이나 수풀 속으로 도망갔지만 끝까지 쫓아가 그들을 죽였습니다.”({베이징의 잊을 수 없는 봄}, 류빈얀과 수강이 톈안먼광장 2km 서부의 시단 교차로에서 벌어진 사태를 묘사하는 부분, pp. 59-60)

“…빽빽한 연기와 최루가스로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F를 만났는데 그는 첫 번째 탱크가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버스를 들이받아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떨어뜨리고 버스를 불태운 광경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제 트럭들이 나아갈 방향은 동쪽이었고 한 대씩 이동했는데 속도가 느린 걸로 보아 앞에 어딘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베이징시 전체가 폭력과 극단적 동요 상태인 것처럼 보였어요. 장안대로 옆골목으로 행진하는 동안 우리들 수천명은 총격 중간중간에 ‘이 개새끼들아!’, ‘리펑? 파시스트다!’, ‘파업을 계속하자!’ 등의 구호를 박자에 맞춰 외쳤습니다. 군대는 발포로 응답했고 재빨리 웅크리거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 혹은 총알이 날아오는 걸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죽었지요. 사람들이 계속 땅에 쓰러졌고 근처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분노의 분위기가 공포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베이징일기}, 루유안, p. 16)

“…수많은 사람들(학생들만은 아니었어요)이 거리로 몰려 나왔습니다. 이들은 트럭을 따라가면서 항의구호를 외쳤습니다. 돌멩이 몇 개가 던져졌습니다. 군인들이 실탄을 발사했어요. 군중들은 땅에 엎드렸지만 다시 재빨리 군수송 트럭을 따라갔지요. 더 많은 총알이 발사될수록 사람들의 결의와 분노가 높아졌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돌로 무장한 채 군인들을 향해 던졌지요. 화염병도 몇 개 등장했는데 결국 맨 뒤의 트럭은 불이 났지요.”(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 89년 8월 30일.)

베이징의 노동계급은 이러한 증언의 세 배를 나열할 수 있다. 수만 명의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도시와 정치적 목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바리케이드를 강화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군대의 이동을 저지하다가 수백 명이 총에 맞아 거리에 쓰러지거나 장갑차에 깔리고, 혹은 구타당하거나 총검에 찔려 죽었다. 사상자수는 톈안먼광장 동부와 서부의 노동계급 주거지역에서 가장 많았다. 그날 밤 살해당한 이들의 숫자는 한번도 정확히 발표되지 않았지만 7천 명 정도까지 추산되고 있으며 부상자는 2만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오늘날까지 중국 정부는 85살 먹은 중국 스탈린주의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 시기에 나온 것과 동일한 비열한 거짓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1989년 6월 9일에 있은 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정권이 피로 물들인 당시의 운동을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반동적인 “반혁명 폭동”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톈안먼 대학살이 공산주의 정부와 친자본주의 운동 사이의 대결의 결과였다는 주장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적 증거가 없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을 통치한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성과 89년 5월에 걸쳐 중국에서 전개된 운동의 복합적인 성격과 요구들에 눈감을 때만 가능하다.

학생과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들은 또한 사회적 평등과 사회정의라는 원칙에 깊이 충실하였다.

89년의 운동은,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라는 중국 인민의 희망을 40여 년간 배반하고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시장경제를 강요함으로써 전례없는 불평등과 새로운 자본주의 엘리트의 등장을 초래한, 부패한 스탈린주의 관료제에 대해 오랫동안 억눌린 불만과 증오의 표출이었다.

새로운 부르조아지

89년의 사회적 긴장에 바탕이 된 것은 일국적 자립경제 혹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전망이 도달한 정치, 경제적 궁지였다.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의 지배 관료제를 “불평등의 경찰관”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묘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마오쩌뚱의 농민운동이 낳은 관료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후진적 경제의 국가통제 생산을 조절하고 이를 선진자본주의 중심부의 산업과 상품의 경쟁이나 침투로부터 보호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 대한 노동계급의 어떠한 도전에도 억압으로 일관한 것은 상당수의 국가, 당 관료 계급이었다. 이들의 통치는 일차적으로 농민 적군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재산 소유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가능케한 물질적 특권과 수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80년대에 우리는 스태그네이션과 경제적 붕괴에 직면하여 사적 소유 관계의 복원과 세계자본주의 시장으로의 재통합을 통해 자신들의 물질적 이해를 보존하고자 소련과 동유럽, 중국의 스탈린주의 관료제가 방향전환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전망은 서구 자본주의 전체에서 경축되었다.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나 중국의 덩샤오핑 같은 인물은 위대한 예언가이자 개혁가로 축복받았다. 러시아식 표현인 페레스트로이카(경제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치개혁)는 대중매체에서 너무 반복되어 오래지 않아 가정에서도 쓰이는 말이 되었다. 1985년에 [타임(Time)]과 [내셔리뷰(National Review)]는 덩샤오핑을 “올해의 인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1979년 이후 덩샤오핑은 일련의 시장개혁을 감독해서 나라의 많은 부분을 특별경제지구을 통해 초국적기업과 다른 민간기업의 활동에 개방하고 집단농장을 파괴하였으며, 농촌에서 토지에 대한 사적 통제를 재제도화하고 중앙 경제조절과 계획을 포기하였다.

80년대 중반경에는 많은 생산재, 소비재 가격이 시장세력에 의해 정해지고 있었으며, 완전고용 보장의 종식,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종신고용 잠식, 비국가 경제부문의 성장 등을 통해 노동의 ‘자유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개혁의 효과는 국가와 당 관료에 의한 광란적인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토지와 계약을 자신들에게 할당하고 사업 시장을 수립하거나 대규모적인 매수나 절도에 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과 연계를 활용함으로써 80년대 말에 이르러 공산당 ‘간부’들은 스스로를 초기 자본가계급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한 예로, 한 농업지역에 대한 1984년의 조사는 ‘부유한’ 가계 중 43%를 당원이 차지하고 있음(이 수치는 그들의 친구나 친척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을 보여주었다.({덩샤오핑 시대: 1978∼1994년의 중국 사회주의의 운명에 관한 일 연구}, 모리스 마이스너, p. 315) 집단적 재산의 분배 동안 당간부들이 어떻게 부유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간략한 묘사는 첸 마을에 관한 연구에서 나열되어 있다.

“당 비서로서 칭파가 제일 큰 몫을 얻었다. 강 주변에는 큰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당) 위원회는 그것을 입찰에 붙이는 대신 칭파에게 10위안에 넘겨 버렸다. 숲의 가격은 10위안의 백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칭파는 지난 10년간 의료용으로 재배된 인동덩굴 구릉을 무가(無價)로 자신에게 할당했다. 그는 군대로 하여금 불도저를 임대해서 미완성된 둑으로 둘러싸인 땅을 다시 평탄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땅의 주요 부분을 자신에게 분배하고 농장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경작하도록 하였다.”({첸 마을: 마오 시대 중국 농민공동체의 최근사}, 아니타 찬, 리차드 매드슨, 조나선 웅거, {덩샤오핑 시대}에서 인용, p. 316)

새로운 농촌 부르조아지의 태동은 도시 지역에서 나타난 훨씬 좋은 돈벌이 기회, 특히 특별경제지구에서의 해외자본과의 결탁과 동반자 관계에 의해 무색해졌다. 만여 개의 기업이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묘사한 대로 “당 관료와의 특권적 연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 중 134개는 고위관료나 장관, 혹은 급여총액에서 이들에 비견되는 사람들을 자랑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최고위 정부 관료의 아이들이었는데, 이들은 오래지 않아 ‘왕세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덩사오핑과 전수상 자오쯔양의 아들은 80년대 말 무역회사들과의 연계 하에 국가 기금을 이용해서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특별경제지구에서 생산되거나 수입된 희귀 소비재를 구매, 국내 시장으로 재판매하여 소위 ‘사회주의 기업가’들에게 이윤을 유입시킨 가장 유명한 ‘왕세자’들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 것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 의한 차입 열풍이었는데, 이로써 중국의 대외채무는 1979년 거의 0에 가까운 액수로부터 1990년의 5백억 달러로 폭증하였다.

중국의 부정 폭로 언론인 류빈얀은 모든 중국 해안지역 성(省)이 민간자본에 개방되고 은행신용에 대한 통제가 제거된 1988년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장악한 관료층이 중국 경제를 전례없이 추락시키고 수백억의 공공자산을 횡령한” 시기로 묘사하고 있다.({중국의 위기}, 류빈얀, p. 29)

시장개혁의 충격

관료들이 부유해짐에 따라 대다수 중국 인민은 소득확보와 사회적 지원, 구매력 등에서 저하를 겪게 되었다.

집단농장의 붕괴와 증오스러운 재산의 분배로 인해 수백만의 농민들이 땅을 잃게 되었다. 1989년경 농촌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 5천만 이상의 사람들-주로 젊은 노동자들-은 도시 지역과 특별경제지구로의 대규모 국내 이동을 시작하였다. 농촌 지역의 기업가들이 토지를 보다 수익성있는 다른 용도로 전환하면서 80년대 말 곡물 생산은 위기 수준으로 하락했다.

중앙계획과 가격통제의 종식은 중국 노동계급에 대한 대파괴를 가져왔다. 폭리취득, 매점매석, 투기, 통제되지 않는 통화공급 증대 등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중국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과 식료품과 생필품의 부족에 시달렸다.

88년 3월 당 서기장 자오쯔양은 중국 인민은 “상품 경제에서 헤엄치는 법을 학습”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해 말에 이르러 중국 인민들이 익사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

12개월도 안 되어 통화공급이 50%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증가되었다. 공식적인 인플레이션률은 30% 이상의 도시에서 19%에 도달했고 실업이 증가하고 있었다. 산업은 에너지와 원자재의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고 공장과 설비가 종종 폐쇄되었다. 농업 생산은 3년 내리 하락했고 결국 곡물의 대규모 수입이 불가피했다. 외채는 통제불능으로 상승하였다.

자신이 수행한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인 기록적인 예산 및 무역 적자에 직면하여 중앙정부는 88년 말에 긴급 긴축조치를 강요하였는데, 이는 신용완화 정책을 뒤집고 공공지출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중국 전체적으로 채무에 기반한 건설 및 산업개발 붐이 붕괴되고 기업은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임금 및 수당을 절감하고자 했으며, 모든 정부는 교육과 사회서비스 지출을 축소시켰다.

모든 중국 인민들에 있어 이는 시장개혁에 대한 마지막 환상이나 체제에 대한 신뢰에 가해진 마지막 타격이었다. 88년을 마감하면서 제출된 경찰 보고서는 노동자 파업과 대중집회의 “놀라운 증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전반에 필요했던 것은 89년 4월의 학생운동이 제공한 불씨였을 뿐이다.

89년 학생운동의 기원

89년 학생운동을 모양지운 주요한 배경은 그보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좌파적 입장에서 스탈린주의를 공격한 지식인층을 격렬하게 탄압한 후 정권은 대중적 논쟁을 고무시켜 친시장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당시 진행되던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지를 마련하였다. 80년대 국가기구에 의해 추구된 전반적 정책은 민주주의가 아닌 삶의 질 개선과 위신 향상이라는 약속으로 교육받은 전문직층을 자신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시장개혁이 관료제와 노동계급 사이에 항존하는 갈등을 고양시킬 것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던 스탈린주의적 당 내부의 지배 파벌들은 독재 통치에 대한 어떠한 균열도 권력의 공백을 낳게 될 것(그 결과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야기할 것이라는 점)이라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80∼81년 동안 진행된 폴란드의 연대노조 운동은 이러한 공포를 가중시켰다.

그러나 전문직 및 지식인 프티부르조아지의 상당 부분에게 시장개혁은 약속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배정당에 참여했지만, 부의 분배는 이들이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기존 관료층 내부에서 진행되었고 인플레이션과 경제혼란은 모든 사회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관료제 고위 계층에 만연한 재산축적에 대한 진정한 분노가 존재하긴 했지만, 중간층으로부터 퍼져나온 정치개혁의 희망은 자본주의 부활의 방향과 혜택에 대한 이해관계의 열망과 직접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언론 및 결사의 자유라는 요구의 객관적인 내용은 태동 중인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를 독점하는 국가기구의 능력을 억제하고 이를 다른 층에게도 개방하도록 하기 위한 무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중국 인민대중-결과적으로 보자면 민주주의자들은 체제만큼이나 이들을 두려워했다-을 동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관료제 내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공감하고 대의를 도모할 수 있는 당파들에게로 향했다. 이러한 지적, 정치적 관점은 89년의 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의 절대 다수는 당간부나 전문직 프티부르조아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었다.

89년 4월 15일 전 당지도자 후야오방(그는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시위에 지지를 보낸 2년 후 공직을 박탈당했다)의 죽음은 사회적 불만의 표출에 추진력을 제공하였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고 죽어야 할 사람들은 살아 있다”라는 외침은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불만이 가장 급진적으로 표출된 대학가에서 대중적인 구호가 되었다. 경쟁세력과 비교하여 후야오방의 미덕을 찬양하는 추모집회는 곧 교육예산 증대, 언론 자유, 공산당과 독립적인 학생연합체의 결성 권리, 다양한 탈선으로 불신임당한 지식인들의 복권 등이라는 요구에 길을 내주었다.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는 수단은 자연스럽게 중국에서의 정치적 항의의 상징적 중심인 베이징 심장부의 톈안먼광장 앞에서 진행된 매일시위가 되었다. 이 곳은 국가기념물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이자 주위에 많은 정부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항의시위의 나날들 이후, 후야오방의 장례식인 4월 22일 광장에서의 대중집회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무시하면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민주개혁과 후야오방의 주석직 사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깃발을 들고 톈안먼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점차 급진화된 21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은 다음날 회동하여 베이징대학생자율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동맹휴업을 선포하고 정부가 자신들을 인정하고 만나줄 때까지 시위에 참여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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