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런 동티모르 약사(略史)
제프리 베너 마더존스(mother jones) 동티모르 뉴스
1975년 인도네시아군이 침공한 이후, 20만 명 이상의 동티모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국제 사면위원회는 추산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 수를 10만 정도라고 주장한다.) 동티모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작은 섬의 절반일 뿐이다. 현재. 수세기의 식민 통치와 또 수십 년의 고난과 저항이후, 동티모르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유엔이 주관하는 8월 30일의 주민 투표에서 동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분리할 것인가, 통합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황폐한 전초 기지로 400년을 시달린 후, 1974년 동티모르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그해 4월 일련의 좌파 군장성들이 포르투갈의 독재자 마르셀로 까에따노를 리스본에서 몰아냈다. 새 정권은 포르투갈의 옛 식민 제국의 일부로 그때까지 남아있던 앙골라와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등에 자유를 줄 것이라고 여겨졌다.
임박한 독립의 예상 속에 동티모르에는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재빨리 등장했다. 티모르 민주연합(UDT, 이하 민주연합)과 독립 동티모르 혁명전선(FRETILIN, 이하 혁명전선)이 그것이다. 1975년 1월, 두 정당은 연립하여, 나라를 세울 준비를 했다.
슬프게도, 인도네시아의 강력한 이웃인 인도네시아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동티모르를 통치하기로 결정한 군부 지도자들의 조종 하에 인도네시아 정보원들은 동티모르 독립을 향한 평화로운 진행을 방해했다. 1975년 5월 인도네시아 첩자들은 민주연합이 연립에서 탈퇴하도록 공작을 진행했다. 8월, 좌익인 혁명전선이 포함되는 그 어떤 독립 동티모르 정권도 인도네시아가 허용하지 않을 거라는 설득에 넘어간 민주연합은 독자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혁명전선은 투쟁에 나섰다. 대다수 동티모르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혁명전선은 곧바로 정권을 되찾았다. 민주연합 세력과 그 가족들(약 2만 5천 명)은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 국경 너머로 축출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포르투갈 관리들은 전투 중에 도망쳤다.
침략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략했다. 미 대통령 제랄드 포드와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자카르타에서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떠난 하루 후였다. 그 이후 동티모르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점령하의 끝없는 고통뿐이었다.
초기의 군사 공격 동안 동티모르 60만 인구의 대부분이 혁명전선의 무장세력인 팔린틸을 따라 섬 동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전쟁이 질질 끌면서 굶주림과 융단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도네시아군(ABRI)이 통제하는 캠프나 마을에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군사 공격과 처형, 굶주림(곡물은 수확을 포기한 채 버려졌다) 그리고 강제적 이주와 질병들로 점령 첫 해에만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팔린틸에 대한 간헐적인 군사 공격이 계속되었고, 다수 민간인들에 대한 강제적 이주 조치가 빈번히 취해졌다. 군부는 주민들의 협력을 강제하고,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잔인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여기에는 강제 이주와 강간, 강제 불임 수술, 징집, 고문, 살해, 모욕 등이 포함된다. 동티모르인 네 명 중 한 명이 이 싸움 속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과 더불어 미국 역시 이 테러에 연루되어 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를 공산주의에 대한 싸움에서의 값진 동맹군으로 대접했고, 원조와 훈련, 무기들을 제공하면서 수지맞는 무역상대로 간주해 왔다. 냉전 종식,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서구 지지세력들에 대한 점증하는 국제적 비판, 미국의 대 인도네시아 정책에 대해 늘어만 가는 의회 내 이견 등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온존하고 있다.
희망의 첫 조짐들
80년대 동안 동티모르의 독립은 잊혀진 이슈처럼 보였다. 인권 그룹이나 저널리스트를 포함하여 외부인들에게는 봉쇄된 지역이었던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통치를 계속할 수 있었고 동티모르인들은 고립된 채 고통의 나락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승리”로 인한 인도네시아의 과도한 자신감은 1989년 해방 투쟁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정책의 극적 반전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 다른 주들로부터의 정착자들과 사업가, 관광객들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개방했다. 그해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동티모르를 방문했다. 동티모르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카톨릭에 대한 중대한 제스처였다. 몇 달 후,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 데이비드 뉴솜도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를 잠시 방문했다.
인도네시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새로운 개방 전략은 재난이었다. 동티모르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이것은 외부 세계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목의 대가는 너무 비쌌다.
교황의 연설 동안 시위대가 연단으로 돌진해서 독립을 요구하는 깃발을 흔들려고 시도했다. 당국이 접근하면서 의자를 던지는 등의 소란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필름에 잡혔고,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미 대사의 딜리 방문 시에는 시위대가 호텔 밖에서 그를 만났다. 인도네시아 경찰은 폭력적으로 항의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두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로서는 훨씬 더 좋지 않은 기사거리를 만든 셈이었다.
동티모르 상황에 대한 점증하는 인지 속에 서방 저널리스트들이 취재를 위해 동티모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당국은 그 어떤 정치적 이견도 나오지 못하게 막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91년 이 두 가지 동력이 충돌, 해방 투쟁에 한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산타 크루즈 학살
1991년 11월 21일 미국인 앨런 네언과 에이미 굿맨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서방 기자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딜리에 있는 산타 크루즈 묘지에서 수백 명의 비무장 독립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목격했다. 영국인 사진기자가 이 장면을 비디오에 담았다. 군인들과 시위대 사이에 뛰어들려 했던 네언과 굿맨은 총기 위협과 구타 협박을 받았다.
첫 목격자들은 최소한 백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그 이후 [동티모르에서 평화는 가능하다]라는 동티모르인 조직이 271명의 사망자를 집계했었다고 알려졌다. 여전히 헤드라인에 실리지는 못했지만 서방 세계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네언과 굿맨은 미 의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독립 운동은 더 나은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훨씬 더 긍정적인 루트를 통해서였다. 1996년 동티모르 민족해방운동의 오랜 활동가였던 호세 라모스-오르따와 카를로스 크시메네스 벨로 주교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오랫동안 자행하고 있는 인권 침해에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라모스-오르따는 동티모르인들의 투쟁을 “냉전의 각주”라고 지칭했다. 작년 정치적 분위기는 마침내 동티모르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97년 통화 위기로 인도네시아 경제가 무너지면서 1998년 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폭동과 약탈이 저질러졌다.
학생 시위대는, 1967년이래 주로 서방 세계의 지지 덕분에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수하르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경제 구제에 대한 조건으로 국제통화기금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붕괴 위험에 빠뜨렸다는 부패 관행-당시 수하르토의 가족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다-의 개혁을 요구했다. 그리고 안팎에서 집중되는 압력으로 5월 21일 수하르토는 사퇴했고, 정권을 그의 부통령 하비비에게 양도했다.
중심부로부터의 놀라운 변화
동티모르로서는 달콤한 횡재였다. 하비비가 자신의 정치 생명이 달린 문제에, 인도네시아 정국이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새 정부는 동티모르는 이미 풀릴 준비가 된 문제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동티모르에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12월 유엔의 특사가 방문했고, 마침내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포르투갈과, 그리고 심지어는 수감 중인 독립운동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와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려 한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1월 하비비는 정부의 자치 제안을 동티모르 주민들이 거부할 경우 이 말썽 많은 지역은 독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신중한 낙관 속에 오랜 적으로부터의 예기치 않은 특별한 양보를 맞이했다. 즉석 기자 회견에서 구스마오는 “늦었지만 아주 없었던 것보다는 낫다”고 간단히 말하고, 유전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했다. 5월 5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유엔이 인도네시아의 자치 제안에 대한 주민 투표를 감독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서에는 자치 제안이 거부될 경우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계속되는 폭력
외견상 인도네시아의 양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축복이었다. 독립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천명된 이후, 다시 한번 폭력이 동티모르에 몰아치고 있다. 인도네시아군의 비호아래 친통합 민병대들이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고문과 살인, 협박 등으로 동티모르인들에게 통합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현재의 폭력 수위에 대한 통계는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어쩌면 훨씬 더 높을 수도 있다. 수만 명이 겁에 질린 채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약 4만 명의 주민들이 군대의 통제하에 있는 “난민 캠프”에 머무르고 있다. 유엔 투표 센터와 직원들 역시 위협과 공격을 받았다.
투표일을 두 번씩이나 연기시킨 바 있는 폭력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유권자 등록은 현재 완료되었으며, 놀랄 만큼 성공적이다. 거의 45만 명의 주민이 등록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유권자 자격을 갖추고 있다. 8월 15일 (독립과 통합 유지의) 양측 지지자들이 2주간의 선거 운동에 들어갔지만, 폭력의 난무로 얼룩지고 말았다.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투표를 며칠 앞둔 현재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일단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가 이루어진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치 제안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불길한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민병대가 무기를 비축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주민 소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이라고는 유엔의 비무장 선거 관리 요원들뿐이며, 많은 사람들은 자치 거부가 가져올 급격한 혼란을 두려워하고 있다. 유엔은 민간 경비 직원들의 수를 두 배로 늘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들 경비원 역시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급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유있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걱정 이면에는 거대한 희망이 살아 있다. 폭력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대규모 인파가 유권자 등록을 위해 몰려든 것은 그들의 인상적인 승리인 것이다. 거의 매일 시대가 진정으로 바뀌고 있다는 새로운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주 인도네시아 당국은 투표가 끝난 직후 사나나 구스마오를 비롯한 모든 동티모르 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테러로 얼룩진 수십 년의 세월 끝에 동티모르 역사의 이 어두운 장이 마침내 끝을 보이며 물러나려는 찰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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