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운동의 위기’라는 유령이 노동운동을 배회하고 있다. 노동조합 상층
부와 모든 진보적 이론가들은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 등의 매체를 통
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서로 격렬한 지상논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극복방안으로는 ‘사회적 조합주의’, ‘노동조합 21세기 위원회 구성’
등등이 제시되고 있다. 이 모든 방안들의 전제는 유령의 실체가 안으로는 조직
율의 급격한 하락, 이에 따른 노조 재정의 어려움, 현장과 노조 상층부와의 내
부갈등에 있고, 밖으로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와 이로 인해 무법천지·존
폐위기를 맞고 있는 민주노조의 상태에 있다.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위기가 이미 노동운동에 있어 하나의
징후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과, 위기를 기회로 대치시켜야 할 절호의 기회가 닥
쳤다는 것이다.
이쯤에 와서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일목요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작
년 9월 28일 민주노총 사무실의 벽과 바닥에는 “노동자 다 죽이는 사회적 합의
박살내자! 정리해고·고통전담 노사정위 박살내자!”라는 글자로 어지러웠다. 얼
마 후 IMF가 닥쳤다. 이 비극은 현대자동차 사태와 만도기계 사태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란 곧 노동운동이 총자본과의 힘겨루
기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와 요구에 의해 결성된 조직체일 뿐 투쟁
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힘겨루기에서 밀리면, 노동조합에는 두
가지의 현상이 발생한다. 노조 상층부와 조합원 대중의 논리가 상반되는 그것이
다. 노조 상층부는 교섭, 즉 타협을 위해 존재한다. 반면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스스로 보호해야 할 절실함을 호소한다. 이 호소는 사측과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을 낳기도 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현 정세 하에서 조합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정도와 원칙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
다. 그것은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이다.
현대중공업노동조합 노보 『민주항해』 편집팀이 노조 방침에 반하는 글을 썼
다 하여 퇴출당하는 현실은 노조 상층부가 현장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고용불안은 이미 전체 노동자의 문제가 되었
건만 정작 투쟁에 나서는 곳을 보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에 머물고 그나
마 연대투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절
감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상반기 투쟁이나 하반기 투쟁전술에 관해서도 한편에
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워 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진정한
위기는 내부에서 시작되었으며, 패배가 구조화되는 현재의 상황 역시도 내부에
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의 본질은 내부의 위기이다.
자본의 공세는 강약을 떠나 언제나 존재했으며, 노동운동의 위기는 해방후 전
평 운동 괴멸, 70년대 유신정권의 야만적인 탄압, 그리고 90년대 초반에도 늘상
있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위기의 전말은 노동대중의 힘을 불신하는 데 있다. 그
럼, 누구의 힘을 믿을 것인가?
죽을 맛이라고 한다. 하지만 책임을 현장에 떠넘기고, 이것을 객관적인 정세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정리해고를 받아들여도 자신
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이것이 현대자동차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아래로
부터의 집합적 힘만이 대안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인정하면 행동하라.
내부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줄 수 있는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네
트워크 주간뉴스, 9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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