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배반당한 혁명을 넘어 참 혁명의 싹을 틔우는 멕시코
박 찬 식
어떻게 보면 너무나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멕시코를 가게 되었다. 멕시코에서도 전력산업 민영화 문제로 전력과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멕시코 전력노조(Sindicato Mexicano de Electricistas; SME) 주최로 전력산업 민영화에 대한 국제 세미나가 열린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세계적인 전력산업 민영화의 충격 : 국가, 발전, 주권’이라는 세미나의 주제는 우리의 상황과 그대로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전자우편으로 편지를 나누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미나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이었다. 출발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야 확정된 일이라 세미나에 대해서도 그렇고 멕시코 전반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준비가 부족한 채로 서둘러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흘 동안의 방문에 불과했지만 멕시코는 서로 상반되기까지 한, 참으로 다양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동행하게 되었던 어떤 건설회사 직원은 멕시코의 심각한 치안상태를 거론하며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저녁시간 거리를 다니는 택시의 절반 가까이가 훔친 차를 몰고 다니는 강도이고, 길거리나 심지어는 버스, 지하철에서도 흉기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별다른 불상사를 겪지는 않았지만 치안문제에 대해서는 수차례 들을 수 있었고, 시외버스를 탈 때마다 우리나라 공항에서처럼 가방과 몸을 수색하는 것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었다.
치안문제가 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거리나 술집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소박하고 친절했다. 멕시코는 벌써 70년대부터 자동차가 대중화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앞서 나갔던 나라이고, 멕시코 시티는 인구 2천만의 거대 도시이지만 우리나라 서울에서처럼 현란하고 음습한 분위기의 거리나 술집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대학로 비슷한, 하지만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어린애로부터 노인들까지 누구나 가는 가리발디 광장에서는 약간의 돈을 주고 거리의 악사패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도 했다. 술집에서도 악단과 가수가 있어 노래를 신청해 들을 수 있었는데, 가수도 무대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 놀랐던 것은 지리적으로 미국 바로 밑에 있지만 영어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세계적인 관광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간판이나 거리 표지판에서조차 영어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고 큰 가게나 심지어 호텔 직원들조차 간단한 영어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적어도 보통 민중들의 일상생활(문화) 측면에서 멕시코는 우리보다 ‘미국화’가 훨씬 덜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멕시코 혁명의 두 얼굴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려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역을 따라 갔는데 그 역 이름이 ‘리베라시옹(혁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혁명’처럼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혁명’역이라니! 맨 처음 그 역 이름을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은 참으로 야릇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엽서나 판넬을 파는 가게에 가면 어디서나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의 초상을 볼 수 있었다. 러시아의 혁명가로 스탈린 치하에서 멕시코로 망명했던 트로츠키의 기념관도 있다. 하긴 집권당의 이름이 ‘제도혁명당’이고 거기에 도전하는 중도좌파 야당의 이름은 ‘민주혁명당’이다. 멕시코는 그야말로 ‘혁명’의 나라인 셈이다.
이렇게 일상화되다시피 해 있는 ‘혁명’이라는 단어처럼 멕시코가 지닌 양면적 이미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좌파들은 지배자들이 ‘혁명’이라는 말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민중들을 통제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는 것이 멕시코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예컨대 멕시코의 노동조합들 중에는 ‘혁명’이라는 수사를 앞세우고 있는 조직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 오히려 철저하게 수혜적인 국가조합주의(코포라티즘) 체제에 안주해 왔으며 80년대 이후에 제도혁명당이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도 협조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예수회 계통의 노동인권단체(우리나라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유사한)에서 만난 한 신부는 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분출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혁명이 국가코포라티즘 체제로 제도화된 이후 노동자·민중들도 국가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경험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죽은 혁명’이 살아있는 민중들의 삶과 운동을 질식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혁명은 오로지 부정적인 유산만을 남기고 있는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번도 승리한 혁명의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역시 혁명을 한 나라로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측면도 적지 않았다. 좀 멀리 보자면, 그래도 쿠바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 정부를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가 멕시코였으며, 고립무원 상태에 있던 칠레의 아옌데를 초청해 환대한 나라도 멕시코였다.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초국적 자본에 깊숙이 예속되어 가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나라가 멕시코이기도 하다.
최근 세계 최대 규모의 멕시코시티의 국립대학은 학생과 노조의 전면파업으로 5개월째 학교가 완전히 폐쇄된 상황이다. 현재 1페소(우리 돈으로 130원 정도)에 불과한 학기당 등록금을 5만원 가량으로 현실화한다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소득수준을 고려하여 등록금을 차등화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지만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만은 빈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그것이 혁명정신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교수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학생들과 함께 격의없이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전력산업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도 역시 멕시코 혁명의 정신과 그것을 규정한 헌법조항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배측이나 저항세력이 모두 ‘멕시코 혁명’을 앞세우고 있는 데는 멕 시코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도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멕시코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멕시코는 서구인(주로 스페인 출신)과 인디오 선주민간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디오가 약 10%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민족적 뿌리와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인종과 계급계층을 떠나 하나로 뭉쳐 싸우고 승리했던 혁명의 기억이 멕시코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주는 구심 역할을 해온 셈이다. 사실 오래 전에 이 혁명은 배반당했다고 볼 수 있다. 1934년부터 1940년대까지 집권한 까르데나스는 혁명의 양면성을 체화한 마지막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자, 농민에 무게중심을 두고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확대하고 유례없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자, 농민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철저하게 제도화하여 국가코포라티즘 체제를 완성했다. 까르데나스를 뒤이어 1940년에 집권한 까마쵸 정권 이래 멕시코 정부는 계속해서 우경화로 달려왔다.
집권 제도혁명당과 조합주의(코포라티즘)적 노조들은 여전히 혁명의 계승을 내세우고 있지만 좌파세력들은 까마쵸 정부로부터 멕시코 혁명의 전통은 단절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양극단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 모두 혁명의 전통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은 멕시코 혁명을 말하지 않고는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 정권들이 3.1운동이나 4.19혁명을 말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무게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멕시코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의 성공으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계속했고 그러한 경제적 성과는 후견적인 코포라티즘 체제 (corporatism-clientelist)를 유지하는 물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1982년 멕시코가 외채위기를 겪고 IMF의 강요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이래 멕시코 현실은 혁명의 전통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혁명 직후부터 철저히 배제된 인디오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그 과정에서 사빠따와 같은 혁명가들이 살해당했다) 대다수 민중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빈부격차는 끝없이 벌어지고 실업자가 급증하여 절대빈곤층이 인구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아동들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준 국가기구화한 공식 노조는 이러한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국가와 공식 노조가 제공하는 수혜에 길들여진 노동자·농민들의 경우 불만은 쌓여가고 있지만 전투적인 저항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2년 전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기치 아래 코포라티즘 체제에서 이탈한 노조들이 약 150만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노 동자연합(UNT)을 결성했지만 아직까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하지는 못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보면 이러한 모습들이 멕시코를 압도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혁명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멕시코는 여기에 머물고 말 것인가? 혁명의 전통은 이제 단절되고 마는가? 1994년 1월 1일 사빠띠스따의 봉기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통렬한 대답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헤게모니를 선언하던 그 순간, 서구를 비롯한 세계의 좌파들마저도 그 헤게모니 하에 고개를 숙이던 그 순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멕시코의 라깐돈 정글에서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투쟁 선언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나지막하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에 동참하고도 혁명으로부터 배반당한 깊은 좌절의 역사 속에서 오랜 담금질을 통해 질적으로 새로운 혁명운동의 불씨가 지펴진 것이었다. 그들 역시 20세기초 멕시코 혁명의 전통으로 돌아가 그 혁명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인디오의 영웅이었던 사빠따를 다시 불러냈다. 사빠띠스타 운동은 그러나 사빠따에 머물지 않고 멕시코 역사의 해묵은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메스티조와 인디오 선(先)주민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냈다. 마르코스를 비롯한 메스티조 출신의 혁명운동 세력은 이미 서서히 혁명운동의 기운을 키워가고 있던 인디오 선주민들 속에 들어가 그들 속에 자신을 녹여내고 하나가 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또한 20세기 전 세계 혁명운동이 가졌던 한계까지도 넘어서는 혁명운동의 새로운 사상과 원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라는 기치 하에 ‘참’과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이름 없는 민중들을 세상의 참된 주인으로 세워내는, 그리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위해 흔들림 없이 전진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사빠띠스따 운동의 정신과 원리가 멕시코에서 얼마나 확산되고 있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동참하고 있었고, 특히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의 투쟁에서는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의 투쟁과 멕시코 전력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사빠띠스따 운동을 하나로 모아내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들이 서서히 확대되어 갈 때 멕시코는 배반당하고 박제된 혁명의 질곡을 뚫고 참 혁명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출처: 주간정세동향 9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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