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에서의 학살”
– 한국 역사의 지체, 그 역사인식의 지체-
이수강 <카피레프트모임>
49년 전의 ‘과거지사’인 노근리 양민학살의 최근 보도가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한국에서의 역사의 지체, 역사인식의 지체, 인권의 지체, 인권의식의 지체, 대외관계의 지체, 대한민국 국가의 ‘정상적’ 기능의 지체, 하여 한국 사회 총체적 지체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무엇이 그러한가. 여기서는 주로 역사의 지체, 역사인식의 지체에 촛점을 맞추되, 몇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노근리 학살사건이 보여주는 역사, 역사인식의 지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냉전시대의 대사건이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규정력이 반세기를 경과하고도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물증은 물론 국가보안법의 존재이다), 한국전쟁이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거대한 신화가 벗겨지는 데 필요한 대중적 인식의 확산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노근리사건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1950년 7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부대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마을 주민들을 피난시켜 준다며 집결시켜놓고는 집단적으로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단순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 미숙한 군인들의 우연한 실수일 뿐인 걸까. 물론 그래서 더욱 피해자가 많았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사건이 AP통신에 의해 꼼짝못할 증거제시와 함께 보도되고 난 뒤, 한미 양국의 진상규명 작업 단계로까지 나아가자, 전국 각지에서 고발되고 있는 유사사건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한겨레](10월 13일자)에 의하면 벌써 단양, 예천, 구미, 익산 등 10여곳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울릉도 주민이 고발하고 있는 어선 피격 사건은, 보통 알고 있는 전쟁 기간 중이 아니라 미군정 말기인 1948년 6월이 일어난 것이라니 더욱 ‘충격’을 준다. 미군들은 기본적으로 이 힘없는 약소국 주민들의 인권일랑은 아예 관심 밖이었거 나, 적어도 공산게릴라 색출에 비해서는 우선순위를 한참 뒤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충격을 잠시 가다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약간의 상식적인 상상을 펼쳐보자. 남한주민에 대한 학살은 미군만이 했을까. 그리고 미군은 남한주민만을 학살했을까.
대체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 한국전쟁은 남한 대 북한(국가 대 국가),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 간의 정규전·국제전으로서의 성격 뿐만 아니라, 좌익과 우익, 계급과 계급, 사회세력과 사회세력이 총력적으로 맞붙은 내전으로서의 의미가 또한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정규전과는 무관한 수많은 양민학살, 상호 보복, 그리고 게릴라 소탕의 피해자를 낳았던 것이다. “컷포스는 이 시기 이승만군대의 활동은 ‘전투라기보다는 대량학살’이라고 결론짓는다. 한 미대사관 직원은 1950년 9월 이승만정권의 남한에서는 ‘아마도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숫자는 전쟁 전기간에 걸쳐, 남북한을 통틀어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최고치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커밍스와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90, 148쪽).” 그런데 이 10만 명이라는 숫자에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정희상씨(당시 [말]지 기자)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전남북 지역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에 걸쳐 무려 1백만 명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다(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20쪽. 더욱이 강정구 교수는 1백만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한다). 또한 이승만 정권 수립 이전, 38선 이남지역의 통치주체였던 미군정의 경우는 어땠는가. 1948년 4월, 3만에서 8만 명의 목숨을 사냥(‘레드헌트’)했던 제주도 4·3학살(항쟁)은, 미군(정)에 의한 조직적, 체계적 대량학살의 원조로 불려야 마땅하다. 마산시 곡안리(1950년 8월 미군의 폭격, 총격으로 83명 사망 주장) 유족대책위원장은 “끔찍한 일을 회상하기 싫은데다 사상적으로 의심받을 우려 때문에 진상규명 등의 요구를 못했다”고 말했다 하는데([한겨레] 10월 13일자), “사상적으로 의심받을 우려 때문에” 말하지 못한 사연들은, 비단 ‘한국전쟁 도중, 가해자=미군, 피해자=남한의 양민’ 경우만이 아닌 것이다.
남한지역에서의 미군의 행적이 그러했다면, 즉 ‘양민’ 사이에 끼여들었을지 모르는 공산군 또는 좌익게릴라를 색출·제압하기 위한 작전이 그러했다면, 일시적이었지만 북한지역을 점령했을 때 미군은 어떠했을까. 북한에서 나온 자료이긴 하지만, 미군 점령 40여일 동안 “미군의 지휘, 감독 및 직접적인 적대행위에 의해 17만2천여 명의 북한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특히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 극심했는데, 군내 총인구의 1/4인 3만 5천여 명이 학살되었다는 신천에는 양민학살을 추념하는 박물관까지 있으며,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코리아에서의 학살(The Massacre in Korea)’의 배경이 바로 그 신천이라는 것이다(그 그림은 브루스 커밍즈의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과 강정구 교수의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표지화보이기도 하다). 또한 민간인과 비군사시설에 대한 무차별한 폭격이 이뤄졌으며, 화학전·세균전 의혹 또한 미군의 혐의로 남아있다. 물론 전쟁이 남긴 상처야 남북 가릴 것 없이 참혹한 것이었지만,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민중들”이었다는 최장집 교수의 서술에 비판을 가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반공냉전주의자들의 인식은, 그들이야말로 역사적 사실을 외눈으로만 바라보는 이데올로기 중독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다(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남한주민 피해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요약하건대, 한국전쟁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서부터 기원하는 내전적 갈등과 긴장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상황에서, 그리고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의 대립이 역시 일촉즉발의 긴장의 도를 더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정권이 화살을 날림으로써 정규전으로 발전되어, 진영간, 국가간, 계급간, 사회세력간 갈등이 폭발적으로 분출한 전쟁으로서, 그것은 대량양민학살 등 무수한 전쟁범죄를 부산물로 남긴 냉전시대 가장 비극적이고 뜨거운 전쟁(열전)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근 4백만명이 희생된 38개월의 전쟁이 낳은 것은 평화도 종전도 통일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정전은 곧 또다른 전쟁, 남과 북 사이의 전쟁, 그리고 남한 내에서의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이 50년간에 이르는 전쟁기간 동안, 남한의 ‘안보국가’ ‘군사국가’ ‘병영국가’는 전쟁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인권 및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적으로 간주했다. 국가는 곧 국가폭력의 적나라한 수행자로서, 50년간 인권을 ‘노근리 철교’ 밑으로 밀어넣었던 것이다. ‘무고한’ 희생의 해원(解寃)은 “사상적으로 의심받을 우려” 앞에서 물론 숨을 죽여야했다. “너 죽기 아니면 나 죽기”인 전쟁통에서 무슨 윤리와 룰이 필요하며 또 그 준수가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쟁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인, 인권무시주의의 발로이겠다. 또한 그러한 인식틀로서는 냉전시대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냉전시대의 극복은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냉전기간(베트남전쟁 포함) 동안 대체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 무엇이 숨겨져 왔고, 무엇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졌는가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는 데에서라야 그 출발이 가능할 것이다.
이제까지 ‘청산되지 못한 역사’와 역사인식의 지체에 대해서 서술해보았고, 그것과 맞물려있는 인권의식의 부재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덧붙여 이번 노근리 사건의 이슈화와 관련해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한 지식·정보 생산, 수용 및 사회적 구성에 있어서의 여전한 대외종속성, 비주체성 말이다. AP통신의 ‘특종’과 그에 따른 부산한 대응, 그리고 “우리 언론은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새삼스러운 자성의 모습은, 지난 1997년말 IMF 구제금융사태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당시에도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가해진 뒤에야 뒤늦게 각종 대책이 허겁지겁 제출되었고 또 “우리 지식인은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비판이 잇따랐었다.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 전반을 굳이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AP통신의 특종이 있기 전에도 노근리사건 규명을 위한 국내 언론의 보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며, IMF 사태 이전에도 학계 일각에서는 초국적자본의 준동과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제기한 지식인
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보도와 의견들은 국내 공론장에서 체계적으로 부정되었고, 사회적 의제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근리사건은 한국전쟁에 대한 상기와 아울러, 한국사회의 자기현실인식과 대응에 있어서의 50년간 변함없는 종속성, 비주체성, 대외의존성을 씁쓸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래도 금세기가 가기 전에, 이 정도라도 사태가 규명되고 있다면 역사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노근리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의 냉전희생자(‘양민’ 뿐만 아니라 군인과 게릴라를 포함해서)의 명복을 빌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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