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과 좌파

치코이그재미너(ChicoExaminer) 10/7

우리는 어떤 지점에 주목하는가?

체첸에서는 현재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병원, 방송국, 정유시설 등을 비롯, 현대사회에 필수적인 시설물들에 대한 나토식 폭격이 자행되고 있다. 수십만 명의 난민이 국경 밖으로 탈출하고 있지만 국제적인 원조 계획은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다. 본 기사가 강조하듯이 수십만의 러시아 지상군이 이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8만 명이 사망한 1994∼96년 전쟁의 대학살이 반복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번 군사작전은 IMF의 대규모 금융지원이 없었다면(1992년 이래 IMF가 제공한 차관은 2백억 달러이다) 불가능했을 것이며, 클린턴 행정부는 한술 더떠 원조 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측 관료들은 폭력사태가 증가함에도 아무런 비판의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몇 안되는 정부 성명은 94∼96년의 그것과 유사하다. 102억 달러의 차관 승인을 독촉하면서(그 중 절반은 체첸 작전에 투입되었다), 클린턴은 러시아가 “영토 보전을 유지”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물론 클린턴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사람들 중 누구에게 관심을 가질까를 골라잡는다. 코소보, 동티모르, 수단, 치아빠스, 체첸 등의 분쟁에 대한 행정부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판단해보건대, 미국의 외교, 군사적 개입은 서방 경제 엘리트들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하다. 가령, 수십만 티모르인의 생명보다 인도네시아 군도(群島)로부터 수익성있는 자연자원을 채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3천 명의 코소보인은 발칸반도의 폐쇄된 국가들로 전지구적 투자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구실이 된다. 따라서 거대한 러시아 경제, 특히 카스피해에 있는 잠재적인 유전 개발이 수십만 체첸인들의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침묵, 특히 진보적이라는 정치계의 침묵은 당혹스럽다. 자유주의적이거나 진보적인 뉴스나 논평자료들을 찾아봐도 공허할 뿐이다. 러시아 노동운동과 동티모르, 코소보,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다른 많은 이슈들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Z 매거진] 웹사이트도 체첸의 현재 위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네이션]은 언급조차 한 바 없다. 본지가 가입해있는 20여 개의 메일링리스트 중 어느 것도 체첸에 관해 다루지 않고 있다.

간혹 주류 언론은 오류투성이이고 종종 눈에 안띄는 구석에 실리긴 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비판자들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곤 한다.

체첸 약사

체첸인들은 적어도 6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독자적인 문화적 전통과 언어를 갖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이며 강력한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모스크바의 통치 아래 있던 코카서스산맥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체첸은 크림전쟁(1853∼56) 이후 러시아에 정복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나바호족과 대륙 서남부의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한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 러시아는 1859년에 체첸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코카서스 지역 민족들에 대한 러시아의 압제가 모스크바의 여러 체제들의 흥망성쇠와 특히 1920-21년의 야만적인 전쟁과 더불어 진폭을 보이는 동안, 러시아 지배에 맞선 체첸의 저항운동이 얼마간 지속되었다. 2차대전 시기에 체첸 지도자들은 독일이 체첸 독립을 인정할 경우 독일군의 진격을 환영할 것이라고 공표하였고, 스탈린은 이러한 발표를 가지고 비러시아인 일반에 대한 숙청을 정당화하였다. 1944년 (잉구쉬족, 카라차이-발카르족, 크림반도의 타타르족

등과 마찬가지로) 8십만 명의 체첸인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의 결과 4십만 명 정도의 체첸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소련 전체로는 150만의 소수민족이 사망하였다).

스탈린 이후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민족 갈등이 완화되었으며, 1956년에는 체첸 민족이 “복권”되어 1957년에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 체첸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으며 영토와 경제적 자원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었을 때, 조카르 두다예프라는 한 소련 공군 장성은 독립을 선포한 에스토니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상당한 명망과 환호를 얻었다. 고르바초프에 맞선 쿠데타 시도 이후의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체첸 출신인 두다예프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선거를 이끌었다. 1991년 10월 그는 체첸 독립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서방 국가들은 한때 소련이었고 당시에도 점령당한 상태였던 이 신생독립국들을 승인했는데, 이는 차르에 점령되어 있을 당시 체첸이 승인을 거부당했던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어쨌건 1994년경 보리스 옐친은 사실상 독립국인 체첸과 기꺼이 대결할만큼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러시아를 등에 업은 반란집단이 그해 11월 수도 그로즈니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12월에는 러시아 군대가 체첸에 대한 전면공격을 시작하였다.

1994∼96년 전쟁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로즈니는 폭격으로 흔적조차 없어질 정도였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한겨울 도시에 내버려졌다. 이 전쟁으로 약 8만 명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체첸의 결의는 단호했으며, 그들의 저항은 군사적 천재의 축복을 받았다. 러시아 본토 내의 두 도시가 저항군에게 점령당하고 러시아 내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러시아의 공격이 야만적이긴 했지만 전황은 체첸쪽이 우세하였고, 결국 그로즈니를 탈환하고 한때 세계 제일이었던 러시아군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 군의 전반적인 무력화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그루지아 고원의 무명의 분리주의 그룹이 러시아 군대를 격퇴하면서 지난 50년간의 서방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했을 때 이미 드러난 사실이었다. 옐친에 의해 국가안보 고문직에 임명된 전직 장성 알렉산더 레베드는 체첸 주둔 러시아 군부대를 시찰하고서 “굶주리고 벼룩이 득실거리며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약골들”이라고 러시아군을 묘사하였다.

레베드는 체첸과 휴전협정을 맺었고 체첸은 거의 이름뿐인 독립국이 되었다. 체첸 정부는 모든 자원을 관리하고 영토 내의 모든 결정을 내리지만 하나의 예외가 있다. 1996년 평화협정의 조항에 따라 체첸 영토를 지나는 러시아 송유관은 러시아가 관리하는 것이다.

현재의 분쟁

코카서스 지역 전체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는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결과에 맞닥뜨렸다. 예상되었던 바이지만, 러시아의 압제가 폭력성을 더해가면서 저항운동들 또한 보다 급진화되었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투사들 사이에서 호소력을 얻고 있다. 체첸이 러시아군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을 제공하면서 다게스탄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저항투사들이 이 곳에 캠프를 차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고향을 해방시키기 위해 공세를 벌이고 있다.

과거의 전쟁 덕분에 체첸은 파괴된 경제와 사회기반시설을 가진 황폐화된 지역이 되었다. 정부는 여러 민병대들을 통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지만, 집중화된 권력은 아직 미약하며 독립적 민병대들이 지역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두서너 달간 모스크바에서는 일련의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테러는 남부 분리주의 세력과 체첸인들에 혐의가 돌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여론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러시아 전역의 체첸 동포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고 러시아 군대가 진군하고 있다. 10여 일의 공습이 육군의 진격에 앞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체첸 영토의 북부 저지대의 러시아 통제 지역을 분리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의 지적처럼, 러시아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미국이 활용한 수사(修辭)와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레믈린과 연계를 맺고 있는 정책분석가인 알렉산더 이그나테프는 “러시아는 인도주의적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북코카서스와 러시아에 있는 수천 명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있으며, 이 때문에 행동이 필요하다.”

그로즈니 주변의 폭격 목표물에는 정유시설과 방송탑, 전화교환소, 그리고 아슬란 마스카도프 체첸 대통령의 자택이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의 장성들은 모스크바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민간인들을 살리기 위한 “조준” 폭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언론 브리핑은 그로즈니의 방송탑에 공습을 가하는 수호이 25기 조종석에서 찍은 비디오를 특집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토를 해방시키기 위한 폭격과 정복하기 위한 폭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체첸은 이미 얕잡을 수 없는 군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가 많은 사상자를 내지 않고 영토를 빼앗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현 분쟁의 양상을 보건대, 인접 국가들이 이 전쟁에 연루될 가능성도 농후하며 심지어 이란까지 개입할 수도 있다.

석유 코넥션

자유유럽 라디오(RFE)에 따르면, 현재 진행되는 전투는 마스카도프 대통령과 세르게이 스테파신 러시아 국무총리의 6월 11일 회담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같은 날 체첸 방위군은 바쿠-노보로시스크 송유관의 150킬로미터 구간을 장악하려고 시도하였다. 3일 후 송유관이 폭파되었고 러시아는 바쿠로부터의 선적을 중단하였다.

자유유럽 라디오의 말대로, 사실 1994년의 러시아의 체첸 침공은 “아제르바이잔이 아제르바이잔국제운영사(AIOC)와의 역사적인 카스피해 유전 계약에 서명한 지 정확히 석 달 후에 개시되었다. 이 서명은 송유관 루트를 둘러싼 경쟁을 촉발시킨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송유관 문제가 적어도 전쟁의 일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석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전쟁 후 모스크바 당국의 첫 번째 과제는 운송 계획을 협상하고 송유관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송유관의 재구축은 적대행위가 중단된 이후 인정받은 체첸에 대해 제시된 몇 안되는 약속 중 하나였다.” 자유유럽 라디오에 의하면, 석유 문제는 분쟁의 유일한 쟁점은 아닐지라도 “카스피해 송유관이 지나가야만 하는 다른 나라들과 이 지역의 영토들 모두에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좌파의 책임

우리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물론 진보주의자들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 자행되는 것이건 모든 인권 침해에 맞서 이를 옹호해야 한다. 러시아는 미국인 모두, 그리고 좌파진영에게는 더욱 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부 좌파는 잔인한 스탈린 체제에 보냈던 한 보따리의 지지를 여전히 들이밀고 있는 반면, 국가사회주의의 전반적 붕괴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 주제 자체를 회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정치적 곤란이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번역되어선 안된다.

아울러, 체첸 문제는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좌파 전반의 비판과 공명(共鳴)해야 한다.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 제공한 수십억 달러의 원조가 현재의 공격을 가능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로 이번 주에 러시아 군부의 계획 입안자들은 체첸 공습에 십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산하였다. 이는 서방의 원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비용이다. 미 정부 보조금과 IMF 차관을 등에 업고 확대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구소련의 소수 민족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는 것, 그리고 정부와 경제계획 입안자들의 정책목표를 분석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체첸은 석유산업의 또다른 톱니바퀴에 불과하며, 석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의존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결과한 민족 전체의 종속이라는 사례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는, 체첸의 현 상황은 신흥 자본주의 러시아의 완전하고도 철두철미한 도덕적 파산을 보여준다. 중앙집권화된 경제의 급격한 사망이 마피아의 통제, 대규모 빈곤, 군사적 모험주의 등을 낳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좌파 진영은 최소한 이러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과 IMF, 세계은행의 원조와 러시아의 인권 정책을 연결시키기 위해, 그리고 코카서스 지역에서 러시아가 철수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활동을 강화시켜야 한다. 궁극적으로 서방세계는 이슬람 민족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며, 체첸인들의 기본권과 안녕은 이를 위해 어느 사안보다도 좋은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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