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저항 트리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99/10 실뱅 데스미유
동티모르 저항세력은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강점에 맞서 단결한 집단들로 이루어졌고 수없이 진행된 대량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갖은 역경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그 저항세력이 하나의 단일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티모르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나타난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기복을 겪어왔다.
동티모르 저항운동을 이끈 세력 중 일부는 “붉은 카네이션 혁명”과 1974년 포르투갈 독재자 살라자르의 실각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1). 포르투갈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동티모르의 미래에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처음으로 집단적 세력으로 등장한 동티모르민주연합(UDT)은 정치사에 있어 주요한 지형이 되었다. UDT는 대부분 고도로 서구화된 중간층에 속하는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결정적인 선택을 위한 채비를 갖춘 만큼 국가를 단독으로 운용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이 운동의 지도부에는 도밍고스 데 올리비에라, 호아 카라스칼로, 그리고 카라스칼로의 동생인 마리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마리오는 1980년 인도네시아의 군홧발 아래 동티모르 “주지사”가 되는 데 합의함으로써 UDT를 배신했다.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이하 혁명전선)은 UDT의 경쟁자로 성장하였다. 맑스주의에서 영감을 얻고 마오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혁명전선은 동티모르 원주민인 모비르족을 광범위하게 흡인했다. 니콜로 로바토는 인도네시아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이 조직을 이끈 인물 중 한 명이었다. UDT와 혁명전선은 동티모르의 미래와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이념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양자 모두 독립을 원했다(2)(반면 동티모르민중민주연합(Apodeti)은 인도네시아로의 합병을 지지했다).
1976년 10월로 발표된 선거와 더불어 UDT와 혁명전선 간의 동맹이 해체되고 양 독립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한 것은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있어 중요한 전술적 오류였음이 입증되었다. 1975년 11월 UDT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UDT의 패배로 끝났고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UDT는 서방 세력, 특히 이제는 혁명전선의 손에 놓인 동티모르의 운명으로 인해 이권을 잃을 처지에 놓여있던 포르투갈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다. 혁명전선은 승리의 기세를 올리며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독립투표를
조직했다. 한편 인도네시아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의 문전에 “또다른 쿠바”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그리고 앞으로 예정된 침략에 대한 미국의 전술적 승인을 얻기 위해 투표를 이용했다.
이런 극도의 긴장 국면에서 향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될 호세 라모스 호르타(3)는 동티모르 내에서 각광받는 인사가 되어 있었다. 1949년 딜리에서 태어난 그는 지식인 주변 집단과 어울렸고, 그에 따라 혁명전선과 관계 맺기 이전에 참여했던 UDT의 성원들과도 친분이 있음을 인정했다. 동티모르가 아주 짧은 기간 독립 국가를 이루었을 때 혁명전선은 그를 외무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살에 불과했다(사실 동티모르 지도자들은 모두 젊었다).
이 젊디젊은 독립파 저항 운동가들이 오늘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 이후 수없이 목숨을 잃었지만 현재의 세대 또한 여전히 앞으로 있을 격정의 세월을 살아가기 위해 성장해야만 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시위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강제 침략에 대한 저항이 일기 시작했다. 그들은 1991년 산타크루즈 대학살(4)과 어린아이 및 청년들에 대한 고문과 구타에서 보여졌듯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매우 가혹하게 죽어가야만 했다. 이들 청년들은 인도네시아와 일정한 타협을 도모하기보다는 지하 운동에 결합하거나 자발적인 망명길에 올랐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수많은 학생들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서방 국가들의 대사관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선을 넘으며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고 있다(이것은 언론의 관심을 끌려는 하나의 수단이자 서방 국가들이 관심을 갖고 일말의 책임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마침내 포르투갈(새로운 동티모르의 리더로서 준비하고 배울 수 있는 곳), 다윈(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모잠비크와 앙골라(두 나라 모두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에서 동티모르인 집단 거주지에 살게 되었다.
이들은 언제나 자금이 충분치 않은 데다 혁명전선 진영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섬처럼 부유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티모르인이 되어 해당 국가의 주변인으로 남아 있다.
그들 모두는 크사나나 구스마오의 열렬한 숭배자로, 그를 티모르 운동의 유일한 지도자로 보고 있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문학과 시를 읊는 이 온화한 인물은 이전의 모든 지도자들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살해된 이후 동티모르 저항운동을 책임져왔다. 구스마오는 혁명전선과 인도네시아 간의 협상이 결렬된 이후 1983년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4년 후 그는 독립에 찬성하는 모든 동티모르 정당들과 운동세력들이 처음으로 모두 결집한 전국모비르저항위원회(CNRM)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1975년 내전으로 산산히 파괴되었던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크사나나”의 카리스마는 모든 사람들(그와 닮은 UDT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무소불위의 지도자로 그를 추앙하고 있는 혁명전선의 지지자들, 그리고 특히 혁명전선이이 혁명적 수사(修辭)를 낮춘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고 있는 서방 국가들의 지지자들)을 끌어안고 있다. 특히 그는 청년들에게 하나의 역할 모델을 부여하고 있는데, 그가 정의와 관용 양자 모두에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경우 외에는 무장력을 감축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살아있는 신화, 동티모르의 체 게바라는 인도네시아의 어떤 이들에게는 제거되어야 할 사람으로 말해지기에 이르렀다. 인도네시아는 1992년 11월 그를 가까스로 체포했다. 그들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20년형을 선고했고,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의 주요 정치범과, (그처럼 감옥에 있는) 노조활동가, 심지어 대통령으로 당선된 만델라의 방문을 받았다.
1999년 2월 10일 자카르타에 가택연금되어 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투표를 쟁취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하비비 대통령에 의해 마침내 석방되기 이전에 (비록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민병대의 강요에 의해 협력한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사면 보장을 주장하기도 했다.
얼마간, 그리고 여전히 티모르인들의 신뢰는 여전히 강고했지만 “크사나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덮쳤다(학살은 계속 점증하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기구와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구스마오로서는 인도네시아와의 무장 투쟁에 얽혀 들지 않기를 원했다).
25년 간의 투쟁과 전반적인 무관심 이후, 사실 저항운동은 사태가 진행되는 속도에 의해 압도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구스마오와 라모스 호르타는 CNRM 내에서 주요한 정치적 초점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 명은 무장군에서 분리되어 자카르타에 수인의 몸이 되어있고 다른 한 명은 지구를 몇번씩 돌아다녀야 하는 국제적인 외판원이 된 상황에서, 그들은 결국 주변환경에 의해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현장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1975년 동티모르를 떠난 이후 라모스 호르타는 동티모르에 발을 디디지 않았고 그의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그의 가족은 실종되었고 인도네시아에 의해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미국에서 처음 기반을 닦고 유엔(5), 그다음에는 리스본과 시드니를 돌면서 라모스 호르타는 사반세기 동안 비정부기구와의 접촉을 자양분 삼아 모든 곳에 네트워크를 건설하면서 권력의 핵심부위를 쉴새 없이 다녔다(혼자서 고급 호텔이 아닌 지하 식당의 벤치를 잠자리 삼아 몸을 누일 때도 종종 있었다). 그의 장황한 정치 연설에 대해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그의 만만치 않는 감각과 동티모르가 뉴스에 지속적으로 부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의 재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때때로 잘못을 저질렀다. 조직의 틀에 갇혀 격동적인 민족 정치의 측면에서(역사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그 시점에 라모스 호르타는 움직이고 있는 기차에 올라타야 했다) 아시아 위기의 결과나 영향에 대해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노벨상 수상이 수많은 국제적인 강연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특히 자원들(1996년 이후 포르투갈은 그에게 리스본 사무실을 제공했다)을 획득할 수 있는 필수적인 인식을 가져다주리라는 점에서 그 상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각국 정부의 수동성에 대해 분노를 표현한 첫 사람이었다. 1997년 3월 파리에 갔을 때 그는 개인적으로 리오넬 조스팽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 때는 선거 이전이었다. 그러나 조스팽이 총리가 되자 그의 문은 굳게 잠겼다. 1년 후 라모스 호르타가 프랑스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연설을 했을 때는 단 두 명의 의원들만이 있었다. 물론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아직 퇴진하지 않았을 때라는 것만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라모스 호르타는 국제사회에서 알려져, 유엔과 알리 알라타스 인도네시아 외무부 장관이 발표하기 이전에 그가 주장했던 1992년 평화계획안이 인정받게 되었지만 그가 거의 만나지 않았던 동티모르인들과 다른 나라에 있는 동티모르인들에게는 여전히 주변인물로 남아 있다. 저항의 세 번째 인물로 카를로스 벨로 주교를 빼놓을 수 없다. 오슬로에서 노벨상을 받은 이후 딜리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동티모르 주민 3명 중 1명이 거리로 나와 그를 환호를 했다. 이때에도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카를로스 벨로 주교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교회가 제공한 사회적 출세 수단의 모든 단계를 거쳤다. 그가 포르투갈에 있을 때 인도네시아가 침략했고, 그는 1981년 카톨릭 신부가
되어 딜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모비르족의 주체성을 수호하고, 문화적 흡수정책과 인도네시아의 강제적 합병에 맞서 싸웠으며, 강점에 맞선 투쟁의 기반이 된 엄청난 교회망을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활동했다. 이것은 때때로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벨로 주교는 몇 차례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독립운동의 일부가 되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운동 세력들 또한 그를 “자기들 중 한 명”으로 보지 않았다(6). 동티모르 내에서 주교는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가 동티모르 문제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우선, (해방의 상징이었던) 교회는 보통 정령신앙을 믿고 있던 동티모르의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하도록 했다(국민들과 군대 모두 합병에 호의적이었던 바로 그 순간,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 당국에게는 교회가 공산당 깃발처럼 보였을 것이다). 동티모르 대량학살 (그리고 카리타스 수도사와 수녀들에 대한 최근의 학살)은 정말 새로운 종교전쟁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라모스 호르타의 유엔 개입에 대한 요구는 인도네시아군이 침략하기 전인 1975년부터 그가 줄곧 호소해 왔던 것이다. 1975년 9월 18일 CIA의 문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이중적 접근을 취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일방적인 간섭의 의도를 부정하고 있지만 비밀리에 특수군 사용을 포함한 군사 작전의 단계를 높이고 있었다(7). 이 보고서는 또한 오늘날 인도네시아 당국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자면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희망을 구체화시킨 세 사람에 대한 지지는 어떤 측면에서는, 대량학살의 과거가 향후에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수단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다.
(1) 포르투갈 신정부는 동티모르인들의 자결권을 즉시 인정했다.
(2) 1975년 1월에 합의된 전국독립연맹을 형성하기 위한 협정
(3) 노벨상은 1996년 호세 라모스 호르타와 카를로스 벨로 주교에게 수여되었다.
(4)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살해에 대한 항의 시위 이후 군대는 산타크루즈에서 군중에게 발포를 해 271명이 사망하고 38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50명 이상이 실종됐다.
(5) 그의 아들 로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뉴욕에 도착한 후 유엔 회의에 가기 전까지, 돈 몇푼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청소원으로 일해야 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6) 위기에 빠진 국가를 앞에 두고 새로운 동티모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독립지도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크사나나 구스마오는 고문역에 만족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라모스 호르타는 자신의 첫 직업이었던 언론인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7) {La saga du Timor(티모르의 전설)}, Africa World Press Incorporation, New Jersey, 1987에서 라모스 호르타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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