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투쟁은 고립되어선 안됩니다”

「주간녹색좌파」 10/27 수 볼랜드

혁명주의자이자 여권운동가인 타히레 마자르 알리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투쟁과 격리되어선 안됩니다”고 말한다

알리는 파키스탄 민주여성연합 사무총장이자 파키스탄인권위원회 부의장, 전국노동당 당원이다. 그녀는 수십년 간 파키스탄의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자 운동, 여성 운동, 반독재 운동에 참여해왔다. 「주간녹색좌파」의 수 볼랜드가 지난 달 시드니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하였다.

알리는 1947년 인도가 이슬람국가(파키스탄)와 힌두국가(인도)로 분할된 이후 파키스탄은 봉건 족벌들의 이해관계 아래 지배되어왔다고 설명하였다.

독립투쟁 시기와 분리독립 직후에 이슬람연맹의 핵심지도자였던 모하메드 알리 지나는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는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오히려 여성의 권리는 1947년 이전보다도 약화되었다.

“여성들은 영국이 떠난 후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영국 지배기에 우리는 많은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죠”라고 알리는 말한다. 어린 소녀였던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수영과 테니스, 하키를 즐기고 외출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힌두교도나 시크교도, 이슬람교도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우린 모든 종교를 존중하라고 배웠어요.”

분리독립 이후에는 “모든 수영장이 폐쇄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을 금지당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안되게 되었지요.”

“분리 이후의 파키스탄 정부들은 모두 군사정부였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가장 고난을 겪은 것은 1977년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마지막 독재자, 지아 울-하크 치하였습니다.”

종교적 반동

종교집단들은 여성은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등의 여성을 주로 겨냥한 규율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결국 거리와 대학에서 여성들이 구타당하는 결과를 낳았지요. 가령, 남녀공학의 수업시간에 웃은 여학생은 납치, 살해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곤 했어요.”

종교집단들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더욱 강력해졌다. 이들 집단이 반공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지원하기 위한 “자유투사(무자히딘)”로 훈련시켰다.

탈레반이 승리한 결과, “대학이나 직장에 다니는 것을 금지당한 수많은 아프간 여성들이 거리에서 구걸하게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의 종교집단들은 물라(이슬람 사제)들이 지아 울-하크의 묵인 아래 각급 학교를 접수함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라들은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는 빈민층의 소년들에게 교육과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 소년들은 결국 카슈미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져 무자히딘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할 것이다.

논쟁

지아 울-하크 시기에 여성조직들 내에서는 논쟁이 진행되었다. “부르주아 여성들 일부는 여성의 평등과 민주적 권리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중요했지만 지아에 맞서 싸우면서 ‘여성을 위해 이것을 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요. 다른 모든 걸 요구하기 전에 사회 민주화를 먼저 요구해야 했습니다.”

지아 시절, 불의에 맞서 싸운 모든 시도들은 억압과 마주쳤다. 알리는 한 기독교인 간호사가 자신의 종교 때문에 박해받았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알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항의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20명의 간호사 중 단 세 명만이 참석했는데 다른 간호사들은 너무나 겁먹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간호사들이 회의장소에 도착했을 때 군용트럭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모두 체포당했다.

알리는 지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여성행동포럼을 결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이 지아에 맞서 여성행동포럼에 결합했습니다. 억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반여성적인 모든 법률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이와 유사한 논쟁은 1971년 중앙정부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과 전쟁을 벌이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그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독재자 야하 칸은 파키스탄 군대가 백만 명 이상을 학살하게 만든 책임자였다.

알리는 거리로 나가 동파키스탄에 대한 군사행동을 비판하는 소책자를 배포한 여섯 명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체포 위협을 받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알리는 이 여섯 명의 여성이 교육받은 상류계급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교육받은 문맹여성들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벵갈(동파키스탄)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곤 하는, 박사학위를 가진 여성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알리는 이들 여성이 “진정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인지” 의문을 품었다. “나는 그런 류의 교육은 원치 않았습니다.”

“잘못된 일을 보면 이에 맞서 정치적 영역에서 싸워야만 합니다.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파키스탄 군대가 벵갈에서 저지른 일, 수천 명의 여성을 강간한 사실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방글라데시에 가보면 수천 명의 고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가 그들의 아버지일 수도 있어요.”

“여성의 투쟁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정치적 투쟁입니다. 그러나 이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투쟁과 격리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노동자, 농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함께 하는 공동의 투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알리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좌파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약점으로 인해 여성들의 투쟁을 지지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지도자가 체포되면서 궤멸되었다. 오늘날 세력을 유지하는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법정에 출두하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원을 조직해달라고 알리가 노동조합들에 요청하면 그들은 대부분 그만한 힘이 없다고 대답하곤 한다. 여성들이 법원을 통해 이혼하고자 할 경우 살해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이는 커다란 문제이다.

NGO에 관해

알리는 NGO의 역할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NGO들이 여성의 권리를 위한 정치적 투쟁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진보적인 사람들 중 일부는 NGO로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항의시위에 더 이상 나오진 않아요. 그들은 우리와 같은 혁명적 헌신성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모든 문제가 이들 NGO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제는 정치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NGO들 안에도 매우 훌륭한 여성들이 있지만 그들은 거리로 나와 항의시위를 벌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활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해외에서 후원을 받는 NGO들은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원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파키스탄 민주여성연합은 NGO가 아니다. 이 단체는 분리독립 직후 결성된 파키스탄 최초의 독립적 여성조직이었다. “우리 조직은 처음부터 정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여성들이었고 노동조합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어요. 우리 성원의 4분의 3은 공산당원이었지요.”

민주여성연합은 여전히 NGO 바깥에 있는 독립적 여성조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NGO에 일자리를 얻어 들어가면서 이제는 큰 조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계급 밀집지역과 빈민 지역에서 주로 조직화를 수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정치적 의식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권리를 안다는 것

여성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법률에 따르면 여성은 두 번 결혼할 권리가 있지만, 이슬람교도들 대다수는 여성은 가정을 떠나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알리는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 율법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슬람교에서 여성은 분명 몇 가지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정부와 이슬람교가 이러한 권리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알리는 폭행당하고 가정에서 내쫓긴 여성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조직인 다스탁의 회장이다. 다스탁은 이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고 법률구조를 제공한다.

다스탁은 ‘명예’살인[여성이 결혼이나 이혼을 위해 집을 도망쳤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법원과 정부는 이러한 관행을 옹호하고 있다.

알리는 서북부 국경지역에서 이혼하기 위해 라호레로 온 한 여성의 사례를 말해주었다. 그녀는 3년 동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 남자를 고용해서 그녀를 총기로 살해하도록 시켰다. 정부는 이에 대해 사법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그 소녀의 아버지가 상공회의소 의장이기 때문이었다.

알리는 좌파 정당들이 아직도 여성들의 투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종종 이들 정당의 회의에 초청받곤 하는데 자신 이외에는 여성 참석자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하루는 내가 그 동지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 여성은 둘뿐이군요. 당신들 부인은 다 어디 있지요? 그녀들을 데리고와서 정치적으로 교육받게 하세요. 그녀들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와서 들으라고 하세요. 나중에 여러분이 지하로 숨어야 할 때, 적어도 여러분의 부인들은 동조자가 되겠지요.'”

“‘여러분이 부인들에게 당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말하지 않은 채 항상 부인들에게 명령만 한다면, 지하 활동을 강제받을 때 여러분 부인들은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당신들은 아내가 회의석상에 나올 경우 자신이 아내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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