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무개(42·광주시 남구 봉선동)씨는 18년째 같은 일을 한다. 98년 3월 이전까지 그는 연봉 4200만원의 중견 회사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일을 하는데도 월 70만원을 받는다. 계약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분변화는 외환위기가 오면서 시작됐다.

회사는 먼저 구조조정을 내세워 120명의 동료 가운데 장씨를 포함해 63명을 강제로 명예 퇴직시켰다. 사장실에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어 회사쪽은 ‘잘린’ 사람들 가운데 그를 포함해 20명을 계약직으로 재입사시켰다. 그가 “계약직이라도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한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직원을 잘라 회사가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규직으로 있을 때와 하는 일이 똑같아요. 말이 좋아 고용 조정이지 순전히 임금을 줄이려는 편법이었지요.” 장씨는 올초 1년 단위 재계약 때 “먹고 살기 어려우니 임금을 조금만 올려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싫으면 그만두라’는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명예퇴직금으로 받은 4천만원은 2년 만에 눈녹듯 사라졌다. 통장에는 잔고가 한푼도 없다. 아이들은 그가 계약직이 된 걸 모른다. 친구들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은 이젠 정부의 1인당 최저생계비 기준(월 23만4천원)을 밑도는 빈곤층이다. “(처지가) 부끄럽다”는 장씨는 살 걱정에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임금 계약직’의 날벼락을 맞은 건 장씨만이 아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9월 고용동향’을 보면, 임금노동자 1294만7천명의 47%인 607만9천명만이 정규직이다. 나머지 53%는 비정규직(임시직 431만9천명, 일용직 255만명)이다. 처음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 수를 넘어섰다. 국제통화기금이 강제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결과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올 상반기엔 신규 취업자의 92%가 임시·일용직인 것으로 집계했다.

고용조건이 나빠지며 임금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여성학)가 서울지역 12개 시중은행 3급 이하 은행원 348명을 뽑아 실시한 최근 조사에서, 비정규직의 임금수준은 정규직의 41%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수당과 복지후생 등을 고려하면 격차는 최대 89%까지 벌어진다. 이게 바로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자랑하며 그 근거로 내미는 ‘국내총생산 9.8% 성장, 실업률 4% 하락’의 실상이다.

임시·계약직의 급증은 여성 노동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통계청은 9월 현재 신규취업 여성이 27만8천명으로서, 남성의 19만8천명보다 많다고 밝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은 남성이 58%대 42%인 반면, 여성은 30%대 70%였다.

김아무개(33)씨의 사례는 여성취업 증가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그는 지난 4월 ㅇ학습지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나섰다. 남편이 하던 의류제조업이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탓이다. 그러나 계약직에 대한 세상 인심은 각박했다. 하루 10시간씩 뼈빠지게 일한 대가는 월 40만~50만원. 교통비와 밥값 따위를 빼면 20만원 남짓 손에 쥘 뿐이다. 딸(12)이 다니던 피아노와 보습학원을 끊고 프라이드 승용차도 팔았다. 그는 지금 학습지 일을 그만두고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시간당 3500원을 받고 일한다.

이렇게 국제통화기금이 강제한 ‘노동시장 유연화’의 칼바람 앞에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계약직·파견직 등의 저임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며 잇따라 신빈민층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정규직으로 발돋움하고 그리하여 빈곤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이들의 꿈이다. 그러나 계약직마저 지켜내지 힘든 현실은 이들에게서 이런 꿈마저 꾸지 못하게 한다.

이제훈 손원제 기자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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