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 106번지. 월급제를 요구하며 택시노조운동 사 상 초유의 장기파업을 벌이고 있는 고려운수 노조원들이 있다. 낮이면 거리 로 나갔다가 밤이면 이곳 차고지의 불 지핀 드럼통 주변으로 어김없이 모여 들며 보낸 날이 벌써 2백일. 시민단체 대표들이 사태해결을 위해 진상조사 를 벌이고 서울시도 중재단 구성에 나서는 등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잡혀가 던 지난 3일 용답동을 찾았다.

*2백일을 넘긴 택시노조 최장기 파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싶었는데 ‘용역깡패 동원 노조파괴 살인폭력 자행한 악덕업주 송현준 사장 구속하라’는 플랭카드가 이정표처럼 농성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 파업에 덩달아 시달린 듯 꽤나 후줄근해진 플랭카드 앞를 지나자, 농성장 입구 한켠에 걸린 남루한 점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찢겨나간 조록색 점퍼 위로 ‘폭력○○ 깡 패복장’이라는 빨간 페인트 글씨가 지난 11월17일 있은 구사대 테러의 처참 함을 전하고 있었다.

드럼통 불 주변에서 삼삼오오 몸을 녹이고 있는 조합원들의 표정은 의외 로 밝았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짐짓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찍 어야지’하면서 서로들 웃기도 했다. 폭력테러 이후 잔뜩 독이 올랐으리라 짐작했던 기자로서는 의아해질 정도였다.

*폭력을 이겨내는 낙천적인 기질

휴게실에서 소위 ‘연로’한 조합원들과 만났다. 63세가 최고령이고 대부분 50대 후반인 이들은 건강문제에 대해 “끄덕 없다”며 이구동성이다. 우선 당 장의 생계가 어떤지 궁금했다. “3-40대 조합원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학생이 니까, 우리보다 더 힘들지. 연장자로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안병○촵 56세)” “먹고 사는거야 난감하지. 가난하니까 택시탔던거 아닙니까?(이○학 촵59세)”

슬그머니 구사대 폭력사건 얘기를 꺼내봤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백발 의 한 조합원이 입을 열었다. 정○용씨(62세)다. 지난 96년 부사장 퇴진 당 시의 상황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차분하게 얘기하던 그의 표정이 17일 이 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격앙됐다.

“소시적에 6.25도 겪어봤지만 그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사장이라는 사람이 진두 지휘하는데 조합원들이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고, 나도 입술이 터지고…” 당시 정씨는 출구 쪽에 혼자 서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깨들한테 잠시 멍해있는데 송 사장이 그 사이에 있더라는 것이다. 그게 지난 5월 파업돌입 이후 첫 대면이라는 기가 막힌 사정을 전하는 대목에서 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사장의 ‘이 새끼 죽여’라는 말에 세 놈이 달려들 어 쓰러뜨리고는 어깨를 짓밟고…” 그는 어깨 인대가 늘어나 지금도 치료중 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김○준 씨가 거들었다. “나는 늦게 도착했는데 완 전히 포위돼 있더라구요”

지게차가 들어와 차량을 빼내려하자 민주택시연맹 강승규 위원장이 드러 누워 저지하고 속속 모여든 조합원들이 맥주병을 집어던지며 다시 고지탈환 (?)에 성공하기까지의 무용담이, 누군가 “이겼다”는 외침소리가 들리더라는 얘기로 끝이 났다.

*깡패들 몰아낸 뒤 외침소리 “이겼다!”

“끝까지 갈겁니다. 어떻게 사장이라는 사람이 직원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분해서라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조○행씨촵54세 )” 취재 도중,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분노와 배신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았다 . 17일의 폭력사건은 이미 고려운수의 노사불신을 치유하기 힘든 정도로 후 벼 파놓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이 백주 대낮에 출동한 경찰들이 수수방관 하는 모습을 보며 인근 주민들이 오히려 항의했던 소동을 전하며 조합원들 은 정부에 대해서도 극도의 불신을 표출하고 있었다.

기자는 문득 중재단을 꾸리고 있는 서울시청과 관계기관의 부산한 움직임 을 떠올렸다. 예외없이 ‘사후약방문’이던 관계기관의 행태는 이번 고려운수 사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정부가 법으로 정한 월급제를 둘러싸고 단 위 기업에서 이렇게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면 도대 체 행정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적 중재를 통해 월급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겹겹이 쌓인 고소고발과 극도의 불신은 과 연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결국 고려운수 사태는 ‘뭐든 떠들고 대들어서 시끄러워져야 문제가 해결 된다’는 원초적인 낡은 교훈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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