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구. 울산의 동쪽 바닷가를 따라 형성된 인구 18만8275명의 그리 크지 않은 자치구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동구 구청장선거에선 노동운동과 지역활동가들의 지원을 받은 김창현 후보가 당선됐다. 이어 김 전 구청장의 유고로 치러진 지난 10월28일의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노동당(가칭)의 조직적 지지를 받은 김씨의 부인 이영순(37)씨가 선택됐다.

김 전 구청장은 ‘영남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아 구청장직을 내놔야 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이씨는 거대여당과 보수야당 후보를 1만표가 넘게 따돌리고 당선됐다.

한국적 정치 풍토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결과였다.

울산 동구, 그곳엔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 걸까?

하나. 동구 유권자들은 이른바 색깔론 공세에 무관심했다. “에이, 국보법이야 맨날 때 되면 써먹는 거 아닙니까? 노동운동 하는 사람치고 국보법에 안 걸려본 사람 어디 있나요.”(한 택시운전사)

동구에 밀집해 있는 현대그룹 노조들의 오랜 투쟁경험도 적색공포에 대한 백신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 노동자는 “숱한 노조간부들이 국보법으로 끌려갔지만, 결국 그들이 빨갱이가 아니라 노동자들 편이라는 게 확인되지 않았느냐”며 “이제 더 이상 노동자들에게 국보법은 천형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까지 김 전 구청장의 석방 탄원서에 서명한 주민만 3만명에다 국가보안법철폐서명에 참가한 주민이 1만5000명에 이르고 있는 점 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도 이 구청장의 상대 후보들은 우리 정치판에서 최고의 `무기’인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레드컴플렉스’에 불을 붙이려는 이런 집요한 공세에 유권자들은 냉담했다. “선거기간 동안 다른 쪽에선 <월간조선>의 영남위 사건기사를 곳곳에 뿌렸지만, 많은 주민들은 `선거 때면 나오는 약방의 감초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만 보였습니다.”(이영순 구청장)

둘째. 동구 유권자들은 여성을 선택했다. 이 지역 유권자의 진보 적인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이 구청장은 “단지 전 구청장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출마한 것 아니냐”는 상대쪽 후보의 공세에 시달렸다. 이 구청장은 “`여자는 집에 가서 살림이나 하라’는 야유를 들을 때 가장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천병태 민주노동당 울산추진위 공동대표는 “이 구청장 본인이 10여년 가까이 동구에서 살며 지역운동에 종사해온 신 망받는 활동가였으며,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지역운동의 성과가 선거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동구 주민들은 남녀의 구별보다는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활동을 우선하고 있는 셈이다.

세째. 노동자들이 정치적 사안에 조직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10월 보궐선거의 향방을 결정지은 가장 핵심적인 요인도 바로 조직화된 노동자의 정치적 선택이다.

동구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한국프랜지 등 현대그룹의 주요사업장을 끼고 있는 대표적 공단지역이다. 이들 현대그룹 관련 노동자와 가족만 해도 줄잡아 6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동구의 유권자다. 이웃 북구에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도 6000여명 정도 이곳에 산다. 가히 `노동자구’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지난번 구청장 선거는 노동자들의 계급투표가 이루어진 겁니다. 구조조정 한파가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정리해고 반대와 노동생존권 보장을 내세운 이 후보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수원 울산참여자치연대 대표)

물론 여기까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12년에 걸친 울산 노동자들의 땀과 피와 눈물의 역사가 필요했다.

“노동자들은 91년 골리앗 투쟁 등으로 끊임없이 자본과 정권에 저항하는 한편, 88년과 92년 총선에서 노동자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끊임없이 독자적 세력화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하부영 현대자동차노조 부위원장)

그런 그들이 마침내 의미있는 성과를 연거푸 만들어냈다. 이 대표는“노동자가 뭉치면 기존의 완강한 붕당적 정치구조도 깨트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움트는 희망 속에서도 숙제는 남아 있다.

무엇보다 선거를 결정지은 주력인 노동자들의 계급투표가 과연 총선과 대선 등 보다 높은 정치적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냐는 점이다.

이 대표는 “이 구청장의 당선은 정몽준 의원으로 대표되는 현대 그룹의 영향력이 거의 발휘될 여지가 없었던 지역선거라는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총선 등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긴 아직 무리다”고 말했다. 하 부위원장도 “노동자출신 인물을 키우고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지금부터 벌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적 정치와 행정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구정으로 흡수해 내느냐도 과제다. 동구의 선택을 진보정치에 대한 확신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남편이 못다한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구정을 실현하 겠다”는 이 구청장의 약속이 생활현장 속에 어떻게 구현되느냐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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