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막으려 연대했던 미국과 소련 노동운동

1945년 8월 6일 카네기홀 무대에 뉴욕 산업별노조회의(CIO) 지도자들과 10명의 소련 노동조합 대표단이 앉아 있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시드니 힐먼과 바실리 쿠즈네초프 사이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출처: 메릴랜드 대학교 도서관 특별 컬렉션

1945년 8월 6일 밤,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끔찍한 신무기'를 사용했다는 속보가 저녁 신문에 실리자 약 2,500명의 뉴욕 노동계급이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 노동의 역할에 대해 모색하기 위해 카네기홀에 모였다.

지난 10년간 수백만 명의 노동자를 성공적으로 조직한 역동적인 노동 연맹인 산업별노조회의(CIO)가 주최한 이 행사의 귀빈은, 미국을 순방 중인 10명의 소련 노동조합 활동가들이었다. 

"우리는 국제 노동운동의 단결 속에서, 2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된 파시즘의 어두운 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한다"라고 소련 대표단 단장이자 전소련노동조합중앙평의회(AUCCTU) 의장인 바실리 쿠즈네초프가 청중들에게 말했다. "이 단결 속에서 우리는 침략에 대한 두려움 없는 미래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보증을 확인한다."  

얼마 전 배우자를 잃은 엘리너 루스벨트도 이 행사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참석하여 외국인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10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는 "민족과 국가 간에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보다 세계 평화를 위한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CIO는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부분을, 러시아 대표단은 소련 국민들의 위대한 부분을 대표한다. 이번 방문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 대해 배우는 것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와 쿠즈네초프도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했고, 세계가 남은 두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취약한 전시 동맹을 공고히 할지, 위험한 경쟁 관계에서 서로 맞붙어야 할지의 중대한 새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의류노동자연합의 회장이자 CIO의 공동 창립자인 시드니 힐먼은 그날 저녁 청중에게 미국 내 우익, 반노조, 친자본주의 세력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해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했다. "이 세력들은 파시즘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히틀러가 죽고 히로히토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은 미국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스스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다."

힐먼은 "계획의 일환으로 그들은 미국 노동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아직이다. 다만 전략적으로 후퇴했을 뿐이다. 곧 다시 공세로 돌아설 것이다" 라고 덧붙였다.   

역사는 곧 힐먼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 후 4년 동안 기업이 만들어낸 새로운 '붉은 공포'가 미국을 휩쓸면서 파괴적인 반노동 태프트-하틀리 법이 통과되고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주도의 진보적 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수십 년 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45년 당시에는 냉전이 아직 현실이 아니었다. 냉전 발생을 막기 위한 CIO의 거의 잊힌 노력은 세계 역사가 군국주의, 제국주의, 노동자 착취 대신 외교, 연대, 사회주의로 향하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노동을 위한 유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국의 노동연맹(CIO, 소련의 AUCCTU, 영국 노동조합회의, 프랑스 노동총동맹 등)은 전후 국제 질서에서 경제 및 사회 정책에 대한 노동계급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더 큰 협력을 모색했다. 특히 이들은 노동을 위한 일종의 유엔 역할을 할 새로운 세계노동조합총연맹(WFTU)을 설립하고자 했다.  

초기 UN과 마찬가지로, 제안된 WFTU에는 정치 체제와 이념은 크게 다르지만 파시즘에 반대하고 다자외교에 헌신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모두 포함된다. 1945년 2월, 30개 이상의 국가와 식민지에서 온 200여 명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런던에 모여 WFTU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쿠즈네초프가 AUCCTU를 대표해 참석했고, 힐먼, 필립 머레이(필립 머레이는 CIO의 회장이기도 했다),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회장 R. J. 토마스 등이 CIO의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의 더 오래되고 규모가 큰 노동조합 단체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의 대표자들은 소련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WFTU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 불참했다. CIO는 항상 공산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고, 산하 노조 중 일부는 미국공산당(CPUSA)의 조합원이나 동료들이 이끌고 있었다. AFL의 보다 보수적인 관료들은 수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AFL의 사무총장(그리고 미래의 회장)이었던 조지 미니는 런던 회의 몇 달 후 소련 노동조합원들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는 수사적으로 물었다. "비밀 경찰이 권력 집단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올가미에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최신 혁신 기술? 아니면 정치범을 위한 더 크고 더 나은 강제 수용소?"  

CIO와 다른 연합국 노조가 세계 노동 단결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던 1944-45년, AFL은 자유노동조합위원회라는 새로운 국제 조직을 출범시켰는데, 이는 외국 노동 운동을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라이벌 진영으로 나누기 위한 결정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처음 몇 년 동안 이 위원회는 냉전 초기 전선을 따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분열을 고의적으로 유발하여 결국 기꺼이 중앙정보국(CIA)의 파트너이자 재정적 수혜자가 되었다.  

소련 대표단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소 동맹을 깨고 싶어 했던 것은 AFL의 반공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기업과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은 그들이 그토록 반대한 뉴딜 정책의 친노동자 개혁을 되돌리기 위한 구실로 미국 기관에 공산주의자의 '침투'에 대한 공포를 심고 싶어 했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 독점과 미국이 관리하는 새로운 국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려는 의도에 부풀어 있던 트루먼 행정부의 신흥 자유주의 매파와 경제 기획자 간부들은 소련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소련과의 경쟁이 보수주의자 및 기업의 이해관계가 조직 노동을 공격하는 데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확신한 CIO는 1945년 7월 말과 8월 초 3주 동안 노조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AUCCTU 대표단을 초청해 미국을 방문하도록 했다. 남성 7명과 여성 3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에는 소련의 해운 운송 노조, 의류 노동조합, 과학 노동조합, 목공 노동조합의 지도자들과 AUCCTU의 임금 부문 책임자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워싱턴 D.C.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소련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가는 곳마다 지역 CIO 지도자들의 안내를 받아 제철소, 트랙터 작업장, 육류 포장 공장, 피아노 공장, 모피 상점 등을 시찰하며 직원들에게 임금과 근무 시간, 왜 여성 노동자가 더 많지 않은지 등에 대해 질문했다. 뉴욕에서는 전 영부인과 함께 카네기 홀에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피오렐로 라과디아 시장이 직접 환영했다.  

엘리너 루스벨트가 1945년 8월 6일 소련 노동조합 대표단을 환영하기 위해 카네기 홀에서 열린 CIO의 대중 회의에서 군중에게 연설하고 있다. 출처: 메릴랜드 대학교 도서관 특별 컬렉션
 

대표단의 리더인 쿠즈네초프는 1930년대 초 피츠버그의 제철소에서 일하고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공부한 덕분에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소련 외교관으로서 길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것을 예감한 그는 1945년 순방 기간 중 여러 기자회견에서 미국 기자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능숙하게 답변했다.  

소련 공산주의가 미국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쿠즈네초프는 "우리나라, 우리 노동계급에게 소련 체제는 나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후 소련이 국영 경제를 운영함으로써 이전에는 막을 수 없었던 나치 전쟁 기계를 견뎌내고 궁극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시스템은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덕분에 우리는 산업을 동쪽으로 빠르게 이전하여 그곳에서 재건하고 필요한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있었다." 

쿠즈네초프는 방미 기간 중 미국 공산당과 회담할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여기 온 다른 목적이 있다"며 "CIO와 우정을 쌓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노동조합 대표단의 방문을 "소련과 미국 관계의 새로운 페이지"라고 칭송하는 데일리 워커를 보며 당연히 흥분했다.  

CIO 내 몇몇 노조 간부들은 공산당의 당원이거나 지지자였지만, 소련 노동계와의 우호적 관계를 장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힐먼과 머레이 같은 비공산주의자들로, 이들은 모두 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가까운 동맹이었으며 전후 국제 협력에 대한 그의 비전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머레이는 "불행히도 불신과 의심의 씨앗을 심고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 확대하며 세계를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CIO 회장은 AUCCTU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면서 "세계가 적대적인 블록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고, 협력이 꼭 필요한 위대한 국민에 대한 적대감을 없애기를 희망한다. 지속적인 평화와 세계 번영을 위해서는 이들의 지속적인 우정과 협력이 똑같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CIO 대표단  

1945년 10월, WFTU는 파리에서 창립 대회를 개최했다. 그 직후 이 모임에 참석했던 11명의 CIO 지도자들은 쿠즈네초프의 초청을 받아 소련으로 날아갔다.  

일주일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주변의 공장과 조선소를 방문하고, AUCCTU 회의에 참석하고,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덤을 보고, 애버렐 해리먼 미국 대사를 만나고, 볼쇼이 극장에서 발레를 관람하여 "관객들로부터 우호적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료 의료 서비스, 임산부 혜택, 노령 연금, 장례비 지원 등 소련의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배웠다.  

미국 대표단에는 알버트 피츠제럴드 전미전기-무선-기계노동조합(UE) 위원장, 리드 로빈슨 국제광산-제련소노동조합 위원장, 렌 드 코크 CIO 언론국장, 리 프레스먼 CIO 법률고문 등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곧 CIO에서 쫓겨나게 될 노동계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룹에는 제임스 캐리 CIO 사무총장, 조셉 커런 전국해양노조 위원장, 에밀 리브 섬유노조 위원장 등 곧 있을 반공 숙청을 주도할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여행 내내 나치를 물리치기 위해 소련 국민들이 감내한 수많은 희생을 떠올렸다. 한 예로, 레닌그라드에 있는 키로프 기계 제조 공장은 750명의 사망자를 낸 독일의 집중 포격을 받았지만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중요한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키로프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여러분이 지불한 대가를 보았다"라고 말했다. "우리 미국은 내외부의 어떤 세력도 다시는 우리를 여러분에게 대항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대표단을 이끌었던 캐리는 1941년 피츠제럴드에게 재선 도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UE의 회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자신의 재선 실패를 노조 내 공산주의 세력 탓으로 돌렸다.  

캐리는 방문이 끝난 후 소련 기자들에게 "우리는 우리에게 보여준 개인적인 따뜻함과 우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소련 노동조합과의 따뜻한 관계를 공고히 하고, 지속적인 평화 유지와 번영, 민주적 발전을 위해 두 위대한 나라 사이에 더욱 긴밀한 단결을 구축하는 일에, CIO 대표로서 우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크게 강화했다."  

냉전  

물론 국제 노동의 단결과 세계 평화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0년대 후반에 발생한 몇 가지 사태가 원인이었다. 예를 들어, 1947년 태프트-하틀리 법에 따라 노조 간부들이 공산당원이 아님을 맹세하는 진술서에 서명해야 했고, 이를 준수할지에 대한 논란은 CIO의 공산주의자들과 비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을 빚었다. 마찬가지로, 전후 서유럽을 미국이 관리하는 신흥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하기 위해 고안된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을 지지할 것인지(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의 인기 있는 공산당들을 배제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WFTU는 분열되었다.  

1946년, 젊고 야심찬 노조 간부였던 월터 로이터는 가까스로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자동차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로이터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맹자들을 노조 지도부에서 축출하기 시작했고, 곧 CIO에서 공산주의자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로이터가 UAW 위원장에 취임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시드니 힐먼은 5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CIO에서 미-소 우호 관계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던 사람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나자 로이터와 같은 반공주의자들이 노동 연맹의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미래를 둘러싼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맹국들은 1948년 소련과의 평화적 공존을 선호했던 자유주의 뉴딜주의자이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의 제3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냉전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머레이를 비롯한 CIO의 고위 임원들은 선거에서 트루먼의 편에 섰지만, UE와 같은 CIO의 공산주의 친화적 조직의 지도자들은 월러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승리했고 월러스는 단 한 주도 차지하지 못하면서 냉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고립을 드러냈다.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와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주도한 본격적인 적색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로이터와 CIO의 다른 반공주의자들은 머레이가 공산주의자 및 그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단절할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CIO는 세계 무대와 직장에서 국제주의를 열렬히 장려했다. 이 사진은 뉴욕의 도매 및 창고 노동자 지역 65의 회원들로 1944년 1월에 "CIO 작업장의 유엔"이라는 캡션으로 The CIO News에 실렸다. CIO 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구의 네 구석에서 온 사람들.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미국인 베르타 테이트, 러시아인 제럴드 캔터, 영국인 마가렛 콘클린, 중국인 리 치. 그 밖에도 푸에르토리코,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출신으로 'V' 표시를 하며 손을 들고 있는 사람들." 출처: 메릴랜드 대학교 도서관 특별 컬렉션

1949년 1월, CIO는 표면적으로는 마셜 플랜에 대한 소련 노동조합과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WFTU에서 탈퇴했다. 같은 해 말 AFL, 영국노동조합회의 및 기타 서구 동맹 노동조합과 함께 CIO는 WFTU의 반공주의 라이벌로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을 공동 창립하여 전후 국제 노동 단결의 비전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1949년 11월에 열린 CIO 대회에서 UE(최근 UAW의 반공 공세로 소규모 농기계 노동조합과 합병한 상태였다)는 지도자들이 실패한 월러스 캠페인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노동연맹에서 쫓겨났다. 그 자리에서 국제전기노동자노조가 설립되어 UE의 조합원을 빼앗아 오기 시작했다. 4년 전 소련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갔던 캐리가 새 노총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9개의 다른 공산주의 동맹 노조가 부패하거나 협상 테이블에서 조합원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냉전과 적색 공포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CIO에서 제명되었다. 이러한 숙청의 결과로 CIO는 가장 효과적이고 헌신적인 조직가들을 포함하여 약 100만 명의 회원을 잃고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5년 후, 로이터가 리더를 맡게 되면서 CIO는 더 큰 AFL에 통합되었다.  

합병된 AFL-CIO는 20세기 후반에 가장 악명 높은 반공주의적 미국 기관 중 하나가 되어 미국 제국의 전쟁을 응원하고 국무부 및 CIA와 협력하여 해외 좌파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미국 노동계의 표면적인 목소리가 전 세계적인 반공 성전(제 새 책의 주제)을 수행하느라 바쁜 동안, 미국 기업은 국내외 노동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1945년 8월 힐먼이 경고했듯이 냉전으로 인해 노동운동이 분열되고 우익 반노동자 세력이 재편성되어 미국과 전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맹목적 애국주의, 반좌파 정치 탄압, 소위 강대국 경쟁의 내재된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왜 노동의 이익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출처] How the CIO Tried to Prevent the Cold War

[번역] 참세상 번역팀 

덧붙이는 말

제프 슈르크(Jeff Schuhrke)는 SUNY 엠파이어 주립 대학교의 노동 역사학자이자 조교수로, 'Blue-Collar Empire: The Untold Story of US Labor's Global Anticommunist Crusade' 의 저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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