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에서 대규모 시위로 셰이크 하시나가 축출된 후 수백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크레딧 전문가인 무하마드 유누스가 이끄는 임시 정부가 방글라데시의 서민층이 직면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2024년 8월 5일, 방글라데시 시위대는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 냈다. 출처 : 참세상 자료사진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총리는 15년간의 집권 끝에 지난 8월 5일 젊은 시위대에 의해 사임당하고 나라를 떠났다. 공무원 고용 할당제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시작된 시위는 하시나와 그녀의 정당인 아와미 리그(Awami League, AL)의 독재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5주 동안의 격렬한 시위 끝에 4백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거나 실종된 후, 마침내 시위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번 사건은 2022년 스리랑카의 대규모 시위나 1986년 필리핀에서 20년간 독재 통치를 이어오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몰아낸 반란을 떠올리게 한다.
8월 5일,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통행금지를 무시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하시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45분뿐이었다. 그녀는 하루 전까지도 총리로서의 임기가 끝났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했으나, 결국 민중의 힘에 휩쓸려 사임하고 탈출했다. 그녀의 탈출은 육군 대장의 도움을 받았다.
한 시대의 마무리
하시나의 축출은 AL 정치의 한 주기의 마무리였다. 2008년 선거에서 AL이 이끄는 14개 정당 연합이 300석 중 263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이 연맹의 최신 통합 단계였다. AL은 이전에도 두 차례 집권했지만, 이번 승리는 그야말로 역사적이었다.
2007년 1월로 예정되었던 의회 선거는 정치적 혼란으로 중단되었다. 그 사이 군의 지원을 받는 관리 정부가 통치를 이어갔으며, 이는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방글라데시는 건국 이후 20년 동안 군사 정권이 직접 통치했고, 군부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거의 16년간 통치했다.
2008년의 승리는 또한 AL의 장기적인 권력 공고화를 의미했다. 역사적 뿌리와 해방 전쟁에서의 지도적 역할 덕분에 세속적 세력으로 여겨졌던 이 정당은 오히려 향수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다. 2007년 이후, AL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시민사회 운동이 서파키스탄(West Pakistan) 군대와 협력했던 전범들의 재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집권한 방글라데시 국민당(BNP)은 급진 이슬람 단체인 자마트-이슬라미(Jamaat-e-Islami)와 연합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2008년 선거는 종교 정치에 대한 대중의 거부로 이어졌다.
두 가지 전환점
수년간의 군사 통치 이후 1990년 민주주의 회복 운동(일반적으로 90년대 반독재 운동으로 알려짐)은 독립한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첫 번째 긍정적인 전환점이다. 수백만 명이 1997년 11월부터 거리로 나와 민간 통치의 회복을 요구했다.
1982년부터 1990년까지 방글라데시는 군 수장인 H. M. 에르샤드(H. M. Ershad)의 통치 아래 군사 갱스터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의 정권은 살인과 폭행,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 부패와 약탈이 만연한 암울한 시기로, 민주주의와 민주적 가치가 파괴되었다. 대중 봉기로 인해 에르샤드는 축출되었고, 그 결과 의회 민주주의가 부활할 수 있었다.
이 운동은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진보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일부 헌법 개혁도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군대의 정치적 장악력이 약화되었다. 정치적 정당들은 국가의 미래 민주주의 방향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지만, 이 합의는 나중에 위반되었다. 아와미 연맹 과 방글라데시 국민당 모두 이러한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인식 덕분에 큰 이익을 얻었다.
두 번째 주요 전환점은 전범들에게 사형을 요구한 2013년의 샤바그 운동(Shahbag Movement)으로, 대중적으로는 샤바그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아와미 연맹은 처음에 이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지지했다. 그러나 샤바그 시위대는 점차 더 넓은 사회의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종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와미 연맹은 이 운동을 통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당 간부들을 철수시키고, 샤바그 지도부를 괴롭히며 내부 갈등을 조장해 투쟁을 마비시켰다. 방글라데시 좌파는 여전히 샤바그 시위를 계속했지만, 좌파 조직들은 규모가 작고 국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이었다.
2014년이 되면서 이 운동은 그 예리함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방글라데시는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해 진정한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를 잃었다. 결국, 샤바그 운동은 와해되고 말았다.
아와이 연맹, 야당을 탄압하다
이 목표를 달성한 후, 아와미 연맹은 정치적 적수인 방글라데시 국민당을 해체하기 위해 나섰다. 아와미 연맹에게 자마트-에-이슬라미와 다른 이슬람 단체들도 중요한 요소였지만, 방글라데시 국민당는 즉각적인 선거 경쟁자였다. 아와미 연맹 지도부는 곧 자신들의 잘못된 통치에 대한 불만이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글라데시 국민당 지도자들은 무작위로 체포되었고, 여러 혐의가 뒤따라 가해져 당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오랫동안 군부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아왔지만, 이제 군부가 민간 권력에 대한 관심을 줄이면서 당의 힘이 약해졌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방글라데시 국민당이 집권했을 때도 부패와 야당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 2004년 하시나(Hasina)를 살해하려는 수류탄 공격 시도 등이 기록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당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아와미 연맹이 국가 기구를 무자비하게 사용해 방글라데시 국민당을 공격함으로써 몰락시켰다.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2006년에 선거 제도를 조작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아와미 연맹은 이러한 전술에 더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2014년 선거가 불공정한 조건에서 치러진다는 이유로 선거에서 철수했다. 하시나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공정하고 비당파적인" 인물이 선거를 감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수는 300개 선거구 중 153곳에서 무투표 당선이 이루어지며 아와미 연맹에게 권력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아와미 연맹은 방글라데시 국민당의 정치 활동을 전국적으로 차단했으며, 당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부패에서 살인에 이르기까지 수천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이러한 다방면의 공격에 맞서 회복하지 못했고, 2014년 이후 폭력에 의존하면서 오히려 아와미 연맹에게 추가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방글라데시 국민당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는 2018년 2월 부패 혐의로 수감되었다.
대중운동 탄압이 화살로 돌아오다
동시에, 대중 운동에 참여했던 좌파 세력들도 괴롭힘과 탄압을 당했다. 정부는 람팔(Rampal, 람팔 발전소 건설에 반대했던 환경운동) 운동의 지도자들을 표적 삼아 허위 사건을 조작하고 신체적으로 위협했으며, 노동자 운동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방글라데시의 이슬람주의자들은 과거 선거 시기에 방글라데시 국민당을 지지하곤 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국민당이 쇠퇴하면서, 이들 세력은 독자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와미 연맹은 세속주의적 전통을 타협하며, 세속 블로거들을 살해한 책임이 있는 급진적 이슬람주의 단체 헤파자트-에-이슬람(Hefazat-e-Islam)과 암묵적인 동맹을 맺었다.
아와미 연맹이 이끄는 정치 연합에는 여러 보수적인 이슬람 정당들도 포함되었다. 이 정부는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 보수적 교육 과정을 가진 종교 학교인 카우미 마드라사((Qawmi madrasas, 이슬람 종교학교)를 인정하는 등의 양보를 하였다. 이러한 학교들은 종교 교육에만 집중하며, 가난한 계층의 학생들을 신비적인 종교 교리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모든 일이 방글라데시의 힌두교 소수 종교 공동체의 최고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
아와미 연맹은 임명 과정을 통해 국가 행정 기관을 점점 장악해 갔으며, 유인책과 강압을 혼합하여 언론과 지식인을 통제했다. 2018년 말까지 아와미 연맹은 관료제, 사법부, 그리고 전통적으로 방글라데시 국민당의 주요 지지 세력으로 여겨지던 군대까지 확실하게 장악했다.
2018년 선거 결과는 아와미 연맹의 가장 낙관적인 예상조차 뛰어넘었으며, 후보들은 300석 중 288석을 차지했다. 2024년 1월에 열린 다음 선거는 완전한 조작이었고, 야당 전체가 투표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저항 세력을 의회 밖 투쟁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하시나를 축출한 시위로 이어졌다.
방글라데시 좌파, 도전의 시작
하시나가 퇴진한 지 사흘 후,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가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의 수장으로 취임했다. 공식적으로 "수석 고문"이라 불리는 유누스는 은퇴한 관료와 군 장교, NGO 인사, 변호사, 학자, 그리고 반란에 참여한 몇몇 학생 지도자들로 구성된 17명의 팀을 이끌게 되었다. 이 팀은 구성원의 배경뿐만 아니라 인종적·종교적 측면에서도 다양하지만, 노동계급 대표는 포함되지 않았다.
유누스는 당파적 정치에서 벗어나 국가 발전을 도모하는 인물로서 임시 정부의 수장에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하시나 정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고 거의 나라를 떠날 뻔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동정심을 더욱 높였다.
임시정부를 이끄는 무하마드 유누스. 출처 : 유투브 생중계 화면 갈무리
유누스에게 이번 도전은 이전에 정치 분야에 진출하려던 실패한 시도들 이후의 일이었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만, 우리는 그가 이전에 추진했던 마이크로크레딧 제도를 기억해야 한다. 이 제도는 농촌 빈곤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빈곤층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는 그를 서구 정부와 세계은행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아와미 연맹의 신뢰가 떨어진 가운데, 남은 두 주요 정치 세력인 방글라데시 국민당과 자마트-에-이슬라미는 조기 선거가 그들을 권좌에 앉힐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특히 자마트-에-이슬라미는 전국에 걸친 활동가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7월 봉기는 다양한 사회 세력이 참여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다른 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염원은 자유를 향한 것이었으며, 이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되었다. 즉, 이 운동은 명확하게 정의된 이념적 입장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처음에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지만, 국가의 탄압이 방글라데시의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대규모 봉기를 촉발해, 결국 하시나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학생들은 국민의 신뢰를 얻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계획해야 할 것이다.
학생 운동의 정신이 변화의 의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 민주적 선거와 법치에 대한 요구 외에도 이 의제에는 임금 인상과 더 나은 사회적 보호와 같은 경제적 이익, 그리고 기후 정의에 대한 조치가 포함될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기후 변화의 영향에 매우 취약하다. 임시 정부나 그 후속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볼 때, 7월의 사건들은 노동계급과 다른 억압받는 집단들이 방글라데시 사회의 종교적·인종적 분열을 극복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때에만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학생들이 혁명을 시작했지만, 그 성공을 보장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여기서 방글라데시 좌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 존재한다.
[출처] The Bangladesh Protest Movement Won Out Against Repressio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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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쇼반 다르(Sushovan Dhar)는 인도 콜카타에 기반을 둔 정치 활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