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개헌 논의에 불이 붙는가 했더니 갑자기 식어버렸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이를 사실상 철회한 것이다.
철회의 공식적 배경은 이런 거다. 우원식 국회의장의 제안 이후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내란 종식이 우선인데 무슨 개헌인가’라는 반발이다. 일부 개헌 논의에 찬성 입장인 인사들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국민의힘이 개헌 논의를 불법적 계엄 선포의 방패막으로 쓰려고 하는 판국이기에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런 와중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위헌적 권한행사를 통해 문형배 이미선 헌법재판관의 후임을 지명했다. 더군다나 이들의 후임으로 지목된 인사 중에는 이완규 법제처장이 포함돼있다. 이완규 법제처장은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 안전가옥에 모여 수습 대책을 논의한 걸로 의심되는 인사들 중 한 명이다. 역시 내란은 현재진행형인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헌 논의 동력은 상실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러나 이 상황이 보여주는 바는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여의도 정치에서 제기되는 개헌 논의는 ‘1987년 체제가 한계에 도달했다’,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다’라는 등의 주장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첫째로 1987년 체제와는 다른 어떤 체제가 필요하고, 둘째로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분권형의 개헌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전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체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오던 바다. 그런데 이게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기서부터 일종의 해석투쟁이 벌어진다. 한쪽에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고 상황을 규정한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면 보수정당이 배출한 대통령만 연속 두 번 탄핵이 되는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양극화 된 정치로 이어진 게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대통령과 국회 양쪽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게 이런 주장의 핵심이다.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가 양쪽의 책임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논점이탈이며 물타기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도 이런 대목은 잘 나와 있다. 국회와 야당이 뭘 했더라도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정치로 대응했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 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국회의 책임도 있다’는 것은 윤석열의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다. 권력구조가 4년 중임제든 내각제든 이원정부제든 윤석열은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어떤 환경에서든 불법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인사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 사태를 계기로 제도의 문제를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는 지적은 본질적이지 않다. 계엄 선포의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얘기는 아니다. 윤석열의 만행은 현행 헌법과 법률에 있는 제한조차도 무시한 결과로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제도 개선의 논의가 무용한 것은 아니다. 가령 일전에도 이 지면을 통해 지적했듯, 어째서 이러한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아둔한 유권자들의 탓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정치 문화와 문법이 총체적으로 문제인 탓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1987년 체제의 핵심은 직선제이다. 현대 정치의 직선제는 상호 간의 반대를 통해 자기 세력을 최대 동원하는 것을 기본 문법으로 한다. ‘우리 편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악마 같은 상대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편 후보’에 대해선 검증을 소홀히 하고 분명한 흠이 있어도 그냥 넘어간다. 지난 대선에서 주요 정당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심경이 다 그랬다. 윤석열은 그런 문법 속에서 탄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1987년 체제의 극복을 통해 제2의 윤석열의 탄생을 막아내자는 것은 직선제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직선제 이후의 민주주의란 유권자가 선거 때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 던지는 것으로 모든 권리의 행사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가 다음 선거 때까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꺼놓는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유권자가 주인이 아닌 상태에서의 정치적 권리 행사는 무책임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직선제 이후의 민주주의는 유권자를 정치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여러 프로젝트가 포함된 형태여야 한다. 그것은 더 많은 유권자들이 실질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며, 더 많은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며, 영구히 지속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으로서 실현된다.
물론 이상을 단숨에 실현시킬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개헌 논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의 중간 기착지 같은 것이다. 적어도 이상이라는 이정표가 있어야 현실이 의미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 여의도의 개헌 논의로 돌아와보자. 국회의장과 양당의 논의를 보면 여러 이견과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4년 중임 대통령 중심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 같다. 나머지 대목에 대해서는 합의 여부가 불투명하다. 그래서 만일 현재 여의도 정치 세력이 개헌 논의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는 4년 중임제에 대해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4년 중임제는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인가? 일단 이상을 실현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인 것 만은 분명하다. 직선제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향해 한 발짝이라도 갈 수 있는 대안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의도 정치가 말하는대로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킬 수 있는 대안이기는 한가? 아니다. 미국의 예를 보라. 4년 중임제 덕분에 대통령 권한이 약화됐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대통령이 최대 8년을 집권할 수 있게 되므로 대통령으로의 권한 집중은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이 경향은 보통 2년차부터 선거에 신경을 쓰게 되는 흐름과 맞물려 통치의 책임성을 제고하기 보다는 인기영합적 메시지 쪽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무총리를 국회가 선출하는 책임총리제를 도입하겠다고도 하지만, 실제 이 제도가 4년 중임 대통령 중심제와 결합돼 어떻게 작동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킬 수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이상으로 향할 수 있는 대안도 아니라면, 이런 개헌 논의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서 되새겨 볼 것은 선거제도개혁 논의의 아픈 기억이다. 선거제도개혁 논의는 시민사회 전체가 장기간 달라 붙어 이슈파이팅을 해 온 중요 의제였다. 그런데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다고, 정작 여의도 정치에서 논의가 소화되자 준연동형비례대표제와 위성정당이라는 불행한 대안이 탄생하였다. 이후 선거제도개혁은 다시 논하기가 어려운 주제가 되었다. 개헌도 마찬가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선거제도개혁 논의가 제대로 된 상황이었다면 거대정당들이 위성정당을 만들었을 때 유권자들이 회초리를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의미를 잘 포착해야 한다. 사람들은 봉인열차에서 내린 레닌이 4월 테제를 발표하는 멋진 순간을 떠올리지만, 1905년 혁명 실패 이후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을 직접 조직하자는 노선의 전환이 없었더라면 4월 테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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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