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낯선 말이다. 거의 기록되지 않았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현대사에 잃어버린 한조각이었던 『고등학생운동사』(김소연 외, 동녘, 2025)가 출간됐다. 1980-1990년대 고등학생들의 사회정치적 저항을 기록한 책이다.
이들은 1987년 6월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에 나서고, 촌지나 부실 수업 등 부당한 학교 운영에 맞서며 사학비리척결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야간학습이나 체벌금지를 요구하고, 자살학생을 만드는 입시 중심 교육에 반대하며 학생자치권 확보를 위해 퇴학을 비롯한 징계에도 학교에 맞선다. 또 한편 19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분신한 학생 열사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철수는 모두 고등학생운동 경험이 있거나 고등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고등학생운동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극히 드물다. 이따금 고운을 기억하더라도 전교조 운동의 부산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흔하다.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해직당하는 전교조 교사들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상징적일 것이다.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눈물 흘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전교생이 참여할 수 있는 종이비행기 시위를 조직하고, 도시락 반납이나 점거나 농성 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989년 약 47만 명의 중고생이 전교조 교사 해직에 맞서 투쟁했는데, 동시에 전교조 탈퇴 교사들에게 재가입을 요구하며 전교조 지키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가기도 한다.
1989년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주최 전교조 지지 고등학생연합집회. 출처: 김대현
소위 86세대들이 대학생 운동 이후 제도 안팎에서 권력을 형성해 간 경향이 있다면,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쩌면 그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86세대들은 학생운동 이력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운 세대들은 오히려 자신의 이력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치열하게 고운을 했지만 충분히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나 세상을 떠난 고운 열사들을 떠올리며 미안해하며, 조용히 각자의 현장을 치열하게 살아 간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이 책의 기획자이자 저자인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는 “우리 사회가 10대를 정치적인 주체로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고등학생운동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고등학생운동을 개인의 유배된 기억을 넘어 사회적 기록을 통해 집단적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책이 기획됐고,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11명의 저자들이 각자의 투쟁과 삶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 중 한 명인 기륭전자 분회장 출신이자 비정규직 꿀잠 운영위원장인 김소연은 정화여상 재학 당시 사학비리 투쟁을 선도적으로 전개한 내용을 서술한다. 그는 당시 투쟁 경험이 이후 갑을전자, 기륭전자 투쟁 등을 전개해 나가는 데 원형 같은 힘이었다고 말한다.
자살학우추모제 포스터. 출처: 정경화
그렇다고 이 책이 고등학생운동의 성취나 승리만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운동적 실패나 좌절, 갈등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87년 교육민주화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이 명동성당을 점거하지만 사회는 주목하지 않았다(전성원)거나, 고등학생운동 이후 평생 투쟁하는 삶을 결의하며 공장에 들어갔지만 공포스러웠고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정직하게 드러낸다(김성윤). 또 한편 정파 갈등으로 운동이 훼손되거나, 운동사회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조한진희)했던 현실도 등장한다.
사실 고등학생운동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10대들의 저항은 언제나 있어 왔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나 1960년 4.19혁명도 고등학생이 주도했다. 그리고 정부는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설치하거나 성적 압박 등의 방식으로 10대들의 사회정치 활동을 감시하고 탄압했고, 고등학생운동은 그에 영향을 받지만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왔다.
이 책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깎여 나가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집요하게 조금은 세상을 바꿔낸 삶이 담겨 있다. 묵직한 책을 읽다보면 한 명의 인간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주체로 각성하게 되고,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성장하거나 좌절하는지,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전진하거나 후퇴하는지 보게 된다.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학교에서도 저항하는 불온한 이들은 탄생하고, 불온한 이들은 어떻게든 역사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 일시: 4월 19일(토) 2시
* 장소: 강북노동자복지관 대강당
* 신청: https://forms.gle/DYAUGX6WJutg6Evy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