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회적 유럽'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이후 유럽연합(EU)이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수사적인 주의 분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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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프랑스 정치인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가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단일 통화의 기초를 마련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자크 들로르와 관련된 주요 아이디어 중 하나는,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좌파 정당들과 노조가 현 상황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모색하면서 제안된 '사회적 유럽' 개념이다. 그러나 들로르와 그의 위원회가 '사회적 유럽'이라는 슬로건을 받아들이면서 이 개념은 급진적 의미를 상실했고, 결국 유로존의 신자유주의 틀에 대한 알리바이로 전락했다. 그 결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렐리 디아나라(Aurélie Dianara)는 에브리 대학교(University of Évry) 연구원이자 『사회적 유럽, 가지 않은 길: 긴 1970년대의 좌파와 유럽 통합 (Social Europe, the Road not Taken: The Left and European Integration in the Long 1970s.)』의 저자이다. 이 인터뷰는 Jacobin Long Reads 팟캐스트의 녹취록을 편집한 것이다. 인터뷰 전체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다니엘 핀: 1970년대에 사람들이 '사회적 유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기 전, 로마 조약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같은 국가들이 가입할 때까지 유럽 프로젝트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전후 유럽 통합은 보통 유럽연합의 공식 담론에서 장 모네(Jean Monnet),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와 같은 유럽의 선각자적인 인물들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 프로젝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주로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당과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주도한 경제 프로젝트였다. 사회주의 세력은 초기에 미미한 역할을 했으며, 공산당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까지 유럽 기관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되어 오늘날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설립되었다. 이 조약은 벨기에,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가 창립 회원국으로서 공동 시장과 관세 동맹을 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은 많은 논의와 준비 과정을 거쳐 성사되었고, 경제 통합이라는 자유주의적 비전이 다른 사회적 비전들을 희생시킨 채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약의 248개 조항 중 사회 정책에 관한 조항은 12개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도 실질적인 관련성이 있는 조항은 단 세 개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유럽사회기금(ESF)을 설립하는 것이었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1960년대 후반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 다른 중요한 조항은 EEC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임금을 규정한 것이었으나, 이것도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적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사회적 보호와 노동 조건에 대한 조항이 있었지만, 이것도 나중에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적 번영이 사회적 진보를 자연스럽게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고, EEC가 바로 그런 번영을 창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사회적 결핍이 심각했다.
다니엘 핀: 그 당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공산주의 좌파 정당들은 유럽 통합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고, 어떻게 대응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유럽 통합은 20세기 유럽 좌파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특히 특정 시기에는 그 논쟁이 더욱 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마셜 플랜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행된 마셜 플랜은 미국의 차관으로 자금을 조달해 유럽 복구를 도운 프로그램이었다. 이 플랜은 당시 유럽 통합을 목표로 한 다른 계획들과 초기 냉전의 역학 관계와 맞물려 있었다.
공산당과 노동조합은 마셜 플랜과 1951년에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그리고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같은 유럽 통합 프로젝트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에게 이러한 계획은 소련을 고립시키고, 유럽을 미국 주도 하에 서방 블록의 일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프로젝트로 보였다.
이들은 유럽 통합 초기 프로젝트를 자본주의, 부르주아, 가톨릭, 군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그리고 7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태도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노동조합이 가장 먼저 EEC와 공동시장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는데, 외부에서 투쟁하고 폐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조르지오 아멘돌라(Giorgio Amendola)가 이끄는 친유럽 개혁파가 있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시작으로 다른 공산당들도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프랑스 공산당도 이탈리아보다는 늦게 입장을 바꾸었지만, 점차 유럽 공산주의 개혁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산주의 노조와 정당들은 유럽 기관에 대표를 파견하고 유럽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있었다. 유럽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럽 통합에 대한 태도에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의 정당들은 경제 및 정치적 통합에 찬성하며, 전후 통합 계획을 지지했다. 반면, 영국 노동당과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은 초국가적 유럽 통합에 반대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또 다른 진화를 겪었다. 1950년대 초, 쿠르트 슈마허(Kurt Schumacher)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 보수주의, 성직주의, 카르텔(capitalism, conservatism, clericalism, and cartels) 등 유럽의 4대 C를 비난하며 유럽 통합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로마 조약이 체결될 무렵, 독일 사회민주당은 입장을 바꾸어 조약에 찬성표를 던졌다.
영국 노동당은 1973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가 EEC에 가입한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이거나 분열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이러한 분열이 1970년대 유럽 좌파가 유럽 통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결국 사회적 유럽을 실현하지 못한 여러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니엘 핀 : 1970년대의 경제 위기와 전후 호황의 끝은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전후 호황의 종말은 유럽 지도자들이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변화를 고려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유럽 공동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을 같은 방향으로 이끈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는 서유럽에서 노동자 운동, 학생 운동, 페미니즘 운동, 환경 운동과 같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유럽 지도자들에게 사회적 문제를 더 많이 고려하게 만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요소는 제3세계 국가들이 ‘신국제경제질서’라는 명분 아래 권력과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점이다. 이 역시 유럽의 결정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통화 체제가 붕괴되었고, 전후 호황은 소진되었다. 이러한 시기는 서유럽에서 30년 동안 복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특징짓던 전후 타협이 해체된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대안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1970년대,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여러 가지 길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였다. 1974년,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경제학자 군나르 미르달(Gunnar Myrdal)과 오스트리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인 경제적 사상을 대표했지만, 그만큼 그 당시에는 다양한 대안들이 가능했다.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유럽 좌파는 '사회적 유럽'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럽 좌파는 정치적 성공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서유럽 전역에서 정부를 이끌었으며, 전통적 텃밭인 스칸디나비아는 물론 서독,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프랑스에서도 정권을 잡았다. 이탈리아와 룩셈부르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동시에 서유럽 공산당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적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의 노동조합들도 조합원 수와 영향력 면에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좌파는 유럽 통합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내부로부터 유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긴 1970년대 동안, 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그리고 조금 덜하지만 공산주의 정당들도 유럽 정책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 초국가적 협력 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이 창설되었다. 이는 냉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 기독교민주주의, 공산주의 전통을 가진 노동조합들이 하나로 통합된 조직으로, 약 4천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오늘날 유럽사회당(PES)의 전신인 유럽공동체 사회당연맹이 설립되었다.
다니엘 핀 : 말한 것처럼, 이 시기는 유럽과 세계 정치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던 순간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유럽 좌파는 자신들의 목표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유럽 협력을 위해 어떤 주요 제안들을 내놓았는가? 당신이 언급한 '가지 않은 길' 또는 '여러 가지 않은 길' 중 어떤 계획들이 실현에 가까웠던 적이 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1970년대에 제안된 '사회적 유럽' 프로젝트는 주로 유럽의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그리고 주요 노동조합, 특히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에 의해 구상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경제를 규제하고 계획하며 민주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노동 시간을 단축하며, 유럽 차원에서의 사회 및 재정적 조화를 이루는 등의 제안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예를 들어, 유럽 기관들을 활용해 경제를 규제하고 계획하며 민주화하는 것, 유럽 차원에서 사회적·재정적 제도를 조화시키는 것, 생활 수준과 노동 조건을 향상시키고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 등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일련의 제안들은 대체로 자본보다는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 프로젝트는 환경 문제도 포함했으며, 좌파가 반민주적이거나 비민주적이라고 간주한 유럽 기관의 민주화를 위한 제안도 포함되었다. 또한 국제 경제 질서를 제3세계에 유리하게 재조정하려는 열망도 있었다. 이러한 계획들이 실현에 가까웠던 적이 있었는가? 대답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1970년대에 이러한 제안들 중 일부는 유럽 의제에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유럽 좌파의 노력 덕분에 1974년 유럽공동체가 최초의 사회 행동 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사회 기금의 강화와 더불어 직업 훈련 및 근로 조건을 위한 다양한 유럽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가장 중요한 진전은 성평등과 직장에서의 건강 및 안전 문제였으며, 유럽 이사회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이 두 분야에 관한 일련의 지침들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1970년대 동안 좌파가 구상한 '사회적 유럽' 프로젝트의 주요 제안들이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거나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 유럽 좌파가 벌였던 두 가지 대표적인 투쟁의 사례가 있는데, 그들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첫 번째는 완전 고용을 지지하는 대안 경제 전략을 위한 싸움이었다. 유럽 좌파는 특히 임금 손실 없는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요구를 부각시키기로 했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유럽 좌파의 대규모 캠페인이었다. 이 싸움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은 이를 지지하는 첫 범유럽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결국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유럽 이사회는 1984년에 이 주제에 대해 구속력이 없고 매우 야심적이지 않은 권고안을 채택했을 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싸움은 직장과 경제의 민주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당시 매우 중요한 주제였으며, 이는 1980년 다국적 기업에서 노동자의 정보 및 협의 권리에 대한 유럽 지침 제안으로 이어졌다. 이 제안은 이를 추진한 네덜란드 출신의 사회민주주의자 헨크 브레델링(Henk Vredeling) 사회 담당 집행위원의 이름을 따 브레델링 지침으로 불렸다.
물론 이 지침은 고용주들과 경제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유럽 기관 내부에서도 중요한 반대에 직면했다. 결국, 이 지침은 1986년 유럽 이사회에서 수년간의 논의 끝에 폐기되었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한 후속 지침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들은 긴 1970년대 동안 유럽 좌파가 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덜 야심찬 내용이었다.
다니엘 핀 : 이제 위기와 가능성의 순간에서 유럽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발전한 방식을 살펴본다면,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1980년대 초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정부에서 장관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오렐리 디아나라 : 자크 들로르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매우 잘 알려진 정치인이다. 그가 작년 말 사망했을 때, 정치계와 언론계 엘리트들은 그를 한결같이 위대한 유럽인으로 칭송했다. 들로르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 1980년대 프랑스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정치적 궤적은 1970년대 급진적인 물결을 타고 1980년대에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전환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81년, 프랑스에서 좌파가 승리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 미테랑 정부는 처음에 산업과 금융의 국유화,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지만, 결국 경제적 압력에 직면하여 신자유주의로 전환했다. 들로르는 재무부 장관으로서 이러한 전환을 이끌었다. 1983년, 그는 긴축 정책으로의 전환을 주도했고, 이는 프랑스 좌파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자크 들로르는 사회 기독교주의자로서 프랑스 국립은행에서 일했고, 국가계획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970년대 초에는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대통령의 샤반델마스(Jacques Chaban-Delmas) 총리 밑에서 특별 고문으로 일하다가, 1974년 사회당(PS)에 입당했다.
당시 사회당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지도 아래, 분열된 프랑스 사회주의 세력을 재편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프랑스 공산당(PCF)과 공동 프로그램을 채택하며, 정부와의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그 시기에 사회당은 자본주의와의 결별을 주장하며, 당시 미테랑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다. 1970년대에, 프랑스 신좌파 — 흔히 제2 좌파라고 부르는 — 의 흐름 속에서 들로르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사회주의 계획과 노동자 자기관리를 기반으로 한 분권화된 형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상황은 크게 변했다. 1981년 5월, 프랑스에서 23년간 이어진 우파 정부가 끝나고 좌파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당 장관 4명을 포함한 사회주의 정부가 출범했다. 들로르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새 정부는 출범 초기에 산업과 금융의 광범위한 국유화, 공공 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케인즈주의적 경기 부양책 등 여러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도입했다. 하지만 동시에,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비롯한 프랑스의 주요 교역 파트너들은 당시의 경제 위기에 대응해 긴축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 좌파의 정책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점점 더 무역 및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통화 가치 하락과 투기 압력도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대출을 확보하고 지출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당시 유럽 통화제도(EMS)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통화 정책에 대한 여지가 제한적이었다.
1983년 3월, 프랑스 정부는 프랑화 평가절하를 세 번 겪은 후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고수할지, 아니면 EMS 잔류를 위해 프로그램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 프랑스는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긴축, 예산 삭감, 국유화 철회, 금융 규제 완화를 기반으로 한 급격한 경제 정책 전환을 단행했다.
이러한 긴축 정책으로의 전환(프랑스어로 tournant de la rigueur)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좌파에게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 전환은 유럽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자크 들로르의 영향력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다니엘 핀 : 1980년대 중반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된 자크 들로르는 어떻게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이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형했는가? 그는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자크 들로르는 보통 위대한 유럽인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그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유럽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하고, 유럽의 사회 및 결속 기금을 강화하며, 사회 분야에서 유럽의 권한과 규제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1985년에 새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들로르는 경제 자유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핵심은 단일 시장 프로젝트로, 상품, 자본, 서비스,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모든 남은 장애물을 제거해 유럽공동체의 기존 내부 시장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프로젝트는 모든 유럽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마거릿 대처와 헬무트 콜 정부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다양한 기업 로비의 압력, 특히 유럽 산업 원탁회의(ERT)의 영향은 단일 시장 프로그램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3년에 창설된 ERT는 초기에는 볼보(Volvo), 네슬레(Nestlé), 피아트(FIAT), 필립스(Philips) 등 유럽 최고의 다국적 기업 17곳의 CEO들로 구성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이론적 근거는 1986년 단일유럽법(Single European Act)에 의해 제도화되었고, 그 방향은 자유 시장 지향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자본 이동의 자유화, 은행 및 보험 부문의 규제 완화에 관한 중요한 지침들이 채택되었다.
동시에, 자크 들로르와 그의 집행위원회가 단일 시장 프로그램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회 분야에서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추진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1970년대에 사회당에서 활동하며 사회적 유럽 프로젝트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구상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의제 중 사회적 측면은 경제적 측면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예를 들어, 자크 들로르가 집행위원회에서 제안한 패키지들은 유럽 기관 내부와 회원국 간의 긴 협상 끝에 채택되어 경제 및 사회적 결속 기금이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금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유럽 공동체 전체 예산 역시 제한적이었다. 오늘날에도 EU의 전체 예산은 유럽 GDP의 1%를 간신히 넘을 정도로 매우 적다.
또 다른 사례는 1989년에 채택된 노동자의 기본 사회적 권리 헌장이다. 이 헌장은 몇 년간 유럽 좌파와 노동조합이 요구해온 것이었으며, 몇 가지 사회적·경제적 권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헌장은 구속력이 없었다. 같은 해 헌장을 이행하기 위해 채택된 사회 행동 프로그램 역시 단 47개의 수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단일 시장 프로그램에 비해 매우 적은 수였다. 이 47개 수단 중 대부분은 구속력이 없는 권고안과 의견에 불과했다.
다니엘 핀 : 들로르가 위원장직에서 물러날 무렵, 유럽 공동체는 유럽연합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운 회원국들이 추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 공동체는 질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들로르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가 물러날 즈음, 유럽연합은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에 의해 창설되었고, 유럽연합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단일 통화, 즉 유로화(Euro)를 도입하기 위한 경제 통화 동맹(EMU)이 창설된 것이다. 들로르는 유로화를 설계한 핵심 인물로 기록되었다.
1988년, 유럽 이사회는 경제 통화 동맹을 실현하기 위해 들로르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설치했다. 1년 뒤, 들로르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 보고서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반영되었다. 이 조약은 정부의 예산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공공 부채를 GDP의 60% 이내로 제한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하지만 실업률이나 사회적 지표를 고려한 규칙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새로운 조약의 핵심은 영국과 덴마크를 제외한 회원국들이 2000년까지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권한 아래 단일 통화를 채택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유럽 정부들이 통화 발행과 환율 조정 등 국가 경제 및 통화 주권의 핵심적인 부분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또한 처음으로 수렴 기준(Maastricht Criteria)이라고 불리는 규정을 공식적으로 도입해, 회원국의 경제 정책에 강제적 규칙을 적용했다. 예를 들어, 정부 예산 적자는 GDP의 3% 이내로, 공공 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제한했다. 또한, 회원국들은 인플레이션율을 낮게 유지해야 했다. 들로르가 유감스럽게도, 조약을 설계한 협상가들은 실업률이나 다른 사회적 측면과 관련된 기준을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 시기에는 안보 및 외교 정책 분야에서의 통합 강화, 사법 및 치안 분야에서의 긴밀한 협력 등 다른 질적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주요 변화는 단일 시장과 경제통화동맹으로, 이는 EU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헌법적으로 명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니엘 핀 :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 마련된 단일 시장과 프레임워크는 '사회적 유럽'이라는 개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한 사실은, 조세 및 사회적 조율 없이 무역을 자유롭게 하고, 서비스 규제를 완화하며, 자본이 EU 내에서 (또는 어떤 형태의 지역 무역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허용하면, 노동자들과 국가 복지 제도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일 시장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회적 권리, 임금, 과세, 재분배를 둘러싼 바닥을 향한 경쟁을 촉발시켰다.
유럽 좌파는 이미 1970년대에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 자유화가 아닌 사회적 규제와 상향 조정,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 강화, 경제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단일 시장 프로그램은 이러한 좌파의 요구와는 반대로 경제 자유화를 촉진했다. 사회적 유럽의 목표는 여전히 경제적 자유화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1986년 단일유럽법(Single European Act)과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경제를 자유화하고 예산 엄격성을 부과했지만, 노동조합과 유럽 시민들에게 약속된 유럽 통합의 사회적 차원은 계속해서 뒤처졌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사회 정책에 관한 합의가 부속서로 포함되었지만, 이는 사회 분야에서 유럽의 권한을 거의 증가시키지 못했으며, 신생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헌법화를 상쇄할 수 없었다.
조약에는 사회 프로토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용주, 노동조합, 유럽 기관 간의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이는 고용주들의 저항과 유럽 기관 및 정부의 압력, 그리고 사회 운동의 부재로 인해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프로토콜이 도입된 첫 20년 동안 부모 휴가, 시간제 근무, 기간제 고용에 관한 세 가지 지침만 통과되었고, 그 결과는 매우 빈약했다. 오늘날 명백히 보이듯이, 유럽은 1970년대 유럽 좌파가 추구했던 사회적 유럽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으며, 사회적 차원은 자유 시장과 사유 재산 확대와 양립할 수 있도록 맞춰진 신자유주의적 유럽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니엘 핀 :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유럽은 유로존 위기로 인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자크 들로르가 위원장으로서 남긴 유산은 이 위기에서 어떻게 작용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들로르 보고서에 따라 설계된 경제통화동맹(EMU)은 20개국의 통화 정책을 초국가적 수준으로 이관했다. 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하던 통화 수단을 잃게 되었다. 또한 마스트리히트 기준에 의해 투자 능력도 제한되었다.
독립적인 유럽중앙은행(ECB)은 독일의 오르도자유주의 정책에 크게 맞춰져 있었으며,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으로 두고 실업률 해결보다 우선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동맹 안에 실질적인 연대 메커니즘이 없었기 때문에, 이 구조는 특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와 같이 전통적으로 통화와 경제가 취약한 국가들에게 족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는 유로존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인 독일 마르크화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유로존은 심각한 부채 위기에 직면했고, 이 위기는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위기는 자유화와 통화동맹이 특히 유럽의 취약한 경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었다. 그리스가 가장 분명한 사례였다. 그리스는 경제 구조상의 여러 문제로 인해 2008년 이후 위기로 큰 타격을 받았고, 부채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 결과, 그리스는 시장으로부터 징벌적 금리를 부과받아 차입 비용이 증가하고 부채와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유럽연합에 대출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디폴트 위험은 그리스 국채에 대규모로 투자한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이 때문에 트로이카(Troika), 즉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CB, IMF는 그리스가 공공 서비스(예: 건강, 교육) 삭감, 최저임금 및 임금 전반의 파괴 등 엄격한 긴축 조치를 이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1,100억 유로의 대출을 강요했다.
결론적으로, 이 자금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로 흘러들어갔고, 그리스 경제는 이러한 긴축 조치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는 크게 그리스가 통화 정책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EMU 내 실질적인 연대 메커니즘의 부재와 신자유주의적 마스트리히트 기준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니엘 핀 : 유럽연합의 개혁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지난 15년간 유럽 좌파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이 논쟁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오렐리 디아나라 : 이 질문은 내가 작업 중이거나 책을 쓰면서 계속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이다. 긴 1970년대 동안 유럽 좌파가 사회적 혹은 사회주의적 유럽을 건설하는 데 실패한 경험은 오늘날 좌파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EU를 사회적, 민주적, 생태적 진보의 도구로 변모시킬 가능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비관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점은, 1970년대에는 노동운동과 좌파에게 훨씬 유리한 힘의 균형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 사회경제적 거버넌스의 틀도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했다. 당시 유럽 테이블에는 6개 혹은 9개 국가만 있었지만, 지금은 27개 회원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는 유럽의 조약과 정책에 훨씬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21세기 사회적 유럽을 다시 상상하려는 시도는 점점 더 환상처럼 보인다. 최근 몇 년 동안,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유럽 지도자들은 마스트리히트 합의의 일부분을 열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안정 협약이 몇 년 동안 유예되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다시 이 규칙들을 강하게 재부과하려 하고, 긴축 정책을 재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EU가 변할 수 있다고 믿거나, 혹은 다른 형태의 유럽 협력과 단결로 대체될 수 있다고 믿는 좌파에게는, 사회적 유럽의 잊혀진 패배가 좌파 내부의 분열과 전략적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속적인 과제를 던져준다. 이 패배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좌파가 국제주의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녹색, 급진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시민 사회 단체들이 몇몇 면에서 유럽 차원에서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낙관하는 좌파도 있다. 오늘날 시민들은 과거보다 유럽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기후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근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국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 패배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좌파가 신자유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럽에 명확히 반대하는 진정한 초국가적 연합이나 블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좌파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분명히 지향하는 공동 프로그램에 합의하고, 대중적인 동원에 기반한 공세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목표에 아직 매우 멀리 있다. 이러한 개입이 없다면, 좌파가 EU를 사회적 유럽으로 변화시키거나, 유럽의 진보적 사회·경제·환경 전환에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바꿀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출처] How “Social Europe” Became the Alibi for a Neoliberal EU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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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렐리 디아나라(Aurélie Dianara)는 에브리 대학교의 연구원이고, 다니엘 핀(Daniel Finn)은 자코뱅에서 피처 에디터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