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년 2월, 전태일은 “노동자들을 버릇없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이날 이후로 그는 재단사가 되어 시다들의 처지를 개선해보겠다는 목표를 단념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라는 노동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청계천 일대의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등 열악한 노동 현실을 개선해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나간다. 노동청에 청원서를 내거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다. 물론 그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경멸과 조롱뿐이었다.
“내가 일하던 공장은 종업원이 30여 명쯤 되는 잠바를 만드는 곳이었지. 14세부터 18세 사이가 시다를 하는 사람일세. 보통 아침 출근은 8시 반 정도에 하네. 퇴근은 밤 10시부터 11시 반 사이일세. 여기에 문제가 있네. 하루에 몇 시간인가. 1일 14시간일세. 그 많은 먼지 속에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은 너무 애처롭네. 이 사람들도 체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아닌가. 이제 겨우 14살이 된 아이가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그 힘에 겨운 작업량을 제시간에 못 해서 상사에게 꾸중을 듣고, 점심시간이면 코끼리가 비스킷을 먹는 정도의 양밖에 안 되는 식사를 한다네.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는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 가혹한 매질을 하고 있네.”
전태일은 일을 하다가 각혈을 하는 여공을 본 적이 있었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대표적인 직업병이었던 폐병이었다. 그 여공은 결국 해고당했다. 공장의 부속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의 처지를 목격한 전태일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후 공사판을 전전하던 전태일은 공장의 안과 밖 모두에서 노동자들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앞에 보이는 트럭에 젖소들이 실려간다. 다섯 마리를 칸막이를 해서 실었다. 우습지. 나는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 실려 가고 있다. 일이 시작되었고, 나는 삽을 하나 배당 받았지. (중략) 오늘 처음 왔건만 누구 하나 간섭이나 주의를 주는 사람도 없었지. 최소한 이름은 물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할 지경이야.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전태일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는 부품들의 처지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허기를 느끼며 따뜻한 밥 한 끼와 생존을 갈망하는 자신을 감각하며 절망에 몸서리친다. 아마도 전태일은 이 사회가 인간들을 살해하고 있다고 느낀 듯하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청계천 평화시장을 향해 걸어간다. 그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고, 그 요구는 이후 55년 동안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봉제공장의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행상을 했다. 그는 평생을 판자촌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통해 가난보다 극심한 절망을 경험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운동을 꾀하다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낙담했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동료들에게 풀빵을 나눠주고, 차비를 아끼기 위해 먼 거리를 자주 걸어 다녔다는 사실 또한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근래에는 노동부 장관까지도 이러한 사례들을 언급하며 ‘풀빵정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전태일이 쓴 수기나 편지들을 통해 그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점은 그가 단지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정직하다는 말은 거짓이나 허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전태일은 부조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가장 괴로워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속적인 현실에 적응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수치스러움에 몸부림쳤다. 결국 전태일이 진정으로 나누고자 했던 것은 풀빵이 아니라, 여공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가는 공장 바닥에 대한 생각과 분노 그리고 그것을 본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과 고민들이었다. 자기 안의 정직을 평생동안 찾아 헤매야만 했던 전태일을 기억한다.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르고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해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지를 못합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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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