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체계학: 변증법적 추론과 사회주의의 필연성

캐나다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머레이 E.G. 스미스(Murray E.G. Smith)와 팀 헤이슬립(Tim Hayslip)은 ‘변증법적 추론’의 원리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대중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심오하고 광범위한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의 전체 제목은 ⟪사고 체계학: 위기의 시대를 위한 비판적-변증법적 추론과 사회주의를 위한 논증⟫(Thinking Systematics: Critical-Dialectical Reasoning for a Perilous Age and a Case for Socialism)이다.

칼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스미스와 헤이슬립은 이 통찰을 확장하여 “철학자들은 단지 인간 사고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을-대대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저자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필요는 철학적 지식층이 주도하는 끝없는 논쟁과 담론을 통해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 대중과 청년들에게 급변하는 점점 더 위태로운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 틀-즉 변증법적 추론-을 갖추게 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자연적, 사회적, 그리고 의식(인간의 의식적 활동)이라는 세 가지의 구별되지만 서로 침투하는 ‘존재론적 영역’에는 실제적인 모순, 매개, 그리고 운동 법칙이 존재한다.

변증법적 추론은 인간이 자연 세계, 인간 사회, 그리고 이 둘 간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필수적이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비판적-변증법적 추론의 특정 패러다임은 ‘사고 체계학’(Thinking Systematics, TSS)이라 명명된다. TSS는 보다 체계적(과학적)인 세계관을 촉진하는 사고 방식과 방법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현재의 인간 조건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고, 우리가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접하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개별적·집단적 이해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 시킬 수 있다.

350쪽에 걸친 이 책에서 저자들은 TSS가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에 맞서고, 단순한 의견이 아닌 사실을 옹호하며, 대놓고 거짓말을 용인하거나 장려하는 문화적·지적 경향에 맞서 객관적 진리 개념을 방어하고, “맹목적 신앙”(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에 의존하는 사고 방식이 생성하는 비합리적 사상에 맞서 합리적 사고를 강화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미스와 헤이슬립은 이를 “신앙주의(fideism)”라 부른다.

저자들에 따르면 TSS는 ‘마음을 위한 도구 상자’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세계를 사고하는 방식,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개선하도록 설계되었다. “그 핵심은 우리 세계와 그 문제들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안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힘들에 대해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TSS라는 약어는 ‘사고 체계학’뿐만 아니라 ‘사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Taking the Social Seriously)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는가? 저자들은 인간 조건과 그것이 ‘자연’ 및 전통 철학이 ‘이상적(ideal)’이라 부르는 것과 맺는 관계를 분석함에 있어 ‘사회적’ 범주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것 외에도, 단순한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더 복잡한 개념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겉보기에 혼란스러운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접근 방식을 따른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Capital)은 현대 경제의 일상적인 거시적 외형(예: GDP, 세금, 관세, 자금 이동과 은행 시스템)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개별 상품이라는 자본주의 생산의 미세한 분자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며, 상품의 이중적 성격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탐구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자본주의 사회의 부의 ‘기초적 형태’라고 묘사하며, 그것이 자본주의하에서 일상생활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이후 그는 독자들을 임금노동, 자본, 화폐, 은행, 자본주의적 위기와 같은 현상의 더욱 복잡한 탐구와 설명으로 안내한다.

저자들은 형식논리(예: A=A이지만, A≠B)가 기초적이며 많은 상황에서 유용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형식논리는 자연과 사회의 변화를 다루기에는 불충분하다. 외형은 기만적일 수 있다. 한 예로, 저자들은 강(river)을 든다. 각 강은 독특하고 개별적인 정체성을 가진다. 각 식물은 서로 다르고, 각 동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형식논리적으로 볼 때 A=A이지만, A≠B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강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며, 도토리는 나무로 자라고, 유충은 나비로 변태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강에 발을 담글 때마다 다른 물이, 또 다시 다른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에 발을 담그는 행위 자체가 강을 순간순간 변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형식논리는 정적이며, 변화와 모순의 과정을 이해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형식논리는 한 장의 사진이라면, 변증법적 논리는 영화다. A는 항상 A와 같지 않으며, B로 변화할 수도 있다. 저자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변증법적 사고는 우리에게 시간을 고려하며 사고할 것을 요구하며, 현재 자체가 단지 역사 속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가지도록 한다.”

이러한 통찰이 현재의 문제와 논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나의 예로, 변증법적 추론은 중국 경제와 국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이 자본주의적이라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형식논리에서 A=A이므로, 중국은 자본주의 아니면 사회주의여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그리고 ‘체계적으로’) 사고할 때, 중국은 변화하는 경제로 볼 수 있다. 즉, ‘과도기적 상태’에 있다.

1949년, 마오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농민군이 자본주의와 봉건제(지주제)를 타도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산업과 토지를 국유화하고, 대부분 집단화된 경제를 계획하려 했으나 제한적인 성공에 그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중국이 사회주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노동계급이나 농민 대중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 엘리트가 지배하는 거대한 국가기구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마오주의 이후의 지도력 아래, 억만장자들과 임금노동을 동반한 거대한 자본주의적 부문이 존재하며, 이들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현실은 마르크스주의적 정의에 따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표현도, “자본주의 중국”이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형식논리에 의존하면 이는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추론은 ‘불균등하고 결합된 발전’과 ‘과도기적 형태’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혼란을 해소한다.

자연에서 엥겔스는 오리너구리(platypus)의 예를 자주 들었다. 오리너구리는 호주 고유의 유대류(marsupial)로, 알을 낳는다는 점에서 파충류와 닮았지만, 온혈 동물이자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점에서는 포유류와 같다. 즉, 그것은 파충류적이면서 동시에 포유류적이며, A이면서 동시에 B이다. 자연의 진화 과정에서, 오리너구리는 ‘과도기적 종’(reptile에서 mammal로 이행 중인 종)으로 볼 수 있다.

TSS의 또 다른 철학적 기둥은 ‘일원론’으로, 관념론적 이원론에 반대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원론은 의식(생각과 관념)이 물질적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물론은 일원론적 관점에서 개별 뇌 속의 사고와 외부 세계를 모두 물질적, 객관적 현실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의 사고는 신경계의 세포와 시냅스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움직임 결과이지만, TSS에 따르면 러시아 철학자 E. V. 일리엔코프(E. V. Ilyenkov)를 따라, 그것은 또한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다. 즉, 사회적 분업과 지식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자연 및 서로 간의 관계에서 겪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동시에, ‘외부 물질 세계’는 실재하며, 인간의 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우리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인간 사고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God)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다. 18세기의 주관적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Bishop Berkeley)가 “외부 세계는 신이 우리 머릿속에 심어준 인식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을 때, 영국의 비평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이렇게 반박했다. “저 바위를 보라. 가서 발로 차보고, 그게 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지 말해보라!”

유물론적 자연과 세계 개념은 마법, 종교, 도덕적 광기의 허구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역사에 대한 일원론적·유물론적 개념은 역사의 전개가 왕, 귀족, 지배층이 수동적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이라는 이론을 부정한다. 역사는 변화하는 물질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의 활동의 결과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th Brumaire of Louis Napole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나가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과거로부터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역사를 만든다.”

스미스와 헤이슬립은 변증법적 추론과 일원론적 유물론적 현실 개념이 필연적으로 세계를 변혁하려는 실천적 프로젝트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이 도출된다. TSS 방법론은 사회주의를 단순히 ‘좋은 생각’으로가 아니라(더욱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선호’로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미래 발전, 그리고 자연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필연성으로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빈곤, 환경 재앙, 과두제 지배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가져올 수 있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론 머스크가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것은 그가 ‘벌어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그와 같은 자본가 투자자들이 거대한 개인적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게임의 규칙 덕분이다. 머스크는 이 게임에서 유난히 운이 좋았고 능숙한 참가자로 증명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속성에 대한 평가가 다음의 단순한 사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즉, 사회의 생산 자산에 대한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 착취를 통한 사적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머스크와 같은 유형과 규모의 성공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출처] Thinking Systematics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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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유물론 사회주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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