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월간 사람] [특집] 트위터와 기적의 매뉴얼

[월간 사람] [특집] 트위터와 기적의 매뉴얼

지난 2월 말, 49일간의 홍대 투쟁이 승리로 끝나던 날, 나는 그때의 말할 수 없이 먹먹한 감동을 기억한다.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무모해 보이고 위험해 보인다.”라고 『소금꽃나무』에서 김진숙 씨는 쥐똥 나오는 도시락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얻어낸 첫 승리를 회고하며 적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인의 제안으로 ‘홍대 청소노동자 돕기 조선일보 광고’ 작업에 참여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1월 10일, 트위터로 성사된 번개에서 김여진 씨가 제안한 이 아이디어는 홍대 사건에 대해 단 한 줄 써주지 않는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자는 것이었다. 오로지 트위터로만 모금을 진행했고, 7일 만에 1200만 원이 모였다. 그리고 조선일보에서 아주 예외적인 단가에 허락해준 이 광고는 큰 이슈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자발적으로 모인 트위터러(트위터 사용자)들이 홍대 청소노동자 돕기 바자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이 두 가지 사건은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새로운 참여방식을 크게 알렸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광고나 바자회 준비에 참여한 이유가 사회나 노동 문제에 큰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좀 있었고 내가 할

[월간 사람] [특집]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든다

[월간 사람] [특집]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든다

세현은 학기말이 되면 성적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한국의 어느 대학생이 성적에 신경을 쓰지 않겠냐마는 세현의 경우는 각별하다. 그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은 곧 동생이 자기를 위해 대학을 포기했다는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다. 세현의 집은 IMF 이후에 몰락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고 있던 세현에게 가족은 ‘몰빵’했다. 몰빵을 한다고 해도 세현의 가족이 국립대도 아닌 사립대의 등록금을 감당하는 것은 무지 힘든 일이었다. 대학 첫 학기를 마치고 집에 내려가자마자 아버지가 물은 첫마디가 ‘장학금은?’이었다. 아버지의 그 첫마디가 서운했지만 세현은 곧 자기가 대학을 다니는 것이 가족에 얼마나 큰 짐인 것인지를 깨달았다. 동생 볼 면목이 없었다. 이때부터 어찌되었건 장학금을 받아 집에 부담을 줄이고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의 낭만? 그딴 것은 세현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 이 또한 사치스러운 말이다. 주변의 모든 친구는 곧 학점 경쟁자였다. 친구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나약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세상에서 자신은 혼자이며,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만이 가족의 희생을 보상할 수 있는 길이었다. 스스로 모든 친구를 적으로

[월간 사람] [특집] 무엇을 위한 연대, 무엇을 향한 적대인가

[월간 사람] [특집] 무엇을 위한 연대, 무엇을 향한 적대인가

2011년 들어 우리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사회적 연대의 물결을 목도하고 있다.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시작된 청(소)년 활동가들과 젊은 예술가들의 재기발랄한 연대투쟁은 홍대에서 해고당한 ‘청소노동자’들과 한대련(한국대학생연합)의 반값등록금 시위에 대한 연대를 거쳐 명동의 두리반 ‘마리’와 강남 속의 또 다른 강남 ‘포이동 266번지’에 대한 연대로 이어졌고 마침내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향한 세 차례의 희망버스 원정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희망버스의 위력은 조남호를 국회 청문회의 증인으로 세우기에 이르렀고 그동안 희망버스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민주노총이 지난 주말(8월 20~21일)을 기해 전국노동자대회와 희망시국대회를 서울광장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드시 철회하기 위해 8월 마지막 주말을 기해서는 4차 희망버스가 서울로 모여들 예정이다. 또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평화 순례단이 강정마을로 날아가 지역 주민 그리고 운동가들과 연대하는 ‘평화의 비행기’가 추진되고 있다. 수구세력의 집요한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연대의 흐름은 더욱 다양한 현장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각각의 현장들이 더욱 밀접하게 결속하고 지원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연대 투쟁이 갖는 형식적 특이성과

[월간 사람] [人터뷰]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월간 사람] [人터뷰]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다가온 느낌은 ‘비장함’이었다. 내 주변 동료들은 이미 그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형’,‘승배야’라는 호칭을 쓰며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첫 만남에서 까만 얼굴을 한 그의 무표정 속에 묻어있는 삶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느꼈다. ‘탈출’을 감행한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당참을 기대해서 더 그러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비쩍 마르고 말이 없었고, 그래서 하루하루 어떤 결의, 결단으로 사는 듯 했다. 서른한 살 젊은 청춘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그가 왜 그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을까? 5살 때부터 31살이 되기까지 25년간을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전전하고 최근에는 노인치매요양원과 정신병원에서 갇힌 삶을 살다가, 스스로의 힘과 용기로 지금 여기 세상 속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다시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까? 정승배, 시설 밖으로 나오겠다는 용감한 결단을 내려 이제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려는 한 젊은이를 만나보자. 정승배 일대기 그는 2010년 4월 전남 장성의 한 치매노인병원에서 탈출한 젊은 청년이었다. 탈출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병원 측에 명확한

[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용역의 뒷모습

[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용역의 뒷모습

부끄럽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문학상의 생활·기록문 분야 예심을 덜컥 맡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화로 수락하고 보니 우편으로 접수된 것까지 포함해서 대략 150여 편의 글을 일주일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가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고 그 당락을 결정짓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본심에 보낼 작품과 탈락시킬 작품을 가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본심으로 넘겨야 하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들의 편차가 워낙 심한 탓도 있었습니다. 생활글, 기록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문장이나 예술성보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있는 글, 글쓴이의 정성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들을 위주로 추렸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지만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했고 혼자 드러누워서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월간 사람] [특집] 풀뿌리 정치를 통해 사람을 만나다

[월간 사람] [특집] 풀뿌리 정치를 통해 사람을 만나다

풀뿌리 정치는 권력을 잡아 그 힘으로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만드는 기나긴 과정이다. 그래서 풀뿌리 정치에서는 사람들의 참여가 핵심이다. 나는 환경활동가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녹색정치를 꿈꾸다 과천시의원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정치는 환경을 위한 정치나 몇몇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주민들 스스로 지역에서 만드는 풀뿌리 정치였다. 인구 7만 명의 작은 도시 과천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지속가능하고 더불어 사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현장에서 주민들과 먹고 자며 일한 것이 환경활동가로서의 첫발이었듯, 2006년 풀뿌리 시의원으로서의 첫발은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시의원이 되기 전에는, 얼핏 이야기는 들었지만, 비닐하우스 마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곳을 돌아보게 된 것은 순전히 의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해드리는 사업이 있는데 자원봉사자들로부터 한번 같이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이때 주로 들른 곳이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이다. 혼자 사시는 어느 할아버지의 하우스는 냄새가 너무

[월간 사람] [특집] 마을과 정치

[월간 사람] [특집] 마을과 정치

풀뿌리운동(정치)과 인권운동은 ‘더불어 사는 것’을 위해 필요한 활동일 것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활성화가 필요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형성,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는 공존과 공생, 그리고 배려와 연대가 핵심인데 이것이 풀뿌리운동과 인권이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도심 속 공동체로 알려진 성미산마을의 활동 사례는 의미 있을 것이다. 성미산마을은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인근에 육아, 교육과 먹거리 등의 필요에 의해서 모여 살다 서로 친해지게 되고, 그러다 다양한 생활의 욕구를 공동으로 해결하면서 마을이 되었다. 이제는 교육 뿐 아니라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제기되는 생애주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주택, 문화, 노후까지도 같이 고민하게 되는 정도가 되었다. 마을주민 아난도에 의하면, “고을 향(鄕)자가 바로 밥솥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은 상형으로 마을, 고향, 시골, 대접을 뜻하는 문자라 하니, 지금 성미산마을의 모습이 꼭 그러하다. 옛날에 밥솥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았다는 것은 민생고를 같이 해결했다는 얘기인데, 생활의 욕구를 같이 해결해 나가는 현재 성미산마을 주민들의 모습에서 그 마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순전히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에

[월간 사람] [人터뷰] “친구 하나 있음 소원이 없겠어”

[월간 사람] [人터뷰] “친구 하나 있음 소원이 없겠어”

전화로 알려준 4자리 숫자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보이지 않는 집주인을 향해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건네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방인이 안방까지 들어왔건만 침대에 누운 집주인 김선심(47)씨는 일어날 줄 모른다. 아니 일어날 수가 없다. 몸은 물론이고 머리조차 맘대로 가눌 수 없는 1급 뇌병변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150센티미터가 될까 싶은 작은 키에 깡마른 그의 몸은 천장을 바라보며 눕혀진 채 움직일 줄 모르고 대신 고개만 나를 향해 돌려세운다. 가슴과 배를 덮은 이불 위로 그의 가녀린 두 팔이 보인다. 허리 옆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두 팔은 장애 때문에 뒤틀린 양쪽 손목과 주먹 쥔 손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는 이불이 덮이지 않은 채 큰 쿠션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혈액순환이 안 되다 보니 자주 붓고 저려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란다. 얇은 이불 무게도 때론 천근같아서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이불을 덮지 않는다는 그의 두 다리의 끝에는 두 발이 八(팔)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침에 활동보조인이 다녀간 후 5시간째 이 상태로 있었다는 그는 “좀 일으켜 드릴까요?”란 말에 하루의 2/3를 이렇게 지내다보면 이도 이력이 난다며 계면쩍은

[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끝나지 않는 전쟁

[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끝나지 않는 전쟁

많은 사위들이 그렇듯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과 술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건설회사에 다니다 은퇴하셨고 정주영의 열혈 팬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자인 장인과 9시 뉴스를 틀어놓고 술을 마실 때면 저는 그저 벙어리 신세가 되기 일쑤입니다. 아주 가끔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을 물어보실 경우에야 에둘러 제 의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역시도 조심스럽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술자리에서 한국전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장인은 전쟁 통에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분인데 남녘에 내려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충남 공주 근처라고 합니다. 왜 하필 공주였나 여쭸더니 그쯤에서 인민군이 피난 행렬을 앞질러 가더랍니다. 그 시절 장인어른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죽음이 지척에 있었던 피난길의 기억은 아주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넝마주의공동체를 이끌었던 윤팔병과 철학자이자 변산공동체인 윤구병 형제 이야기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병부터 구병까지 아홉 형제 중 여섯은 좌익으로,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실종되고, 일곱째는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흔한 관용구로 어찌 전쟁을 겪은 세대의 아픔과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윤팔병, 윤구병 형제의 아버지도 제 장인의 어머니도 자식을 많이 낳지 말라고

[월간 사람] [특집] 아버지의 ‘착한’ 유산

[월간 사람] [특집] 아버지의 ‘착한’ 유산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걷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밥을 흘리지 않고 꼭꼭 씹어 먹을 때,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착해라.” 착해, 참 착해. 40도가 넘는 열이 가라앉았을 때도 칭얼대지 않고 잠이 들었을 때도 그건 모두 착한 일이었다. 알고 보면 그 사건들은 대부분 순리에 맞았기에 대견하거나 고마운 일이었고 예쁜 짓이었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대사는 ‘착하다’였다. 당연한 모든 일들이 ‘착하다’고 치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칭찬과 대가로 분류되지 않고 ‘착하다’는 칭송으로 ‘퉁’쳐 버리는 버릇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혹시 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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