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그리는 데 있어서 반자본 운동으로만 귀결될 수 없는 다양한 의제들과 ‘노동자’로 한정되어 있던 ‘사회변혁의 주체’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확장하고 새롭게 재구조화할 것인가 중요한 과제로 남겨졌다고 생각한다.
누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도서관 문 앞에 있던 기계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까는 좋아졌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기계들이 좀 차가운 괴물 같습니다. 정보를 먹고 사는 괴물.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뛰쳐나오고 싶은 공간에 있는 사람은 홈리스”라는 한 참가자의 이야기는 긴 울림을 준다. 왜 돈이 없으면 안되는지, 우리는 돈이 아닌 무엇으로 공간을 확보할 것인지, 그리고 ‘돈만 있으면 뛰쳐나오고 싶은’ 경우가 왜 여성들에게, 소수자들에게 더욱 많이 생기는 것인지.
너희들이 잘못됐다, 너희들이 잘해라 하기 전에, 같은 대우를 해주면 그만큼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우리도 다 같은 학생이니까요.
가난한 소비자로 전락한 노동자도 찾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양판점은 그렇게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를 양산한다.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가 늘어날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자본은 누구의 몸에 빨대를 꽂는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에이 별거 아니야”라며 그냥 넘기거나, “어쩔 수 없지”라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맞서 인권을 지키려는 ‘까칠함’이 아닐까.
사실, 빅브라더는 이미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빅브라더가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점점 더 확장되는 빅브라더에 민주주의와 인권은 어떻게 맞설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을 반복해서 공격하는 자본주의 구조에 주목한다면 노동권 확보를 위해 전개하는 인권운동은 노동자의 계급적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개발 사업으로 얻는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이라는 자기 이익 때문에 생태문제에 침묵한다면 노동운동은 이익집단의 운동일 뿐, 사회변화를 이끄는 운동으로 대중에게 인정받고 수용되지 못할 것이다.
청소년을 인권을 가진 개개인의 주체로 보지 않고, 집단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는 무생물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결국 그러한 철학 속에서 행하는 교육행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아닌 한 사람이 한 사람에 대하여 일방적인 폭력과 억압을 가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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